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박창영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입자장 - 어떻게 이것을 손으로 만들지

이동권 2022. 9. 29. 20:19

박창영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입자장


오래된 예술품 앞에서는 영혼을 압도하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져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여러 해 동안 쌓인 노동과 숙련의 흔적들은 여느 오래된 것보다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도취돼 그 속에 빨려 들게 만든다.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입자장(笠子匠) 박창영 옹의 땀과 솜씨로 빚어낸 갓도 그와 비슷한 탄복을 자아내게 만든다. 대나무로 가느다란 실을 만들고, 그 실을 직물이나 뼈대처럼 짜내는 섬세함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박창영 옹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에는 시간을 거슬러 온 것처럼 예스러운 것 일색이었다. 100년도 넘어 보이는 화로와 인두, 장인의 손때가 묻은 작두와 칼, 그리고 붉은 천연염색제와 짠지 얼마 되지 않는 갓 살까지, 그곳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작업실이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만 아니라면 조선시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갓을 눈앞에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합성수지로 찍어낸 갓이나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갓을 스치듯 보긴 했다. 하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갓을 만져보고 살펴본 적은 없었다. 갓에 대한 첫 느낌은 참으로 탄탄하고 매끈하다는 것. 그리고 갓의 유려한 곡선과 촘촘한 양태는 마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만들어져 떨어져 내린 것 같은 신비로움마저 발산했다.

갓은 우리 조상들이 외출할 때마다 썼던 의관이자 멋을 내는 수단이었다. 애초에는 햇볕이나 비바람을 가리기 위한 모자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사회적인 신분을 보여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전통행사나 브라운관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무실해졌다. 따라서 갓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요즘 갓 쓰는 사람이 있나요. 청학동 사람들이나 종갓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문화재청에서 구입해 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죠. 생계를 잇는 수단은 되지 않아요. 대신 정부에서 전승지원금으로 130만 원을 주긴 합니다만 재료비나 활동비로 쓰면 남질 않습니다. 정부에서 옛 장인들에게 많은 지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400여 개가 지정돼 있다. 하지만 전수자가 없거나 생활이 어려워 인간문화재로 200여 명정도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70세. 병원비 마련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우리 문화유산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있는 것을 비춰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인간문화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시급하다.

박창영 옹의 고향은 경북 예천군 돌티마을이다. 이곳은 대대로 갓의 명산지로 유명하다. 박 옹이 처음 갓을 배울 때만 해도 갓의 수요가 많았다. 갓 한 개의 값이 쌀 다섯 가마니 정도. 그래서 그의 집안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갓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박 옹의 집안은 증조부부터 갓을 만들기 시작해 현재 5대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도 17~18살부터 갓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해 50년 넘게 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제가 처음 갓을 만들 때만 해도 어르신들이 갓을 많이 썼어요. 수요가 많았지요. 가까운 마을에서부터 전국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경기가 참 좋았습니다. 20대에는 고향에 갓방을 차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갓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1978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방송국에 갓을 대는 일을 했다. 무작정 방송국에 찾아가 자신이 만든 갓을 써달라고 했다. 품질이나 격이 다른 갓과는 차이가 났고, 스스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영화나 TV 속에서 배우들이 쓰고 나오는 갓은 대부분 그가 만든 것이다. 이후 박 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핀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시연과 전시를 열면서 우리 갓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갓은 원래 4명이 한 조가 돼 만들었다. 사장일, 곱배기일, 갓 모으는 일 등의 공정을 거쳐 제작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명맥이 다 끊어져 4명이 할 일을 혼자 다 한다. 박창영 옹도 마찬가지다.

갓 만드는 기술은 매우 섬세하고 정밀해 보통 10년 이상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갓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얇은 대나무인 세죽사(細竹絲)를 하나하나 엮어 모자 부분을 만들고 이어 양태를 엮는다. 세죽사 가닥마다 명주실을 하나하나 붙이고 먹칠과 옻칠을 한다. 그리고 모자와 양태를 엮어 모양을 잡는다. 이처럼 갓은 만드는 것 자체가 인고의 나날이다.

“갓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갓의 질이 중요하지요. 옛날에는 갓 장인들을 집안에 불러놓고 밥 먹여가면서 최대한 좋은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옛 ‘죽전립’이나 ‘흑립’ 같은 작품을 재현해서 제대로 만들려면 1년도 좋습니다.”

갓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체력과 인내심이 필수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다 갓을 만드는 일은 하루 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엮고 인두질하는 작업은 잠시의 식사시간만 허락한다. 체력 소비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박 옹은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젊었을 때 권투를 배웠다.

“갓을 만들다 보면 하체가 부실해지니까 권투를 했습니다. 대구에서 밴텀급 챔피언도 했죠. 도장에서 후배들 운동도 가르쳐주기도 했고요. 권투를 하면서 몸 관리를 잘해 인내력과 집중력이 강합니다.”

몇 년 전부터 박창영 옹은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갓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고 있다. 불에 타버린 초상화나 유물로 나온 갓의 일부를 보고 옛 모습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옛 유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아들이 전해준다.

그는 ‘철종어진’에 나오는 갓인 ‘죽전립’, 사대부들이 주로 썼던 ‘박쥐 문양 갓’과 국상 때 주로 썼던 ‘백립’ 등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그는 모든 작품을 아끼지만 그중에서도 애착이 가는 작품은 재현 작업을 통해 만든 갓이다.

이제 갓 만드는 일은 박 옹의 아들 형박 씨가 지고 간다. 박 옹은 돈도 되지 않고 힘든 가업이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은 아들이 무작정 대견스럽다.

“좋습니다. 아들이 자청해서 갓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어 다행입니다. 아들 말고는 전수자가 없는 상황이죠. 솜씨도 나름 있어서 잘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선조들이 만든 갓은 지금의 갓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기술이 뛰어납니다. 갓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지만 그 명맥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