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124

쿠사마 야요이 - 강박과 환영의 소산물

구조적인 모순을 깨뜨린다. 뜨겁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조롱하고, 강렬하고 위트 있는 소재로 인간사(事)를 비튼다. 반대로 강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 황홀경을 조장하고, 초점을 맞춘 렌즈의 강한 집광처럼 뇌리를 자극한다. 이토록 선명하게 시선을 끌고, 돌올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있을지 의문이다.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방울무늬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공황장애로 강박과 환영의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러한 정신의 고통을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실험과 파격으로 풀어내면서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작품은 선명한 채색과 수많은 물방울무늬 때문에 눈을 어질어질하게 하고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오래 보고 있으면 자신의 ..

한효석 '공중부양돼지'전 - 욕망하는 인간의 참혹한 실체

전위적이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시종일관 침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전시장을 질식시킨다. 약간의 쇼크가 가슴을 뒤흔든다. 껍질을 벗겨내고 잘라낸 고기 부위는 다름 아닌 인간의 얼굴. 한효석 작가도 그림을 그리면서 무척 피로하고 고달팠을 것 같다. 보는 것만으로 힘든 그림이다. 해부학 도감에서 보는 사실적인 그림 정도로 치부할 작품이 아니다. 우리도 알고 보면 피와 살과 근육으로 구성된 동물일 뿐. 겉으로만 보면 매일 식탁에 오르는 소, 돼지, 닭고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영혼 혹은 지성, 로고스가 있다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욕망에 사로 잡혀 짧은 삶을 동물처럼 보낸다. 전시장에 걸린 커다란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삶이다. 한 작가의 작품에는 얼굴 피부를 다 벗..

쇼나 조각 - 무료하고 평범한 삶에서 발견한 극적인 감동

이완된다. 정이 넘친다. 기쁨은 뭉클하고, 슬픔은 휘몰아친다. 희열은 살아 숨 쉰다. 저절로 몸이 반응한다. 쇼나 조각은 그야말로 삶 그대로 반영하는 예술이다. 인간이 보이고, 삶이 그려지고, 자연이 어우러진다. 미술은 관람객들에게 충격이나 긴장, 극도의 아름다움을 통해 감정을 뒤흔드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쇼나 조각’이 주는 감동은 전혀 다르다. 오로지 인간의 삶과 팽팽하게 얽혀있다. 인간의 애환과 환희 같은 것이 한데 뒤섞여 훈훈하게 녹아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분간할 수 없는 파장이 마음속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삶은 지독하게 무료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극적이고 감격적인 정서가 꿈틀거리는 ‘역설’이지 않은가. 쇼나 조각은 스케치나 밑그림 없이 정과 망치 같은 전통적인 ..

아오노 후미아키 '환생, 쓰나미의 기억'전 - 예술의 치유

충격이었다. 평범하게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오노 후미아키 작가는 폐허의 현장에서 발견한 흔적들을 복원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흡사 의식과 같은 미술행위였다. 폐허가 된 사물은 새로운 사물과 만나 파괴되기 전의 의미로 되살아나고, 예술 작품으로도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아오노 후미아키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소에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 복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Tsunami)의 피해가 가장 컸던 센다이에서 수집해 제작한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휩쓸고 간 고통의 흔적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형태의 복원뿐 아니라 의미의 복원을 추구한다. 전시 제목 ‘환생’은 살(flesh)이나 고기(meat)..

송동(宋冬) 'Doomsday Vault project'전 - 최후의 심판일 저장소

Doomsday. ‘최후의 심판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운명의 날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에서 신은 그날이 되면 모든 인간을 심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 최후의 심판의 의미는 좀 다르다. 마치 단두대의 시퍼런 날에 목을 내밀고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커다란 날벼락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의 초상이다. 지금도 징후는 보인다. 기아와 전쟁, 각종 이상기후가 세계를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송동은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류의 저장소를 만들었다. 여러 개의 나무 침대가 빌딩처럼 쌓여 있다. 노아의 방주를 떠오르게 만드는 층층의 대피소. 이곳은 비장미가 흘렀다. 겉으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격렬하게 ..

