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124

밀레(Jean-François Millet) - 농민과 노동을 예술로 끌어올려 상류층을 비판한 화가

벼를 수확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화가가 있다. 해 질 무렵, 한 쌍의 농부가 들녘에서 삼종기도를 올리는 그림 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다. 밀레는 들에서 일하다가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 드렸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을 그렸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주변에 갈퀴와 바구니, 자루, 손수레 같은 농기구들을 볼 수 있다. 그가 농촌에 애정이 없었다면 그려내기 힘든 사물이다. 또 광활하고 황량한 들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밀레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는 농촌을 사랑했고, 노동을 찬미했으며,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화가였다.밀레는 농민이나 노동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당시 ‘농민 화가’라고 불릴..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 인도의 적나라한 빈곤과 구습을 이야기하다

인도가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진보하고 거대화된 인도가 아니다. 경제성장과 서구화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곳에서 사는 인도인들의 일상이다. 삶의 가치가 물질로 판단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인간과 생명보다 돈과 이윤이 중요하고, 인간의 욕망까지도 조작하는 물질만능의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를 인도 또한 겪고 있다. 그러나 구습이 개혁되고, 봉건적 가풍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해도 인도의 자본주의는 힌두교와 카스트제도에 맞물려,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피폐하다. 수보드 굽타(Subodh Gupta)는 인도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인도의 모든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부엌용품이나 황동제 고물 식기와 힌두 문화를 반영하는 소 배설물이나 우유 같은 성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고, 인도인의 음식..

최신규 - 역동적인 도시와 반복되는 결에서 찾는 사진미학

최신규 사진가는 ‘두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는 ‘도시’다. 최신규의 ‘도시’는 명쾌하고 찬란한 조감이다. 한 작품만 떼어 놓고 관찰하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작위적이고 과장되게 느껴지지만 여러 작품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 서울,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자주 들르는 관광명소를 역사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인식하게 만든다. 겉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속은 비어있을 거라는 속단은 사라지고 ‘멋짐’이 풍기는 그 내면 깊숙한 곳에서 건축, 미술, 디자인, 문학, 음악 등이 하나로 어우러진 한국의 총체적 문화예술과 마주하게 된다. 장면을 포착하고, 구도를 잡고, 빛을 파악하고, 여러 번 촬영하고, 끊임없이 실험하면서 작품에 창의성을 부여한 결과다. 최신규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게하르트 그로스(Gerhard Gross) - 일상 탐구, 반복과 미묘한 변화의 미학

당신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반추해 보는가,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시해 버리는가. 특히 타인의 슬픔을 볼 때 어떠한가? 혀를 끌끌 차고 마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나누는가. 오스트리아 사진작가 게하르드 그로스(Gerhard Gross)는 인간에 얽힌 갖가지 일상과 현상을 훑어보면서 삶의 고뇌나 흔적들을 탐구한다.   게하르트 그로스의 작품을 보면 끈질긴 예술적 탐구가 지닌 ‘힘’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과 노동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 감흥을 한층 더 높인다. 그의 작품은 또 우리가 일상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나 쉽게 넘어가버렸던 것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과 마주하는 경험을 주선한다. 그의 작품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희명 - 예술가의 고독과 전투를 보다

공포스럽고 흉측하다. 현실의 평온을 갉아먹는 여러 군상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희명 화가의 그림에서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나 충격적인 퍼포먼스들이 연상됐다. 이름만 들어도 뒷목이 오싹해지는 크리스 쿡시, 블라디미르 쿠쉬, 에두아르도 나렌조 같은 작가들도 생각나고 몽환적인 레메디오스 바로,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같은 작가들도 떠오른다. 이런 풍의 작품들을 보면 그치지 않고 편두통이 인다. 몽상이 부른 정신적인 피곤함 때문이다. 불안이나 초조와는 다르다. 원인불명이다. 이희명 화가의 작품은 어둠이 순식간에 눈동자를 수축시키는 것처럼 눈두덩을 끝없이 짓누른다. 여러 개의 눈과 검은 피부, 치아만 보이는 얼굴, 닭다리처럼 잘린 손가락 등 기괴한 신체와 물체들이 잠자리마저 괴롭힐 것처럼 강렬하게 ..

