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공법이다. 이동환 작가는 돌려 얘기하는 법이 별로 없다. 풍부한 상상력도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화법은 해학적이다. 폭력과 충동, 물질문명이 낳은 온갖 병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냉철하지만 표현은 은유적하다. 이미지는 강렬해도 느낌은 부드럽다. 이동환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직접적이고 차가운 비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충격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고두고 가슴에 남기고, 회자되는 것은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하면서 할 얘기를 다 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예로 들어 얘기하면 듣는 사람도 편하게 받아들이고 이해도 빠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작가의 작품은 쉽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도 바로 그것이었다. 씁쓸함을 웃음으로 변용해내는 미학.
이동환 작가는 진지하게 주제의식을 쫓아가는 동안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 사상과 현상을 주저 없이, 우열 없이 담아내면서 끝없이 집중한다. 배시시 웃고 있는 양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데 실소가 터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작가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얘기를 빠뜨리지 않고 전한다.
과거 예술가들은 현실을 비춰 미래를 보여주곤 했다. 오늘날 현실을 되돌아보면서 미래 사회의 참혹함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이동환 작가도 현대 사회의 폭력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절망을 의제로 끄집어냈다. 그런데 전시 제목은 황홀과 절망이다. 그냥 절망이 아니라 황홀이 붙었다.
황홀과 절망은 완전하게 뜻이 다른 단어다. 대립적인 이 단어를 통해 이 작가가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외피와 내피다. 절망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황홀, 절망에 빠진 민중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황홀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모난 사람들이다. 이러한 작가의 일침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최신작 ‘아무렇지 않게’다. 사람들이 끝 간 데 없는 벼랑에 서있다. 얼굴은 모두 슬프고 음울하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도살장의 가축들 같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표현해봤다. 사람들이 도달할 곳 없는 땅 끝에 서 있다. 그곳에서 절망과 슬픔과 허무와 비관에 빠진 사람들을 표현해봤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양할 것 같다.”
과거에 비해 이동환 작가의 작품이 더욱 강렬해졌다. 색의 대비도 확연해졌고 소재도 훨씬 다양해졌다. 상황 또한 더욱 진지하고 서사적으로 변했고, 붉은색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작품도 있다. 젖이 여러 개 달린 여자의 가슴을 움켜쥔 양, 만국기가 날리는 구덩이 같은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를 업고 있는 한 남자가 커다란 별이 추락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하늘은 갈라지고 땅은 뒤흔들리고 파도는 거세게 몰아친다. 아마도 그림 속에 아이를 업고 있는 이 남자는 이동환 작가 본인인 것 같았고, 노란별은 왠지 추락하고 있는 민중들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가는 별을 ‘희망’이라고 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 이 작가가 보는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인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하얀 곰인형의 배에 불을 붙였다. 그 아래로는 화염병을 들고 있는 벌거벗은 남자가 보이고, 불이 점점 커지는 곰인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도 있다. 또 커다란 장지가 모두 불바다다. 산에도, 들에도, 집에도 모두 불이 붙었다. 한쪽 구석에는 어린아이가 울고 있고, 반대쪽에는 벌거벗은 어른이 헐레벌떡 도망간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아동유괴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은 그림이다.
“작업실에 딸아이 곰인형이 있다. 항상 편안하게 앉아 웃고 있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가식적이었다. 그래서 곰인형에 불을 질렀다. 삼계화택이라는 작품도 불 지르고 싶은 욕망을 표현했다. 뉴스를 보면서 심리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참혹하고 우울한가. 그런 사회를 보면서 불 지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동환 작가의 작품은 음메~ 하고 우는 양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양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악해 보이는 인간형이다. 사실은 영악하다기보다는 양의 탈을 쓰고 사악한 악행을 저지르는 늑대다. 이 작가는 이 음흉한 양을 통해 우리 사회를 비유했다. 자본주의가 생산해 내는 크고 작은 폭력을 관조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는데, 아마도 그 음흉한 마수걸이에 기자도 걸려든 듯싶다.
그의 작품에서는 거대한 자본의 힘에 함몰돼 가는 작가 자신도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물이라는 이미지로 변용해내며 힘을 낸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정체성만은 잃어가지 않겠다고, 물질지상에는 빠지지 않겠다고, 온갖 무가치하고 혼란스러운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작품에 물을 많이 넣었다. 물은 ‘참여’를 뜻한다. 밖에서 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발을 담그는 의미다. 유독 물이 그림에 많이 들어가 있는 이유다.” 이러한 생각은 삶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아주 화가로서 잘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지금 정도가 딱 좋은 것 같다.”
화가 개인의 문제는 곧 사회로 확장된다. 권력과 자본의 위협은 몸부림으로, 인간과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발언, 반항과 전복으로 전가된다. 그가 첫 개인전 ‘길을 잃다’전에서 IMF 직후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뒤틀린 현실을 직시하고 바꿔보자는 일종의 투쟁이었다. 이후 그는 2007년 ‘병적인 웃음’전에서 양을 등장시켰다. 이 양은 매우 부정적이다. 양은 순하고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작가는 그 너머에 모순과 허위와 위선이 숨어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여전히 양을 세상에 내놓았다. 남성적이고 웃음소리가 멋진 그의 성품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양은 몰상식이 난무하는 시대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선 이미지를 내포한다. 왜냐면 권력은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선정적인 쾌락과 폭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락과 폭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양의 탈을 벗기는 행위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지금 얼마나 처참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리고, 알려내는 것이.
양이 그물에 걸려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다. 또 전시장을 찾은 나를 보고 역시 미소를 짓고 있다. 양이 보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양한 관계에 얽혀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학습된 위선과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기주장조차 하지 못한 채 수긍하고 받아들이거나 외면하며 살고 있다. 이런 모습이 계속되는 한 양은 이동환 작가의 전시에 나올 것이다. 이제라도 자아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동환 작가의 작품에는 더덕더덕 묽은 물감이 흘러내린다. 붓으로 뿌린 것 같은 물방울도 많다. 이런 화면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아주 면밀하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작품과 다른 이 작가만의 표현법이다.

'이야기 > 미술과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재연 'inout-낯선 유기적 덩어리'전 -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요동침 (1) | 2022.10.07 |
|---|---|
| 김정은 ‘리플렉션’전 - 웃음 유발하는 해학미 (0) | 2022.10.06 |
| 이해경 '초록서정'전 - 세필의 정교함에 말을 잃다 (0) | 2022.10.06 |
| 한국 미술운동의 기폭제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0) | 2022.10.06 |
| 김창환 - 하늘을 유영하는 상어 (1) | 2022.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