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박정희 - 삶을 가르치는 수채화

이동권 2022. 10. 13. 21:42

고 박정희 할머니


소박하고 청초한 빛의 인물 수채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넘치지 않는 정물의 색상, 세월의 깊이를 담아낸 채도, 구상에 함몰되지 않는 명도. 박정희 화가의 그림은 순백의 이미지를 넘어선 ‘그윽한 아름다움’에 따습다. 

박 화가의 그림은 미묘하게 마음을 매료시킨다. 고상한 기교나 고결한 감성이 아니라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는 서정이 ‘감정선’에서 일렁인다. 누군가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마음 따뜻한 할머니 화가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그림은 머릿속에 곧장 각인됐고, 가슴에 들어앉았다. 왜일까? 화려하게 꾸미거나 눈부시게 과장하지 않은 그림, 일상의 정경을 그대로 형상화한 이야기, 감정을 함부로 표현해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참을성이 그림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화가는 시각장애인이라면 모르지 않을 송암 박두성 선생의 딸이다. 박두성 선생은 일제의 갖가지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글 점자를 연구했다. 그리고 끝내 1926년 표준한국점자의 기초가 된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했다. 훈맹정음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학자의 집념이자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상과의 통로를 열어주려는 선지자의 마음 씀씀이였다. 그러한 아버지의 삶을 박 화가는 그대로 따랐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또 지금껏 수많은 그림을 팔아왔지만 단 한 푼도 자신이 가져가지 않았다. 그림을 팔아 번 돈을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나눠줬다. 

박 화가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나가기 위해 ‘평안수채화의 집’을 운영하면서, 그림을 그려 시각장애인을 도왔다. 사실 박 화가는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데다 시각장애인들을 돕고 싶은 일념이 덧붙여져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삶은 경이롭다. 용기와 의지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숙명처럼 채워가는 그의 모습을 보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용기와 의지는 현실의 가치와 판단, 지성과 비평을 넘어가고자 하는 삶을 위해 매진하도록 만드는 매개다. 조금만 일에도 얼굴을 붉히거나 포기하는 젊은이들에게 시금석이 될 만한 삶이다. 

박 화가는 67세의 나이에 수채화가로 데뷔했다. 작품을 판 수익금을 점자도서관 건립과 시각장애인의 재활에 후원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2014년 12월 3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평안수채화의 집'에서 영면에 들었다. 시각장애인 2명에게 좌우 각막을 기증해 새 생명을 주고 떠났다.

 

고 박정희 할머니 영상자료

 

박정희할머니 꽃 수채화전 ⓒ화도진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