에릭 칼(Eric Carle) - 분수를 가르치는 ‘배고픈 애벌레’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는 에릭 칼(Eric Carle)의 대표작이다. 1969년 첫 발간돼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배가 고파서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파먹는다. 월요일 사과 1개, 화요일 배 2개, 수요일 자두 3개, 목요일 딸기 4개, 금요일 오렌지 5개를 먹다가 토요일에는 더 이상 과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의 음식까지 먹는다. 결국 배탈이 나지만 일요일에 자기 분수에 맞는 음식(나뭇잎)을 찾아내 먹고 만족한 뒤 예쁜 나비가 된다. 에릭 칼은 풍부한 감수성과 놀라운 상상력을 자랑하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티슈페이퍼를 활용한 콜라주 기법은 남녀노소 모두가 반할 만큼 독창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다양한..

재럴딘 하비엘(Geraldine Javier) - 인간의 삶과 관련된 영적, 정신적인 이야기

재럴딘 하비엘(Geraldine Javier)의 작품은 매우 어둡고 불안하다. 시골 생활과 자연의 이미지가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복잡하고 역동적인 그곳에는 안식처가 있다. 삶에 지친 우리가 쉴 곳이 있다. 그의 작품을 천천히 관조하듯 바라보면 한데 어우러지면서 직조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70년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자신의 미술 재능을 깨닫고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2003년 필리핀 문화 센터가 선정한 13인의 주요 아티스트에 선정됐으며, 그의 작품이 2010년  홍콩 크리스티 옥션에서 예상가의 7배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되는 등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제럴딘 하비엘은 나무나 새 같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자연의 이미지로 종교나 신..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 추상과 구상의 모호한 혼재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은 YBA(Young British Artists, 브릿 아트)가 주창하는 젊은 미술의 개념적 성향에 반항해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종류의 YBA의 선두주자가 됐다. 젊은 작가들과 화단이 새로운 것을 열망할 때 반대로 고전으로 돌아가서 구상과 추상을 모두 포용하는 회화의 길을 개척했다. 세실리 브라운은 윌렘 드 쿠닝, 조안 미첼, 니콜라스 푸생, 루벤스 등의 거장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추상과 구상을 결합을 추구하면서 추상과 구상의 구분이 모호하도록 대상의 명백한 묘사를 거부했다.     초기에 세실리 브라운은 그렇지 않았다. 토끼의 성교, 날개가 달린 남근의 형상과 같은 노골적인 성교 장면을 그렸다. 그의 도발적인 작품들은 화단과 상업미술계에 크나..

김종학 - 추상에 기초한 새로운 구상 회화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이 조화를 부린다. 투박하고 장난스럽게 보이지만 한결같이 남성적인 색채의 천태만상으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고갱에게 타히티, 앤젤 아담스에게 요세미티가 있다면 김종학에게는 설악산이 있다. 김종학 작가는 해방 후 현대미술의 도입되고 정착되는 시기에 설악산으로 들어가서, 설악산을 사랑하는 최고의 로맨시스트가 됐다. 그가 설악산으로 간 이유는 새로운 화풍에 대한 탐색이었다.김종학 작가의 설악산은 1979년부터 시작됐다. 김 작가는 그 당시 한국 화단의 전위성, 실험성, 추상성 열풍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꽃과 풀, 산과 달, 바람과 물 같은 소재로 추상에 기초한 새로운 구상 회화를 선보였다. 김종학 작가는 나약하고 여성적인 꽃도 선이 굵은 남성적 풍경으로 변모시킨다..