박정희 - 삶을 가르치는 수채화

소박하고 청초한 빛의 인물 수채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넘치지 않는 정물의 색상, 세월의 깊이를 담아낸 채도, 구상에 함몰되지 않는 명도. 박정희 화가의 그림은 순백의 이미지를 넘어선 ‘그윽한 아름다움’에 따습다. 박 화가의 그림은 미묘하게 마음을 매료시킨다. 고상한 기교나 고결한 감성이 아니라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는 서정이 ‘감정선’에서 일렁인다. 누군가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마음 따뜻한 할머니 화가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그림은 머릿속에 곧장 각인됐고, 가슴에 들어앉았다. 왜일까? 화려하게 꾸미거나 눈부시게 과장하지 않은 그림, 일상의 정경을 그대로 형상화한 이야기, 감정을 함부로 표현해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

박노해 '다른 길'전 - 아시아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씨앗

여느 사진전과 다르게 텍스트가 많았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줄 알기 때문이겠다. 사진 설명은 모두 시처럼 읽혔다. 이 준 공명이었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단호한 문구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장은 끝났다, 석유는 끝났다, 미국은 끝났다.’ 이 문구는 그다음이 무엇이건 간에, 박 시인의 사상적 뿌리를 총괄해 보여줬다. 느닷없이 감동이 밀려왔다. 어떻게 보면 글이나 사진은 넓은 의미에서 창작자의 자화상이다. 이곳에서 읽고 보는 것은 모두 박 시인의 흔적이자 발자취라 할 수 있다. 시와 사진을 창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시인으로, 사진가로 사는 일은 더욱 어렵다.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을 일상으로 치환하내지 못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답다? 그가 아시아를 ..

이동연 '미인도'전, 메울 수 없는 결핍의 구멍을 인정하자

우아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바깥 세계와 소통한다. 이 욕구의 뿌리에는 ‘인간다움’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에 대한 근원적 고독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사회로 치환해보면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치유하면서 사는 것. 그 테두리의 넓이에 따라 인간다움은 깊어지고, 그 테두리 안에서 인간은 동질감을 느끼고 유연해진다. 이동연 작가의 작품은 선이 힘차고 양감이 풍부하다.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워 기품이 넘친다. 그 기품을 더욱 살려주는 건 관람객과 주고받는 방식의 가벼움이다. ‘소통’이라는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인간의 욕구를 경쾌하게 풀어낸다. 그의 작품은 색채도 유려하다.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음영, 옷의 겹침과 피부..

차기율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전 - 각자 짊어진 순환의 몫

바람이 분다.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긴다. 홀로 맞이하는 낯선 공간에서의 사유. ‘나와 너, 인간’이라는 껍질을 놓아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니 바람이 느껴지고, 숫제 마음이 편안해진다. 처음에는 사방에 둘러싸인 돌과 나무에 짓눌렸다. 새의 몸통을 뚫고 나온 나무줄기들은 흉측했고, 화석화된 생명의 잔재들은 지독한 사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모두 그것들을 ‘나’와 분리시켜 벌어진 일. ‘나’를 자연의 일부로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어딘가에 있었을 돌과 나무들이 전시장에 있었다. 작가의 발품과 시선이 머문 오브제(자연물)들이다. 이 오브제들을 보면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얼마나 하찮은지 느끼게 된다. 인..

이상선 '추상적인 인상'전 - 비구상을 구상하다

툭툭 가슴에 걸린다. 앙상한 나무와 거친 돌멩이, 눈 덮인 대지와 길게 늘어진 전선, 그리고 배경 위를 날아다니는 새하얀 꽃잎. 여름 내내 가득했던 따사로운 햇빛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제는 모두 그리움과 고뇌로 번진 과거의 이야기일 뿐.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나선 한 인간의 고행이 느껴진다. 반면 채도 높은 색면은 강렬하게 부딪친다. 풍성한 생명의 율동처럼 오롯이 홀로 빛을 발산한다. 하지만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면 파라솔 같기도 하고, 도시의 단면 같기도 하다. 그림자는 모두 감추고 오직 색과 단순한 면으로 만개한 이미지들. 거기에서도 고행의 숨결은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상선 작가의 작품은 감동적이다. 처연하고 쓸쓸했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발화된 선경, 아름다..

