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척해진 마음을 어루만지며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아옹다옹 다투며 공멸해 가는 인간 군상을 목격한 까닭이다. 몇 번이나 농담을 늘어놓으며 헐벗은 마음을 중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왼쪽으로 눈동자를 돌린 한 소녀의 ‘잔상’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려고 종일토록 걸어 다녀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으스스한 소리로 되돌아오는 산울림처럼.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터널을 지나 넓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하지만 쉽사리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비스듬하게 뻗은 도로 사이에 펼쳐진 배추밭 가로줄 이랑이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산야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자색 구름도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촘촘하고 거대하게 펼쳐진 인간사마저도 모두가 공허하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져 답답하고 쓸쓸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지향점인 ‘참된 존재로의 순화’라는 것일까. 삶의 책무이자, 유익한 체험이며, 모든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참된 예술성으로의 복귀. 이흥덕 작가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진실한 삶의 길로 인도하는 ‘예술가’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겨본다.
“우리나라는 그릴 소재가 많아요. 세상이 편안하거나 안정되면 갖가지 문제들을 표현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이라는 것의 고유 역할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얘기하는 것이요.”

‘저항의 암시적 풍경’을 주제로 제비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이흥덕 작가를 만났다. 미칠 듯이 고대했던 작품과의 만남은 늘 설레는 일.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얼큰한 감동이 가슴속에 밀물처럼 쏴 밀려 들어왔다.
80년대 민중미술가로 알려진 이흥덕 작가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사회적 사실주의’ 성향의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회적 사건들, 이슈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려냈습니다. 사회의 갖가지 문제에 대한 생각을 관람객들과 함께 공유하고 해결점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요.”
그의 그림은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에서부터 전쟁과 폭력, 파괴와 죽음, 갈등과 모순, 자본과 성(性) 등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화젯거리들로 가득하다. 미처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며 수많은 상황들이 블록처럼 얽혀 있다. 또 시공과 구조를 넘나드는 일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면서 하나로 짜깁기돼 비극은 희화되고 극대화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려주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화풀이 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현실을 가감 없이 재현한다. 사회 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발견하게 만들면서 내팽개쳐진 인성을 주워 담자고 호소한다. 마치 행방불명된 동생을 찾는 광고처럼 우리 사회의 화자와 청자를 연결하면서 소통을 유도한다.
80년대 이흥덕 작가는 ‘카페시리즈’를 통해 정치적인 문제들을 화폭에 풀어냈다. 예를 들면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토론하는 모습이나 백담사에 전두환이 기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좀 더 큰 덩어리에 관심을 쏟아내고 있다. 이를 테면 남과 북의 갈등이나 범아시아적인 테마다. 그는 이러한 ‘영역확장’의 연장선상에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으며, 현지인들의 반응이 좋아 연장 전시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여전히 ‘강자와 약자’이다.
“80년대부터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보통 쫓는 자는 사나운 남자나 개였고 쫓기는 자는 소녀나 나약한 남자였죠. 독재정권 시절부터 작품에 표현했던 주제와 대상이 제 그림의 기본적인 틀이 됐어요. 지금까지도.”
이흥덕 작가의 작품은 놀랄만한 재치와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냈을까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와 경쟁하는 듯 그의 그림은 뒤떨어질세라 풍부한 상상력으로 넘쳐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철저한 계획 하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토끼 한 마리까지도 모두 의도된 것이며 우연은 없다.
“미디어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풍경이나 정물, 아름다운 대상은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되지 않아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에는 또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주연배우가 있다. 작가 자신의 초상과 곁눈질을 하고 있는 사춘기 소녀다. 그는 왜 자신의 얼굴과 소녀를 작품에 넣은 것일까?
“작가가 적극적으로 갖가지 문제들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림 속에 등장해 관객들을 쳐다보면서 함께 우리 사회를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익명의 한 소녀도 관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매개체이고요. 그림은 관객들에게 ‘소녀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을 건네고, 소녀는 세상의 암시적인 모습을 얘기합니다.”
이흥덕 작가는 그림만 그려서 생활할 수 있다면 교직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돌려 얘기하는 것이겠다. 이 작가 같은 예술가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명성을 얻고 예술가로서의 소명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화가의 길은 가슴앓이다.
이흥덕 작가는 2018년 제2회 한국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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