정선아 - 산뜻하고 발랄한 상상력 자극하는 풍경

정선아 작가는 그림 그리는 행위에 커다란 행복을 부여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뇌리쬐는 연둣빛 잎사귀와 시원스러운 바람에 움지적거리는 푸릇푸릇한 풀숲에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염원이 느껴진다.  그림의 소재는 초현실적이지 않다. 초현실적인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바깥세상의 풍경을 그림의 소재로 끌어들인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관점에서 본 풍경을 어느 누구나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화젯거리로 던진다.  아마도 정 작가는 그림 그리는 행위의 결과물이 자기애에 함몰되거나 자기만족에만 그치길 바라지 않는 듯하다. 마음의 담장을 허물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기를 원한다. 풍경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거부감 없이 교류될 수 있는 미적 주제이지 않은가. 정선아 작가의 작품을 보니 모처럼..

이흥덕 - 평생 각성된 눈으로 그려 온 인간 사회 ‘이흥덕의 극장-사람·사물·사건’

등골이 오싹하기도 하고, 속이 드글드글 끓어오르기도 하고,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작품 속 이야기 하나하나가 아슬아슬한 곡예를 타는 듯해서 잔뜩 궁금증이 인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이흥덕 작가는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부터 작품에 표현했던 주제와 대상은 언제나 강자와 약자였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즉 강자의 폭압성으로 약자의 위기와 고통을 그려 왔다. 평생 정물화만 그려 세계적인 거장이 된 조르조 모란디 같은 작가도 있지만 평생 각성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흥덕 작가도 있다. 이흥덕 작가는 인간 군상들의 갈등과 욕망을 캔버스에 채운다. 째려보고, 시기하고, 흥분하고, 다투고, 욕설하고, 때리고, 불 지르고, 멍 때리는..

카를로스 아모랄레스(Carlos Amorales) - 수만 마리의 검은 나비로 연출하는 초현실적 분위기

매년 봄, 전라남도 함평에서 나비축제가 펼쳐질 때마다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검은 나비로 전시장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Carlos Amorales)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의 작품 ‘Black Cloud’는 종이로 만든 다양한 크기의 나비 2만5천 마리로 전시장 벽과 천장에 설치한다. 작품 설치에는 14명으로 구성된 팀이 5일 동안 쉬지 않고 작업한다. 그 결과물은 대단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나비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쌓여 있어서 놀랍고, 나비들이 쌓임으로써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초현실적이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는 멕시코 현대 문화와 이슈들을 소재로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음악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

장숙 - 죽음의 무게를 보여주는 ‘늙은 여자의 뒷모습’

종로 3가 한복판. 머리를 산발한 채 길거리에 엎드려 누워 있는 맨발의 늙은 여자를 봤다. 한 겹 두 겹 덧칠하듯이 얼굴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검버섯과 축 늘어지다 못해 겹겹이 엉겨 붙은 목주름,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금이 간 발바닥이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그대로 투영했다.  사람들은 늙은 여자가 불쌍했을까?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그녀 앞에 붕어빵을 놓아두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불같이 분노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발끈 화를 내며 붕어빵을 그 사람에게 던졌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는 노숙자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고 절규하는 듯했다. 장숙 작가의 ‘늙은 여자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늙은 여성의 몸을 사유하듯이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운명의 끝..

이영 - 다종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상호 연결된 인드라망

동심원은 다채로운 색채가 변주하고, 올록볼록한 형태미를 발산한다. 원형이 반짝이고, 원형 구조가 어우러지고 확장하면서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다양한 원형의 색채와 조형, 찬란한 빛의 음영과 볼륨으로 색다른 공명을 전한다. 고도로 세련된 도안적 구성은 강렬한 생동감과 밀도 높은 침성(묵직하게 가라앉는 성질)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허공에 겹쳐 놓은 것 같은 수많은 원형 이미지를 창조하고, 조화롭게 병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실험을 했을까? 이영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생물과 사물이 존재하고,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살면서 진화하고 윤회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불교 철학에서는 이를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인드라망은 에 나오는 말로,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에..