사윤택 '순간, 틈에 대한 언술-메멘토 모멘트'전 - 순간 탐닉

회화나 사진 예술은 정지된 한 순간을 표현한다. 그중에는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도 있지만 깜빡하고 지나가면 보지 못하는 찰나의 장면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회화, 후자의 경우는 사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사윤택 작가는 찰나의 장면을 회화로 그렸다. 그는 코트를 벗어나 튕겨 나가는 테니스공, 이 테니스공을 놓쳐 헛손질하고 마는 선수를 포착했고, 바닥에 떨어지는 공을 받아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비치발리볼 선수를 잡아냈다. 한밤중 책상에 앉아 뭔가에 몰두하다 문득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공원의 사람들, 술에 취해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는 자동차도 그 순간을 붙잡았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슬로 모션 같은 이미지도 형상화했다. 한 몸에 달려 있는 여러 개의 ..

정용진 'Kaboom!!!'전 - 첫 원자폭탄이 터지는 날 어떤 사람들은 좋아했다

전시장에 구슬픈 음악이 흘렀다. 가슴이 찡했다. 생명의 광채를 잃고 깊은 슬픔을 뿜어내는 음악. 거대한 하늘을 덮은 버섯구름처럼 어마어마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규칙하고 우울한 이 음악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전시 관계자는 “이 음악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정용진 작가가 직접 선곡한 노래”라고 귀띔했다. 1945년 7월 16일 5시 20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이 터졌다. 폭탄이 터지자 도시는 고막을 찌르는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타 죽었다. 또 수만 명의 히바쿠샤(피폭자)를 만들었다. 원자폭탄은 ‘인간이 만든 무기에 스스로 자멸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그 순간 미국이 전쟁에서 이겼..

니콜라스 펠처(Nicolas Pelzer) '인 리얼 월드'전 - 미래 정보화사회의 비극 줄이는 방법

2012년 DMZ에서 작품 ‘디스로케이티드 시네마(Dislocated Cinema)’를 선보였던 작가 니콜라스 펠처(Nicolas Pelzer). 그는 그곳에 바깥 DMZ를 풍경을 영화관처럼 바라볼 수 있는 하얀색 유리창을 설치해놓고 분단의 비극을 얘기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거름종이를 갖다 대면서 사상이나 이념 이전에 인간을, 그리고 실제 현실을 바라봐야 하며,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는 이뤄진다고 역설했다. 니콜라스 펠처는 현실과 가상현실을 오가는 우리의 삶을 투영하면서 미래 정보화 사회의 비극을 줄여보자는 메시지를 띄우는 새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장 벽면에 이쪽과 저쪽을 경계 짓는 기다란 커튼을 설치했고, 유리로 만들어진 투명한 테이블 위에 현실 세계에 대..

김민선 '익숙한 사물'전 - 낯설음의 몰입

커다란 단추. 매일 손으로 만지며 옷을 여미지만 커다란 단추 앞에 서자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다. 선풍기 날개에는 수백 개의 방울이 매달려 있다. 매일 똑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이처럼 가깝게, 자세하게 본 적은 처음이다. 역시 낯설다. 전시장 구석에는 거대한 플라스틱 체인이 매달려 있다. 또 한쪽 벽면에는 거대한 크기의 서랍 손잡이가 설치돼 있다. 그냥 지나치려 해도 자꾸 눈길이 간다. 어색하고 생소하다. 이러한 낯섦은 소재의 변환으로 극대화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촉감과 질감으로 더욱 낯설어진다. 낯섦은 상상이 입혀지고, 충돌하면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또 이질적이거나 무관심한 개인과 사회의 메타포로 작동된다. 우리 사회에는 힘겹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문형태 '캔디'전 - 현실의 고통과 비현실의 희망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커다란 욕조에 들어가 있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꽐꽐 쏟아져 나와 이 남자의 얼굴을 없앤다. 욕조 바닥에는 한 마리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세웠다. 다른 그림에서 남자는 발가벗었다. 얼굴은 술에 취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고, 손에는 술병을 쥐고 있다. 물론 이 그림에서도 남자는 욕조 안에 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꽐꽐 쏟아져 나왔다. 이 남자는 또 다른 그림에 등장한다. 한 손에 담배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욕조에 술을 채운다. 이 남자는 다른 그림에서 샤워를 했다. 벌거벗은 남자의 몸은 기형에 가깝다. 어깨는 넓고 등은 휘었다. 다리는 짧고 왜소하다. 목은 굵고 길다. 다른 그림에서는 수영장처럼 크기 보이는 욕조도 보인다. 문형태 작가의 작품은 고립된 상황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우성 '돌아가다 들어가다 내려오다 잡아먹다'전 - 위트와 유머로 치유하는 청춘

