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이우성 '돌아가다 들어가다 내려오다 잡아먹다'전 - 위트와 유머로 치유하는 청춘

이동권 2022. 10. 7. 21:42

이우성, 돌아가다 들어가다 내려오다 잡아먹다, 2013 ⓒ이우성


청춘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방황과 좌절로 힘들어하는 젊은이가 보인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현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하지만 이우성 작가는 청춘을 위로하지는 않는다. 괜한 위로는 마음만 약하게 만들고, 불평과 불만만 생산할 뿐. 대신 그는 현실을 위트와 유머로 승화시킨다. 마치 ‘너 혼자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이 말은 곧 희망으로 끊임없이 전이된다. 지독한 현실을 웃음으로 변용할 수 있다면 넘어지고, 다치고, 깨져도 괜찮다고 일러준다.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한편으로는 이 작가도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우성 작가의 작품들은 재밌다. 힘겨운 청춘마저 인생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달관한 듯 웃음을 질질 짜내며 희화시켜버린다. 그림만 보면 이 작가는 정말 다이내믹하고 흥미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거기에서 비롯된 마음의 조각들은 그림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현실에서 풀지 못하면 예술로 승화시키면 된다. 그것 또한 예술가의 삶이 아니겠는가. 이 작가는 끊임없이 생산을 요구하는 현실과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잉여의 삶을 중의적으로 표현하면서 이 시대를 향해 말을 거는 듯싶다. 힘들 내시라고.

이 작가의 작품을 일일이 묘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저절로 웃음을 유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힌트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20대다. 작가의 얼굴이 연상되는 그림도 몇몇 있다. 옷차림은 다양하다. 캐주얼, 체육복, 점퍼, 정장 편안한 남성용 의류를 걸쳤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청춘, 그것도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책상이 있다. 이 책상은 이 작가의 일상 혹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쯤으로 해석된다. 책상 위에는 인간의 귀, 입, 눈알, 의인화된 돌이 놓여 있다. 또 책상 위에는 칼, 저금통, 접힌 종이, 촛불도 있고, 잘린 두 팔, 남자의 젖꼭지, 인간의 내장도 보인다. 이 내장은 전시에서 아주 여러 번 등장하는 데 결국엔 길고도 험한 숲길로 이어진다. 한 청춘이 배가 갈린 채 피를 흘리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르는 그림이다.

책상을 벗어나면 각목이 한 남자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머리 잘린 여러 초상, 문어, 엄지를 치켜든 손가락, 낙하산, 체조를 하는 남자들이 나타난다. 여기를 지나면 하의실종된 다리들,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청년들, 줄에 걸려 제자리에서 뜀을 뛰는 인형이 보인다.

언뜻 보면 공포스럽고 황망하기 그지없다. 다리에 힘이 쭉 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유머러스한 좀비 영화의 한 장면과 교차되면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삶, 잘려도 스스로 살아 있는 신체 일부는 이 시대 청춘들의 고통도 유추하게 하지만 반면 열정도 느끼게 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죽자고 달려드는 모습은 열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청춘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러한 생각은 무서움을 웃음으로 환기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떤 시련과 상처에서도 인생의 방향과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청춘들이여. ‘슬프고 고달파도 웃으면서 가자.’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청춘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보였다. ‘뭐 재밌는 일 없을까. 취직은 할 수 있을까. 세상 사는 일 참 허무하다. 관심 없는 정치 그마저도 개판이다, 피곤하다 쉬고 싶다. 젊다고 요구하는 게 왜 이렇게 많지. 떠나버릴까, 이 시대에 복수해버릴까’와 같은 그들의 생각들이 읽혔다. 하지만 이러한 허무와 분노는 놀고 마시고 반항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지루하고 말라비틀어진 세상과 마주해야만 극복이 가능한 일이다. 이 시대와 함께 뒤엉켜 고민하고 싸우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