이야기/미술과 인물 124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 21세기 미국의 ‘검은 피카소’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미셸 바스키아'를 모를 리 없다. 바스키아는 미국의 '뉴 페인팅'(신표현주의와 신구상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21세기 미국의 '검은 피카소'로도 불린다. 뉴 페인팅은 198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구상 회화로, 1970년대까지 성행하던 전위주의가 후퇴한 뒤 미국과 유럽에서 인간의 형태를 중심 주제로 삼아 등장한 거친 필치의 정력적인 미술사조다. 바스키아는 약관의 나이에 미술계의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고독과 자유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성공을 대가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다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고 말았고, 1988년 27세의 나이에 드라마 ..

백남준 - 날카롭지만 유쾌한 사회비판 비디오 아트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안에는 수백 개의 브라운관이 하늘을 향해 총천연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몸이 움츠려 들었다. 나는 웅장한 스케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하자 저절로 주눅이 들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그 순간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다. 비디오 아트는 백남준이 만들고 발전시켰으며, 수많은 후배 예술가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백남준을 세계적인 작가라고 얘기하면 폄훼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른손을 짝 펴 보인다. 등수로 따지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티스트라고.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백남준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 실감하곤 했다..

벤샨(Ben Shahn) -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적 리얼리즘

벤샨(Ben Shahn)은 경제 공황기 때부터 냉전 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대에 대공황기의 미국미술을 주도하면서 도시 빈민층과 민중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미국 사회의 변화를 꾀했다. 1940년대 이후에는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사회적 리얼리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작품을 선보였다. 내용적으로는 노동자나 빈민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 휴머니즘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폭이 넓어졌고, 형식적으로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실험성과 추상성을 수용해 나갔다. 벤샨이 평생 변하지 않은 것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냉철하고 따뜻한 시선을 작품에 담아낸 점이다. 그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미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육근병 - 인간의 근원적 문제 탐구한 미디어아티스트

육근병 작가는 커다란 눈 하나가 깜박이는 작품으로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에 주목했다. 드로잉과 페인팅, 퍼포먼스, 오디오 비주얼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인간과 사회를 성찰해왔다. 그는 1992년 한국 작가로는 백남준에 이어 두 번째로 카셀도큐멘타에 초대됐다. 카셀의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광장에 ‘동양의 눈’과 ‘서양의 눈’이라고 명명한 설치작품 '풍경의 소리 + 터를 위한 눈 = 랑데부'로 세계 미술계에 주목을 끌었다. 이후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 리옹 비엔날레 등 세계 유수의 전시에 초대됐다.

이승택 - 저항과 실험의 아이콘

이승택 작가는 네거티브의 최강자다. 평생 자신을 파괴하고 세상을 거꾸로 보면서 기존의 틀을 부셔왔다. 때문에 그는 미술계의 이단아, 미술계의 야당인으로 불리지만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미술학도들이 많다. 그는 비물질도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바람 연작과 행위예술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1세대 행위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보여줬던 실험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승택 작가는 1950년대 한국 미술이 서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찰 때 이를 반대했다. 당시 한국 작가들이 서구의 미술사조를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세계 미술 흐름에 동참하려고 할 때 오히려 그는 이를 껍데기만 따라 하는 공허한 짓이라고 비판하고 전통과 민속에서 현대 작가의 정체성을 구했다. 그가 무작정 한국미술의 전통만을 좇은 것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 살아서는 신화, 죽어서는 전설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비가 내린 뒤 물이 고인 파리 생 라자르역에서 중절모를 쓴 한 남자가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기 위해 점프를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 남자의 모습은 수면에 반사된 그림자와 완벽한 대칭구조를 이루고, 뒤쪽 벽면의 포스터 속 무용수의 동작과도 대칭된다. 그는 사진에 무엇을 담으려고 한 것일까? 그의 사진들은 빨리 찍고 아무렇게나 버리는 디지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 흑백 특유의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20세기 근대 사진의 증인이자 현대사진의 서문을 연 선구자, 세계적인 사진가 그룹 매그넘의 창립자다. 그는 사진을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시켜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진미학의 정점을 찍은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브레송은 사건, ..