청춘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방황과 좌절로 힘들어하는 젊은이가 보인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현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하지만 이우성 작가는 청춘을 위로하지는 않는다. 괜한 위로는 마음만 약하게 만들고, 불평과 불만만 생산할 뿐. 대신 그는 현실을 위트와 유머로 승화시킨다. 마치 ‘너 혼자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이 말은 곧 희망으로 끊임없이 전이된다. 지독한 현실을 웃음으로 변용할 수 있다면 넘어지고, 다치고, 깨져도 괜찮다고 일러준다.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한편으로는 이 작가도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우성 작가의 작품들은 재밌다. 힘겨운 청춘마저 인생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달관한 듯 웃음을 질질 짜내며..

이주리 'Lucid Dream'전 - 자본주의 괴물과의 혈전

놀랍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충격이다. 인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은 충돌 속에서 명확하게 다듬어졌다. 이주리 작가의 작품에서도 그것이 보인다. 사상과 현실, 작업과 결과물이 수없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정제돼 가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징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괴물들을 까발린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핑크빛이 아니다. 금융위기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은 폭발했고, 온갖 이득을 노리는 침략전쟁과 정치적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투쟁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 이주리 작가의 작품은 유의미하다. 무섭고 험악한 이미지 때문에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은 현실의 반영에서 조명돼야 적절하다고 본다. 이주리 작가의 작품을 보면 우리 사..

우상린 '고요한 찰나'전 - 성찰이 주는 오늘을 사는 힘

전적으로 시인한다. 오해를 무릅쓰고 얘기하지만 우상린 작가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눈을 감은 사람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인물 사진들 등을 보면서 왜 그런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진을 조망해보니 느낌이 달라졌다.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혼자 혹은 여럿이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모두들 눈이 감긴 채 찍힌 사진 한두 장은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을 보게 한다. 우리는 항상 눈을 뜬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눈을 깜빡이고 있다. 우상린 작가는 그것을 의식하게 만들면서, 행여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던 자신을 살펴보는 ‘성실한 성찰’을 권한다. 우상린 작가는 사진 속 인물의 ..

박재연 'inout-낯선 유기적 덩어리'전 -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요동침

혈관처럼 덩어리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철심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쳤다. 공간과 공간 사이가 만들어낸 조형미는 시간과 공간의 이음새를 파괴하는 미지의 힘으로 가득했다. 인간의 심장을 닮은 강렬한 이미지다. 덩어리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너른 상상의 세계를 보게 만들었다. 반골, 파괴, 변주, 혁명, 폭력, 생명, 괴물 등 여러 단어들도 떠오르게 했다. 특히 덩어리에서는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엿보여 감정이 북받쳐 왔다. 나는 덩어리 앞에서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작품 ‘절규’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 같았다. 박재연 작가는 이야기와 난제를 던지는 솜씨가 탁월한 작가 같다. 벌써부터 그의 차기작이 무척 궁금해진다. 고매하고 청아한 조형미만을 추구하는 조각은..

