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msday. ‘최후의 심판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운명의 날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에서 신은 그날이 되면 모든 인간을 심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 최후의 심판의 의미는 좀 다르다. 마치 단두대의 시퍼런 날에 목을 내밀고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커다란 날벼락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의 초상이다. 지금도 징후는 보인다. 기아와 전쟁, 각종 이상기후가 세계를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송동은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류의 저장소를 만들었다. 여러 개의 나무 침대가 빌딩처럼 쌓여 있다. 노아의 방주를 떠오르게 만드는 층층의 대피소. 이곳은 비장미가 흘렀다. 겉으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와 교감하지 못하고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인류의 자화상을 진중히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종말, 파국, 멸망, 묵시록에 대한 예술가의 상상력은 인류에게 있어 일종의 경고다. 전 지구적 기상이변과 경제 침몰, 파편화된 개인, 인간성의 파괴, 환경오염 등이 일반화되면서 점점 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의 근거 없는 믿음, 그러니까 기존의 생산력과 자본주의, 과학기술 등이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물신화하기 때문이다.
핵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산업문명은 붕괴한다. 지구가 황폐한 땅과 썩은 물로 뒤덮인 죽음의 별이 되는 일은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이기를 부리고, 생명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인류가 처한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작은 생채기 하나가 곪아 지구의 괴멸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 어떤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다.
세상은 시시각각 폭력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면서 대재앙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생명의 씨앗을 구하기 위해 나선 작가. 인류 공생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굳센 기운과 무한한 연민의 샘으로 무장한 투사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삶과 죽음의 의미조차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가벼움을 직시한다. 그의 작품, ‘최후의 심판일 저장소(Doomsday Valut)’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메시아적인 상징성을 지녔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학 두 마리가 보인다. 지층에서부터 쌓아 올린 거대한 설치물 위에 학 두 마리가 초연한 모습으로 놀고 있다. 그 주위는 수확을 마친 들판처럼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황량하다. 이 새는 아래와 위의 경계를 이어주고, 삶과 죽음의 연상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 새를 보고 있으면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껴진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 ‘최후의 심판 날 저장소’가 나온다. 소금을 뿌리면 요리조리 몸을 뒤틀어대며 해감을 뿜어내는 미꾸라지처럼 침대가 서로 얽혀 있다. 이곳에는 60개의 침대가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침대는 송동 작가가 어린 시절 실재로 사용했던 침대와 그 당시에 만들어졌던 침대를 모아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또 60개의 의미는 1갑자, 인간의 한평생을 암시한다.
이 침대 사이를 오가면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다. 이곳을 돌아다니는 자신이 작품이 일부가 되는 것 같은 상상부터 삶의 시작과 끝이 모두 침대에서 비롯됐다는 진실까지 알게 된다. 그리고 끔찍한 죽음, 암울한 미래 사회로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숭고한 성인의 적막한 음성을 듣게 한다.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고민하라.’
사방에는 최후의 심판을 암시하는 갖가지 영상이 상영됐다. 이를 테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북쪽 건물 상층부가 불과 연기로 뒤엉키다 무너지는 영상이다. 그리고 한 쪽 벽면에는 모택동, 카다피, 체 게바라, 앤디 워홀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의 초상이 흔들리며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흔들리며 사라지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일반인이 나타난다. 죽음에는 모두가 예외가 없다는 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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