최민식 - 민중의 희망을 기록한 사진가

최민식 사진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다큐멘터리스트다. 그는 민중의 고단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사진으로 기록했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근대화를 이룬 역사의 한 단면을 숨김없이 담아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뻔했다. 중앙정보부에도 수차례 불려 갔다. 수많은 나라의 사진공모전에 입상해도 비자를 내주지 않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사진은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가난하지만 그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려는 민중의 땀과 억척스러움이 짙게 묻어난다. 예를 들면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 한 아주머니가 선 채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청년이 신문을 팔고 있는 사진이다. 최민식 작가는 생전 자신을 '거지작가'라고 얘기했다. 더군다나 네팔,..

빌 비올라(Bill Viola) -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광주비엔날레였을 것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물줄기에 온 몸이 흠뻑 젖은 사람들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복잡한 머리가 정화되고 뭔가 말로 할 수 없는 통쾌함이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면 빌 비올라는 비디오 아트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한 선구자다. 그는 건축, 음악, 방송, 퍼포먼스 등을 비디오와 결합시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면서 '인간과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비디오 아트라는 매체로 형상화했다. 이를 테면 탄생, 성장, 죽음, 의식 같은 단어다. '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 같은 작품을 보면 그는 흐릿한 인간의 형상이 밝은 공간에 나오면서 점점 실체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 윌리암스(Sue Williams) - 남성 중심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수 윌리암스(Sue Williams)의 작품은 번들거리는 기름처럼 매끄러운 냄새를 풍긴다. 강물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유연하고, 대리석 조각이 놓인 테라스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 소리처럼 몽환적인 감흥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작품은 기존의 추상작품과 성격을 달리한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 부위 같은 이미지들을 나열하고 병합해 추상화한다. 추상화지만 그 자체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다. 수 윌리암스의 작업은 즉흥적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 기억, 상처 등이 사색의 바탕이 되지만 그 표현법만은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이 없다. 그 파장은 매우 커서, 예술과 힘의 관계를 뒤틀 정도다. 수 윌리암스는 1980년대 초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 미학에 반향..

황재형 - 삶과 예술을 일치한 광부화가

황재형은 민중미술 단체 '임술년'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1983년 돌연 태백으로 내려간 이후 3년간 광부로 살면서 태백 탄광촌과 지역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삶과 예술을 일치하며 기층민의 삶에 대한 연민과 소박하지만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냉철하게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태백이라는 장소적 특수성과 황재형의 특별한 인생 이력에 빗대어 사람들은 그를 '광부화가', '탄광촌의 화가'로 부르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대상을 섬세하게 관찰하는 원숙한 시각, 인물과 현장의 사실성을 드러내기 위한 화가의 고민이 가득하다. 황재형의 그림은 밑그림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훌륭한 데생력과 묘사력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덧칠을 가하면서 형상을 지워나간다. 형태를 다듬어..

르누아르 - 그는 왜 기쁨과 환희에 집착했을까?

가끔씩 사람들의 머리카락 끝에서 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다 갑자기 수정처럼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끝자락에 진홍색으로 노을이 타오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겹겹이 밀려와 몸이 들썩인다. 물론 다른 날에도 그런 욕망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투명한 창문을 통해서 흔들리는 사물을 관찰하는 묘함처럼 유별난 인상을 주는 날은 있기 마련이다.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거리의 해묵은 나뭇가지들이 하나 같이 생각에 잠겨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깊은 그늘 속에서도 빛깔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던 날 아침에 르누아르 전시회 초대권이 손에 들어왔다. 내 입에서 감사 인사와 함께 '빛의 연금술사'라는..

샘 프랜시스(Sam Francis) -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추상회화

"왜 이렇게 비싼거야. 나도 그리겠구만." 원색 물감을 뿌려놓은 하얀 캔버스를 본 사람의 말이다. 그는 이런 작품이 몇 억씩이나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은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왜 이 그림이 그렇게만 보이는 것일까' 의아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현대미술은 직관적인 예술 같지만 전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지적인 예술이다. 샘 프랜시스(Sam Francis)는 뿌리기 기법으로 추상회화의 서정성을 극대화시킨 대표적인 화가다. 그는 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공군에 입대했지만 척추에 상처를 입고 전역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서 앵포르멜 운동에 자극을 받은 뒤 이를 자신들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작품은 색과 구성 ..