장 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 지금도 사랑받는 꼬마 니콜라와 좀머 씨

장 자크 상페는 삽화가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호소하며 호두나무 지팡이를 쥐고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던 좀머 씨의 모습을 그린 만화가다. 끝내 호수 속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보다 그의 그림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외로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마지막 절규는 잔잔한 그림 하나로 충분히 전달됐다. 장 자크 상페는 1932년 프랑스 페삭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르네 고시니와 함께 만들어낸 동화 ‘꼬마 니콜라’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꼬마 니콜라’ 시리즈는 1959년 첫 발표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스테디 설러이자 어린이를 위한..

만 레이(Man Ray) -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그린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사진작가가 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다. 그 당시 경매가가 어마어마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만 레이의 작품 '르 비올롱 댕그르(Le Violon d' Ingres)'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2022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천240만달러(약 159억2천780만원)에 최종 낙찰됐다. '르 비올롱 댕그르'는 나체 여성의 사진 위에 바이올린 에프홀을 그려 넣고 다시 사진을 찍어 인화한 작품이다. 사진 속 여성은 만 레이의 애인이자 모델, 화가 등으로 활동했던 알리스프랭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을 오마주했다. 만 레이는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사진을 그린다는 개..

홍효 - 강렬한 꽃의 생명력으로 투영한 나

정형화된 스타일이 파괴된 이미지에서 까닭 모를 희열이 진득이 밀려온다.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가라앉지 않은 색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활짝 핀 꽃들이 전위적으로 어우러지며 찬란한 생의 의욕을 고취한다. 홍효 작가는 자유분방한 색채와 붓터치로 형상화한 꽃의 강렬한 생명력에 희망이나 행복 같은 감정들을 투영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지 않게 변형하고 휘갈기면서 강조한 이미지로 대상의 실제성을 더욱 부각한다. 인간의 희망이나 행복도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홍효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 감동은 배가 된다. 홍효 작가의 ‘문득’전은 4월 16일부터 28일까지 갤러리 더플럭스 더플로우에서 열린다. 전시장 전경 작품 사진

공성훈 - 인간사 통찰하는 풍경화

공성훈 작가는 자연과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풍경화로 그려내면서 인간사를 통찰했다. 인간사는 모두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일부분이고, 모두 인과 법칙에 따라 아랑곳없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공 작가는 전반기에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설치 같은 실험적인 작업에 전념했다. 이후 1998년을 기점으로 회화 작업에 집중해 도시와 자연을 밀도 높은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는 2021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18년 19회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다. 공성훈 작가의 ‘바다와 남자’전이 4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선광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의 고향인 인천이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공 작가의 작품은 그가 직접 현장에 보고 체험한 기록을 ..

류인 -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한 조각가

故 류인 조각가는 근현대 조각의 구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표현기법을 과감히 모색한 조각가다. 조각의 볼륨과 무게 그리고 재료적 물성을 이용해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했지만 과감한 인체 생략과 왜곡, 극적 강조 같은 형상성을 도입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류인 조각가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아버지 류경채와 희곡작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자의식과 흙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80년대 당시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한국 화단에 정밀하고 힘찬 인체 구상조각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구상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형상적 요소가 접목된 새로운 구상조각을 선보였고, 최초로 조각과 설치미술을 결합한..

의미작용 달리하는 병치의 미학, 황기훈 ‘마크 어브 플라워’ 전

황기훈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항상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 키득거렸던 적도 있었다. 황 작가의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그와 아는 사이여서 일게다. 얘기도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으니 작품이 더 잘 보이고, 의미도 색다르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인다. 황 작가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봐오면서 작가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새삼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해 나가고,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콜렉터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건 대중과의 ‘교류’다. 대중과의 교류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만나 대화하는 일부터 하면 된다. 전시 기획자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언어화 과정보..

이동환 ‘고래 뱃속’전 - 인간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육은 대부분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유의 시발점에는 근본이 있고, 그 결과의 산물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미(美)에 관해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영육은 조금 더 오묘하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 투영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조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부정해 버리거나 내적인 염원을 심화해 이데아의 세계까지 담아낸다. 이동환 작가가 형상화한 '고래 뱃속'도 예술가만의 남다른 사유에서 시작됐다. 족히 육칠십 년은 산다는 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어린 개체로 추정되는 젊은 고래가 배에 가스가 가득 차 죽어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웬만큼 먹어도 가스가 차지 않는다. 사냥 자체가 어려워 배불리 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냥에 성공해도 죽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다.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해양생물학자..