김정은 ‘리플렉션’전 - 웃음 유발하는 해학미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음식, 가전제품, 영생의 약속, 주식……. 앞에 열거한 단어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가끔씩 이런 단어들이 외계의 언어처럼 낯설 때가 있다. 피로가 육체의 뿌리 끝까지 쌓이고 정신이 오락가락 혼란해질 때다. 특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싶어 머리가 아파온다. 김정은 작가는 지독하게 괴롭고 낯섦이 밀려올 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시절을 상상하면서 기분을 유쾌하게 전환했다. 또 심각한 감정을 “희화화시켜 낄낄”거리며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변용했고, 그런 마음의 작용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땡땡이 내복을 입은 남자가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팔이 여섯 개인 여자는 내장을 다 드러내 놓고 웃는다. 사람의..

이동환 ‘황홀과 절망’전 - 불 지르고 싶은 욕망

정공법이다. 이동환 작가는 돌려 얘기하는 법이 별로 없다. 풍부한 상상력도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화법은 해학적이다. 폭력과 충동, 물질문명이 낳은 온갖 병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냉철하지만 표현은 은유적하다. 이미지는 강렬해도 느낌은 부드럽다. 이동환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직접적이고 차가운 비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충격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고두고 가슴에 남기고, 회자되는 것은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하면서 할 얘기를 다 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예로 들어 얘기하면 듣는 사람도 편하게 받아들이고 이해도 빠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작가의 작품은 쉽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도 바로 그것이었다. ..

이해경 '초록서정'전 - 세필의 정교함에 말을 잃다

온통 초록빛이다. 풀과 나무들이 나비와 메뚜기, 화려한 꽃들과 어울려 신천지를 연출한다. 자연으로 시간의 영속성과 삶의 가치를 조명해 내는 것 같은 그림들.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한국화가 이해경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미래와 영원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닌지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아름답게 자연을 가꾸고, 자연과 함께 동화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와 안식을 지켜주는 약속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전시장은 아름다웠다. 이해경 작가의 초록 자연에 빠져 한가롭게 걸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총천연색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될 일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녹..

한국 미술운동의 기폭제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중미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추상과 관념에 머무르던 미술이 본격적으로 현실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술가들은 군홧발과 방패, 총과 대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유가족들이 오열하며 혼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각했다. 총검과 탱크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중을 핍박하는 저들에 맞서 자주, 민주, 통일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이야기를 형상화했다. 한국 미술은 일제 강점기에 서구미술을 수용하면서 아카데믹한 화풍이 주류를 이뤘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에는 앵포르멜(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이 한국 미술의 주요 맥락을 형성하면서 한국적 특색이 반영된 추상작품과 한국적 정체성을 살린 인물화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과 한국문화의 정체..

김창환 - 하늘을 유영하는 상어

복잡한 도시. 폐 한쪽을 들어낸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지만 어떠한 감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연인들의 고함소리,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배기통 소음,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끙끙거리는 아주머니들의 한숨만이 이곳이 삭막한 도시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툭.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로 숨 가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부딪친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무섭다. 서울은 사람이 너무도 많고 날카롭다. ‘우리에게 날개가 있다면 저 넓은 하늘로 훨훨 날아갈 텐데.’ ‘이렇게 부딪쳐 감정을 소비하는 일도 없을 텐데.’ 애달픈 심정이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뿔싸. 상어들이 하늘에서 헤엄치고 있다. 가끔 하늘을 볼 때가 있다. 일상에 쫓기거나 자질구..

이소영, 알렉산더 우가이 2인전 - 고려인 삶에서 우리 미래를 보다

가끔 우리 사회가 ‘이미 정해진 미래’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갉아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투쟁하거나 자기 것을 나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게 고립무원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별수 없다고 말하기에는 가슴 한쪽 구석이 너무도 찌릿하다. 만약 우리 사회가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움직인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도래하게 될까. 전시장에서 만난 묘비를 보면서 힘을 내본다. 기대나 헛된 희망은 그 형체만큼이나 커다란 번민을 만들 뿐이다. 운명은 자신의 내부에 있지 밖에 있지 않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