토랄프 크노프로흐(Thoralf Knobloch) - 애써 찾아내야 볼 수 있는 풍경

삼청동 진입로를 걷다 독일 출신의 평면 작가 5인 에버하르트 하베코스트, 프랑크 니체, 타트야나 돌, 토랄프 크노프로흐, 슬라보미르 엘스너의 전시회를 보게 됐다. 전시 카탈로그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작가'라고 쓰여 있었지만, 이들은 세계 화단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였기에 '정말 국내에 처음이야'라는 의아심이 들었다. 토랄프 크노프로흐의 그림은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그의 작품을 자세히, 하나하나 바라보면 일상에서 애써 찾아내야 보이는 풍경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그는 우리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풍경을 주제로 회화 작업을 한다. 특히 드레스덴 주변의 환경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는다. 토랄프 크노프로흐는 심미적인 눈으로 풍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길 이미지를 사진에 ..

조덕현 - 현재로 소환한 역사 속 인물과 사건

조덕현. 그는 독해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화가다. 1995년이었다. 그는 80평 남짓한 국제갤러리 2층 전시공간에 흙을 가득 채우고 막 태어난 아이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꺼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갤러리 건물의 한쪽 벽면을 뜯어낸 뒤 굴삭기로 흙을 퍼 올리던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지만 이날의 퍼포먼스도 가슴을 찡하게 했다. 이 순간이 바로 그가 공간에 대한 은유와 이해력이 풍부한 화가라는 사실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갤러리 한쪽 구석에는 인큐베이터처럼 이들을 지키는 허름한 초소가 있었고, 1층 전시장에는 해묵은 가족사진들이 여러 장 그려져 있었다. 이날 뿌려진 엽서에는 3~4세가량으로 보이는 아이가 벌거벗은 채 아이들의 초상화와 함께 서 있었다. 아마도 제목은 '삶의 계보학..

천경자 - 삶의 절망과 좌절이 담긴 여인의 눈망울

클로드 모네 작품을 보러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렸다 천경자 화가의 그림을 덤으로 보게 됐다. 그의 작품은 이미 본 적이 있어서 이전보다 감동은 덜했지만 마음을 잡아당기는 매력만은 그대로였다. 천경자 화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그림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찬연해 보여도 속에는 여러 가지 상징성이 내포돼 있다. 여기에는 인간 내면세계의 복잡함, 자연의 신비로움, 생명의 경이로움, 예술의 아름다움 등 다양한 사유의 세계가 포함된다. 그녀의 작품에는 고독하고 쓸쓸한 여성의 모습이 숨어 있다. 이 사실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눈망울을 자세하게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 실패와 여동생의 죽음, 또 화가로 살아가면서 느껴야 했던 절망과 좌절 등 자신의 ..

니나 글래서(Nina Glaser) - 인간이 해야 할 일

사진은 모두 다르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일지라도 빛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찍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사진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독 그 다름의 깊이가 달라 특별한 감흥을 주는 사진이 있다. 열렬하게 사모하도록 만들지는 못하지만 치를 떨며 자신과 만나게 하는 사진이다. 그런 사진은 인간의 즐거움과 슬픔의 근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니나 글래서(Nina Glaser)의 사진이 바로 그런 사진이다. 니나 글래서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내 모습과 대면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흩어져버렸다. 아직까지도 그 사진들을 떠올릴 때면 거칠고 척박한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는 피사체들에게 둘러싸인 채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가다 아메르(Ghada Amer) - 실과 바늘로 남성 억압에 저항하기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보았던 이집트 출신의 작가 가다 아메르(Ghada Amer)의 작품이 잊히지 않는다. 무수하게 얽히고설킨 실들이 만들어낸 오묘한 형상 앞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가다 아메르는 진보적인 성향의 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외교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정책을 지지했던 아버지를 따라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나라 여성의 삶을 보고 배우며 이집트 여성들의 권익과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가다 아메르는 물감과 붓 대신 실과 바늘을 이용해 여성성을 강조한다. 바느질 기법을 이용해 독자적인 페인팅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전통적인 회화에 반하는 혁명이자 작가들의 신비로움을 극대화하는 추상표현주의의 의도마저 파괴하는 형식이다. 그녀는 포르노 잡지의 모델을 캔버스에 ..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

현대미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기억할 것이다.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된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2002년작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다. 이 작품은 노동의 신성함과 숭고함을 일깨우는 조각이다.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995년이었다. 경복궁에서 삼청동 방면으로 올라가다 보면 건물이 하나의 조각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국제갤러리가 있는데 그 지붕 가장자리에 그의 작품이 '걷는 여자(Walking Woman)'이 설치돼 있었다. 이 작품은 빨간 티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고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를 형상화했다. 국내에서 브로프스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싱잉 맨(Si..