미술가들이 만든 '장난감이랑 놀자'전 - 떠올리게 하는 장난감

장난감을 떠올리면 제자리에 서서 왈왈 짖는 강아지나 자동차로 변신하는 로봇, 요란한 소리를 내는 플라스틱 실로폰이나 고무줄로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게 생각난다. 모두 공장에서 생산한 장난감이다. 블록, 소꿉놀이 같은 놀이용품도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장난감이었다. 갤러리담에서 본 장난감은 달랐다. 손에 쥐고 놀기보다 보고 즐기며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른들의 장난감이었다. 도자기처럼 깨질 위험도 있고, 괴기스러운 캐릭터도 있고, 벽에 거는 액자 형식도 있어서 아이들 앞에 놓으면 울어버릴지 모른다. 담갤러리 윈도에는 이수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도자기로 만든 중세 시대 검투사 인형이다. 이 인형들은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투사와 해골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황기훈 작가는 여러 가지..

이동환 '칼로 새긴 장준하'전 - 목판화의 힘 느끼게 하는 흑백의 강렬함

사자의 무덤을 찾고, 역사와 마주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나 애도의 의미보다는 반성적 자기 성찰을 위한 행위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고, 내면적 자각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동환 화가가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134장의 판화로 새긴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쁜 현실에 쫓기면서도 3년 동안 장 선생의 삶에 집중했던 동기는 숨김없는 고백과 반성의 시간을 통해 생활의 중심을 잡고,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데 작은 밀알이라도 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미술관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게 아카데미적이거나 요란스럽게 포장된 전시는 부담스러웠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받았다. 이동화 화가의 목판화전은 달랐..

한성필 '지극의 상속'전 - 시간 층위서 발견한 인류 책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거대한 빙하는 수정처럼 희고 푸른 빛을 발산하고, 하얀 설산은 신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영험한 자태로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신묘불측이다.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처럼 청월한 빛깔에 눈부터 휘둥그레진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흙마저도 지극에서는 예사롭지 않고, 하얀 얼음 위의 연못은 말 그대로 보석처럼 빛난다.하지만 이곳에도 어김없이 인간은 침범했다. 흉물스럽게 녹슨 배와 탄광,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수용소, 선혈이 낭자했던 전쟁의 흔적들이 대자연에 매몰된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담하게 지어진 가옥과 도로, 자동차는 대자연 앞에선 미물이다. 남극과 북극은 현대인에게 오지로 읽힌다. 영겁의 세월에 걸쳐 생성된 거대한 빙하와 극한의 추위, 희귀 동물의 서식지 정도로만 우리에게 ..

이도연 '머무르다'전 - 자연의 현현이 부른 환희와 감동

투명하고 엷은 산풍(山風)이 숲과 들을 스치며 소리를 낸다. 풀과 나무들이 푸른 수면처럼 드넓게 공기와 부딪치며 쏴르르르 몸을 떤다. 그 소리에 탐욕과 욕망의 불꽃은 잦아들고, 순백의 자아와 마주 선다. 지상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 아름다운 정령과의 조우의 시간을 마련한다. 반복되지 않는 패턴이 펼쳐진다.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묘사에 감탄이 쏟아진다. 하얀 토끼털과 같이 부드럽게, 초록 비단처럼 '자크르'하게 눈앞에서 흔들거린다. 사실 그대로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심상을 반영해 화면을 채우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이 모두 그렇다. 진심을 보지 못하면 인간관계도 어긋나듯이 그림도 겉모양만 보면 그림을 제대로 좋아하기 힘들다. 이도연 작가의 작업은 한마디로 공양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붓을 들지..

