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긴다. 홀로 맞이하는 낯선 공간에서의 사유. ‘나와 너, 인간’이라는 껍질을 놓아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니 바람이 느껴지고, 숫제 마음이 편안해진다. 처음에는 사방에 둘러싸인 돌과 나무에 짓눌렸다. 새의 몸통을 뚫고 나온 나무줄기들은 흉측했고, 화석화된 생명의 잔재들은 지독한 사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모두 그것들을 ‘나’와 분리시켜 벌어진 일. ‘나’를 자연의 일부로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어딘가에 있었을 돌과 나무들이 전시장에 있었다. 작가의 발품과 시선이 머문 오브제(자연물)들이다. 이 오브제들을 보면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얼마나 하찮은지 느끼게 된다. 인간은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순환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대를 거쳐 영원한 수수께끼로 사색해왔다. 어둠이 밀려들고, 고독이 찾아오는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아주 일부분, 우리에게 그토록 길었던 시간은 이 자연물들에게 그저 찰나다.
차기율 작가(인천대 교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찰했다. 그동안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순환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확장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우리에게 환기시켜왔다. 차 작가는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전에서도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본령을 찾았고,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관람객들에게 자각시켰다.
차기율 작가의 작품에는 자연의 질서가 숨 쉰다. 인간과 자연을 잇대어 풀어내는 미학은 매우 솔직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그로테스크한 면도 그 나름의 사실이고, 유난스럽지 않다. 차라리 고고하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독일의 현대미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펠트와 기름덩어리, 중견작가 임충섭의 화석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숨결과 정신,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술행위와 일치시키는 느낌이 유사하다.
차 작가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부유하는 영혼들을 찾아 나섰다. 또 자연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뭇가지, 돌멩이, 동물의 뼈 등은 태초의 원형이 땅 속의 흔적으로, 공기 중의 기억으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유전으로 흩어지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들을 수집하고 문명을 상징하는 책, 금속, 모니터, 스피커 같은 사물을 접합해 새로운 형상을 창조했다.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이어온 인간의 의지를 자연물과 융합해 자연의 영역도 아닌, 인간의 영역도 아닌 새로운 차원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매체의 형식 또한 계속해서 확장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설치를 비롯해 드로잉, 회화 등의 작품과 함께 최근에 제작한 점토 작업을 선보였다.
그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는 것은 ‘순환’이다. 그의 작품을 인간의 문제로 축소해보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죽음도 공기와 흙으로 이어지고, 자연과 유의미한 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잘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무수한 계단과 길로 연결돼 작용하고, 자연으로 귀속된다. 이 관계의 얽힘과 순환은 우리에게 ‘질서’의 중요함을 가르친다. 질서는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자연이 가진 그 자체의 본질을 말한다.
자연은 질서가 있다. 갖가지 이름을 가진 것들이 서로서로 바라보며 하나를 만들고, 순환의 몫을 다하기 위해 제 자리를 지킨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면밀히 떠올려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인간은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 많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고 갈취한다. 전쟁이 벌어지고, 환경이 파괴되는 일 모두 질서를 따르지 않아서다.
인간은 삶의 환상을 진정시키고, 영광만을 위해 사는 광기를 멈춰야 한다. 소소한 일상을 예로 들면 늙고 병들었을 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을 비통해하거나 희망조차 사나운 바람에 흔들리는 것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바라는 맘부터가 혼란, 시끄럽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에 자연목 뿌리로 만든 오브제가 있다. 이 뿌리는 인간이 만든 방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거기에 작은 스피커가 나무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정면에는 하늘과 바다의 모습이 텍스트 자막과 함께 영상으로 출력된다.
차기율 작가는 나무를 끓는 물에 삶고 일일이 껍질을 벗겨낸 후 토막을 재조립한다. 그리고 나무토막 사이사이에 마디처럼 돌멩이를 삽입하고, 줄기 표면에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문구를 붓글씨로 넣기도 한다. 많은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배어있는 존재의 흔적들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작업이다.
전시장 바닥에는 여름 별자리의 궤적이 드로잉으로 펼쳐진다. 별자리는 돌로 표시돼 우주 공간을 상징화하고, 그 위에 거대한 포도나무 구조물이 천정에 매달려 하늘을 떠도는 방주를 연상케 한다.
차 작가는 강화도 근교의 갯벌에서 채집한 게탑(게가 만든 탑)들도 전시장에 옮겨 놓았다. 그냥 옮겨 놓은 게 아니라 신석기인들의 방식대로 노천소성(흙으로 만들어 야외에서 굽는)의 과정을 거친 탑이다. 이 작품을 보면 장대한 스케일과 기괴한 모양에 입이 떡 벌어진다. 작가가 얘기하려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느낌이 온다.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것들이다. 이 탑들은 땅이 만들거나 기억하는 존재의 흔적들을 파헤치고 떼어낸 것으로, 자연이 뱉어낸 방주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는 생물학적 오브제들을 유리로 만든 유물 상자 속에 담아 기억과 흔적이 보존되는 고고학적 관점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인간의 얼굴을 닮은 돌들이 자신들의 초상화와 함께 전시 공간을 메우기도 하고 드로잉과 페인팅이 존재의 흔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혹자는 삶은 지혜나 양식 같은 것을 점점 채워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혹자는 삶은 욕망이나 방종 같은 것을 비워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기율 작가의 작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전체적으로 우주를 관망해보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이 순환되면서 거대한 정점 하나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우리 삶도 또한 뭔가에 얽매여 채우거나 비우는 것으로 확답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정도를 지켜가면 모두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된다.
아울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거기에 눈물겨운 사랑과 이웃의 힘겨움에 대한 연민이 필요하다. 저 돌과 나무가 제 몸을 깎이며 순환의 몫을 다하는 것처럼 그들은 우리가 아름답게 채워가야할 우리의 자화상이다.
차가율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크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바로 자연과의 합일이다. 순리를 따르고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삶. 윤리와 관습, 제도와 규율에서 벗어나 자연의 모습으로,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삶이다.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또 그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견뎌내야 하는지 시사점이 많은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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