루이스 브르주아(Louise Bourgeois) - 끌어안은 인간의 상처

루이스 브르주아(Louise Bourgeois) 20세기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은 프랑스 출신 거장이다. 말로만 듣던 그의 작품을 눈앞에서 직접 감상한 것은 20여 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웠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90세였다. 루이스 브르주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부적절한 관계와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자아에 깊이 자리 잡았고, 작품에도 남성과 여성의 갈등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담게 됐다.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사에 대한 모순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평소 "내게 조각은 신체다. 내 몸이 곧 ..

아라이 신이치(ARAI Shin-ichi) - 역설의 미학, 해피재팬(Happy Japan)

아라이 신이치(ARAI Shin-ichi) 작가와의 인연이 족히 20년은 넘은 것 같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그와 퍼포먼스 아트에 대한 생각들을 이메일로 교환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해피 재팬(happy Japan)'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지배하려는 일본을 조롱한다. 이 작품은 관동대학살, 위안부 문제 등 역사적인 사건에서부터 한창 논란이 됐던 역사교과서 왜곡 등 그 외연이 광범위하다. 아라이 신이치 작가는 예술을 실행함에 있어 매우 과감하다. 그는 발가벗은 채 일종의 항의 서한 같은 문구를 줄줄 읽은 뒤 일본 비자를 항문에 대고, 핏빛 물감을 엉덩이에 묻혀 일장기를 그리며 그 위에서 춤을 춘다. 또 피카추를 성기에 꼽고 제국주의의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하며..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 - 철로 그려낸 거대한 선의 드로잉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는 무거운 철이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 시원한 붓칠을 보는 듯한 조형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는 개념예술가다. 미술의 목적은 미가 아닌 지식을 담는 것, 미술의 역사를 바꾸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기존의 미술사조와 담론을 뛰어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브네의 작품은 에펠탑과 라데팡스 등 세계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돼 있다. 브네는 1960년대부터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프랑스 미술의 전통을 거부하고 급진적인 창작 작업에 몰두한다. 1989년부터는 철 조각의 전통적인 규범을 깨고 열린 공간 속에 부유하는 '비결정적인 선(Indeterminate Line)'의 세계로 확장한다. 어떤 원칙이나 경계가 존재하지 않고, 무한히 확장하는 조형 세계를 구축하..

스텔락(Stelarc) - 낡은 몸을 대체할 기계

스텔락(Stelarc)은 테크놀로지 아티스트다. 인간의 신체에 기계를 결합하는 실험을 예술적으로 승화한다. 의료기기나 보철물(prosthetics), 로봇공학, 가상현실 체계 등으로 섬뜩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면서 낡은 몸과 기계의 교체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는 제3의 신체를 만드는 기계 예술가다. 대단히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인간의 육체를 탐구하며, 인간의 기능 확대를 꾀한다. 그의 작업 영역에는 신경계의 움직임과 외골격, 청각과 시각 등 감각의 제어까지 포함되며, 이러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 각종 근육 신호와 혈액의 흐름, 뇌파, 폐, 위 등 인체 내부 공간에 대한 실험까지 펼친다. 스텔락은 1968년부터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작가로 활동했으며, 1972년 바디 서스펜션스(Body Suspensi..

광화문에서 즐기는 열두개의 조각 여행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에게는 잠시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다. 한눈을 팔면 누군가에게 물어뜯길 것처럼 예민하다. 그럴 때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일상이 펼쳐진 공간을 둘러보자. 우리의 삶과 이웃에 애정을 갖다 보면 야생의 들판처럼 거칠어졌던 마음이 순화된다. 우리의 일상을 정화시키는 예술작품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서로 눈치를 살피고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는 세상이라지만 마음의 여백을 더욱 넓히고 감성을 키우다 보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생긴다. 높게 솟은 빌딩과 이곳에 설치된 예술작품은 매우 대조적인 인상을 풍긴다. 빌딩은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외롭고 우울한 색채를 띠지만, 예술품들은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이 거리에 청량한 바람을..