김잔디 '소리 없는 섬'전 - 절대 고요에서 보는 혼란

눈에 혼란을 준다. 시각적으로 자극한다. (위 사진은 조명이 밝은 편이다. 전시장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어두웠다.) 액자는 물에 뜬 것처럼 전시장에서 부유하고, 그림은 3D 영상처럼 허공에 떠 흔들린다. 살아 있는 생명처럼 작품들이 숨을 쉬는 것 같다. 전시장이 어두운 데다 할로겐 조명으로 그림을 부각한 이유가 크다. 그림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김잔디 작가의 작품과 잘 어울리는 디스플레이다. 이것은 ‘사루비아다방’이라는 공간이 가진 강점이기도 하다. 지하 창고 같은 분위기,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 몽환적인 느낌이랄까. 김잔디 작가의 작품은 ‘집’이다. 덤불에 뒤덮여 황량하게만 보였던 공간들이 부유한다. 김 작가의 집 작업은 공장건물이나 재개발..

문재성 - 삶에 움찔할 땐 반딧불이를 만나보자

푸른빛 야경. 환상적이다. 혼란 속에서 질서가 더욱 의미가 있듯이 평범해 보이는 푸른빛 야경을 아름다운 자연으로 바꿔주는 반딧불이는 그래서 더욱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단한 삶에 불면까지 찾아오는 밤이면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세지 말고 문재성 작가의 그림을 떠올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보길 바란다. 문 작가의 반딧불이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수면제가 돼줄 것이다. 반딧불이는 문재성 작가가 ‘빛에 대한 장고 끝에 6년 동안 연작으로 작업한 소재’다. 반딧불이는 깨끗한 곳에서 사는 생명. 그동안 문 작가가 망가져가는 자연환경에서 건져 올린 반딧불이는 구원과 희망, 성찰과 위로의 메시아로 치환된다. 특히 도시 문명에 지친 현대인들,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 먹고사는 문제에 절박한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은 노스탤..

이상권 '사람의 풍경'전 - 욕망덩어리와 불만투성이

세상엔 모든 것이 득실거린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 크게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래서 일상은 고단하고 논쟁은 그치지 않는다. 서로 헐뜯고 미워해도 무방한 세상이 돼버렸다. 그냥 모른 척하고 상대 안 하면 그만이려니 해도, 참으로 답답하고 울적한 세상이다. 도시의 풍경도 쓸쓸하고 차갑기만 하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는지 바쁘게 움직이고, 버스와 지하철은 피로하게 굴러간다. 또 주택가 골목에는 적막이 내려앉았고, 학원 가기 싫은 아이들만이 단조로운 일상을 채우고 있다. 조금만 더 세상을 깊이 바라보면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기차역 주변을 기웃거리는 노숙자가, 생계를 잇기 위해 아파도 쉬지 못하고 일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곱은 손을 입김으..

임선희 '장밋빛 인생'전 - 삶의 행복은 가상에서만 실현 가능한가

상처가 보인다. 파도치는 바닷가를 거닐며 쓰디쓴 인생을 핥는 한 여자의 내면에 감춰진 고뇌가 보인다. 겉으로만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내면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여자는 고민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당당하게 자신을 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누가 봐도 성공한 ‘장밋빛 인생’을 만들 수 있는지. 현실은 만만치 않다. 여자는 마음을 내놓고 쉴 수 없는 현실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시 허구로 진실을 가공한다. 가상의 드라마, 진부한 스토리로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만들며 위로한다. 임선희 작가는 거기에서 일종의 치유와 해소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행복, 장밋빛 인생을.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어두운 밤, 오래되고 척박한 동네의 골목길을 ..

벤 리버스(Ben Rivers) '슬로우 액션'전- 폐허에서 건져 올린 유토피아

폐허가 된 공간을 따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장소들이지만 머지않아 닥칠 우리의 미래 모습인 것 같아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연은 유유히 흘러가며 세월의 향기를 품고 있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하나 같이 회색빛이다. 먼바다와 푸른 하늘, 끝없이 우거진 숲을 보면서 저절로 ‘서늘한’ 카리스마에 빨려 들어간다. 파괴된 인공이 자연과 엉켜있는 공간을 보는 기분은 ‘미로’다. 우리 삶의 터전이 저렇게 처참하게 부서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안도감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변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 책임이 있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그려나가야 할 사명감도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재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대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잘 가꾸는 것은 어쩌면 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