매기 테일러(Maggie taylor) - 현실 뛰어 넘는 초현실 세계

사람보다 30배나 커 보이는 물고기. 벌거벗은 남자가 그 물고기 등에 올라가 그물을 던진다. 울창한 숲 이층집 창문에는 거인 팔뚝이 나와 있고, 굴뚝으로는 도마뱀이 올라간다. 모자에는 갖가지 동물과 사람, 사물이 뒤엉켜 있다.수련이 둥둥 뜬 연못에는 얼룩말이 묘한 표정으로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흡입한다. 상상에서나 가능한 이미지다. 초현실주의 예술은 이성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현실을 배제하기 때문에 사실보다는 추상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예술은 대부분 극히 사실적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사물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지만 이를 찢어내고, 조합하고, 이어 붙여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작해 낸다. 예를 들면 우산을 들고 하늘을 나는 사람, 바닷..

유중희 '욕망의 순환'전 - 소유 그 치명적인 욕망

충돌하고 부딪친다. 상처 투성이다. 잔상이 오랫동안 아물지 않고 화끈거릴 것 같다. 사실적이고 다채로운 그림이 줄 수 없는 감상, 모노톤 이미지가 뿜어내는 건조하고 황량한 느낌 때문이다. 유중희 작가의 작품은 충동을 부추기고, 자극에 좌우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닮았다. 삶에 대한 열렬한 열정과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저항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욕망의 일상,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하면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고개를 떨구지만 그것마저도 쉽게 방기해 버리도록 만드는 자기애다. 유 작가의 작품은 마음을 반성하고 살핀다. 성기고 거친 이미지들이 억세게 되살아나 찬찬하고 야무지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길 권한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도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그것이 '오직' 당연한 ..

송미라 '멈춰 선 풍경들'전 - 노상 달라지는 공간의 찰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형태, 모호한 채도, 개체들의 유기적인 구성이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이보다 한층 더 호기심을 일게 만든 건 송미라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다. 길쭉하고, 뾰족하고, 네모반듯하고, 울퉁불퉁한 도형 등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변이였다. 모양과 성질이 다른 개체가 내부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는 모습. 송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혹은 비틀어서 우리 사회를 은유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순간,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시간의 조각을 붙였다. 공기와 습기부터 개체와 개체가 부딪치면서 생성되는 갖가지 감정과 영향까지, 매일 다른 것들로 빈 공간은 채워진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정한 공간에 존재한다. 이 공간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

김길후 '최후의 수장고 프로젝트'전 - 구도의 붓질

검다. 어둡고 짙다. 암울한 기운이 뻗쳤다. 불분명한 정체가 두꺼운 두려움을 끼얹어 놓았다. 시커멓게 말라붙고, 얼룩진 얼굴. 그 얼굴과 마주하자 자꾸 마음이 움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밝은 색채가 덩이덩이 드러나 검은 얼굴에 광채가 돌았다. 완전한 혼돈이었다. 희미하게 뜨거나 감긴 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눈빛은 전시장 밖으로 여기저기 튀어 맺히며 그을음을 앉게 했다. 갑자기 두 눈에서 불이 번뜩번뜩 켜졌다. 원효가 마신 해골바가지의 물이 떠올랐다.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지는 법이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파계했다. 민중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승복을 벗었다. 어둠을 보지 말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다시 주위를 눈여겨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검지..

노사나 상묵 '천년의 소리, 목어'전 - 목어 울리는 산사

따닥따닥. 절도 있는 두들김소리가 사찰에 퍼진다. 소리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아프게 들린다. 왜일까. 사찰에 가면 유난히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이 많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의미다. 목어 소리는 다독다독 가슴을 치는 훈계다. 때마침 경내 연못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은빛 비늘을 번뜩이는 잉어가 머리를 내밀고, 시원한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대다 사라진다. 산사의 고요를 깨뜨린 주범은 목어(木魚)다. 목어는 잘 마른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낸 뒤 안료로 색을 입히면 완성된다. 목어는 사찰에서 얘기하는 사물(四物) 중 하나다. 사물은 범종, 금고, 은판, 목어를 말하며, 종각이나 누각에 걸어 놓고 예불할 때 사용된다. 목어의 종류는 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