박서보 - 평생을 바친 모노크롬

박서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던 단색화 화가다. 박서보는 '묘법'이라는 무채색의 모노크롬 작업을 지속하면서 화단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0년을 기점으로 그는 '묘법'에 '색채'를 첨가하면서 더욱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박서보 그림의 색채는 매우 열정적이고,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나다. 또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색을 캔버스에 살려내면서 예술적 정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모노크롬'이란 한 가지 색만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주로 검정이나 짙은 갈색을 쓴다.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 거꾸로 걸린 그림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는 '거꾸로 걸린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1969년도부터 작품을 거꾸로 걸기 시작했다. 재현적이고 내용 중심적인 이전 작품의 특성을 극복하고 회화의 기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표 작가다. 그는 강렬한 붓터치와 색채가 두드러지는 그림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형태를 자유롭게 왜곡하고 비틀어 불안정한 심리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그의 작품 '러시안 페인팅'은 가볍고 투명해 마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짙은 색채로 화면을 가득 채웠던 기존의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다. 러시안 페인팅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작업한 작품이다. 그는 현대미술에 있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 꿈 같은 현실로 비추는 인간의 내면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는 현실세계와 분리된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이 공간에 파격적인 사운드를 곁들이고, 시각적 환영으로 꿈같은 현실을 연출해 스스로 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은 크로스오버의 결정체다. 그는 음악, 연극을 비롯해 문학과 다양한 미디어들을 사진, 비디오, 페인팅, 드로잉, 조각 등과 결합해 작업한다. 그의 작품에는 세상에 대한 우울한 시선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무더위는 갔다(Dog days are gone), 사랑이 우리를 만든다(Love invent us) 등 혼잣말 같은 구호를 작품에 써놓고 헛된 희망보다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1990년 이후 패션 사진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작품, 착시효과가 일어나는 대형 ..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 - 완벽한 화이트주의자

150,000,000원 하얀 캔버스 옆에 붙여진 가격표를 보고 놀랐다. 하얀 물감으로 칠한 이 캔버스가, 아니 손바닥만 한 이 작품이 1억 5천만 원이라니. 정말 기가 막혔다. 그때가 1995년도였으니까, 지금은 작품 가격이 어느 정도일지 의문이다. 그림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예술성을 보고 산다는 말이 맞나 보다.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은 정사각형의 흰색 화면을 고집한다. 하지만 정말 눈앞에서 보면 휑하다. 그는 '흰색은 그림의 여러 가지 성질을 드러내는 색'으로 보고 흰색만을 이용해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로버트 라이만은 우연한 기회에 붓과 물감의 느낌을 경험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뉴욕 현대미술관 경비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미술공부에 전념했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 - 비탄에 잠긴 인간들

남자의 정액은 곪아가는 다리를 타고 흐른다. 여자의 젖가슴에서 흘러나온 우유는 아랫도리로 뚝뚝 흘러내린다. 땅을 향해 떨군 두 인물의 얼굴은 비탄에 잠겨 있고, 공중에 매달린 채 힘 없이 처져있는 육체는 비참하고 처절하다. 1991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가장 저주스럽고 숭고한 미술작품이 전시됐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벌거벗은 남녀 등신상 조각이다. 당시 예술전문잡지를 가득 채운 이 작품을 보면서 구토가 날 것 같았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편으론 가슴 찡한 울림과 연민을 경험하기도 했다. 벌겋게 헐벗은 몸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서 고통과 비탄에 잠겨 있는 인간과 우리 사회의 참혹한 자화상이 연상됐다. 키키 스미스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여성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 게으르지 않은 천재

비토 아콘치(Vito Acconci)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여느 작가들보다 흉측하고, 솔직하며, 마음을 쑤시는 '애절함'이 가득하다. 비토 아콘치는 말만 번지르르한 예술가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천재로 불렸지만 젊었을 때 만용하지 않았으며, 말보다 몸을 먼저 움직일 만큼 성실했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비디오 아트 장르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의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끊임 없이 제시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완성했다. 자신의 신체와 신체가 복제된 영상,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신과의 공간적 분리감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면서 인류의 극심한 혼란과 고뇌 즉, 물질문명과 기술혁신이 파생시키는 인간의 비애와 슬픔을 형상화한 작품이 대표적이다. 비토 아콘치는 1980년대 부터 건축 디자인에 ..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 그림으로 승화한 상처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전쟁과 망명으로 이어진 고된 삶을 살면서 인간의 상처와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는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작가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다. 막스 베크만은 바이마르 예술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구트만의 '에우리디케'와 자신이 애독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에 등장하는 죄수들의 목욕을 주제로 한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 당시 석판화는 베를린 분리파 회원들이 즐겨 사용하던 미술매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위생병으로 지원한 후 플랑드르 참호와 의료시설의 끔찍함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예술을 바라보게 됐다. 베크만은 종전 이후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불교를 흠모하고, 동양사상에 흠뻑 빠져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