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수확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화가가 있다. 해 질 무렵, 한 쌍의 농부가 들녘에서 삼종기도를 올리는 그림 <만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다. 밀레는 들에서 일하다가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 드렸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만종>을 그렸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주변에 갈퀴와 바구니, 자루, 손수레 같은 농기구들을 볼 수 있다. 그가 농촌에 애정이 없었다면 그려내기 힘든 사물이다. 또 광활하고 황량한 들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밀레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는 농촌을 사랑했고, 노동을 찬미했으며,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화가였다.
밀레는 농민이나 노동자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당시 ‘농민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농촌의 삶에 천착한 그림으로 프랑스 보수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혁명 이후 혼란스러워진 사회 분위기를 안정시켜야 할 때 불온한 그림을 그려 다시 혁명을 선동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밀레의 그림은 민중의 사랑을 받았고, 그림의 가치를 알아본 수집가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밀레의 많은 작품들은 수집가들의 손을 거쳐 프랑스 정부에 유증됐다. 그중 밀레의 <만종>은 프랑스가 최고로 자랑하는 작품이며, 살바도르 달리 같은 미술가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밀레의 작품 중 <이삭 줍는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추수가 끝난 논에서 세 명의 아낙이 이삭을 줍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농민과 노동자들은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을 정도로 궁핍했다. 하지만 상류층들은 수확한 곡식을 나눠주지 않고 모두 독차지했다. 상류층의 행태는 밀레에게 깊은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됐다.
<이삭 줍는 사람들>은 밀레의 정치적 관점이 정확하게 드러난 그림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상류층의 부조리와 욕망, 이기주의를 비판했고, 대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농민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랐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작품은 <씨 뿌리는 사람>, <건초 묶는 사람들>, <장작 패는 사람>, <키질하는 농부>, <메밀 추수 여름>, <감자 심는 사람들>, <추수 중에 휴식(룻과 보아스)> 등이 있다.
그중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평범한 농부는 역사화를 그렸던 커다란 화면에 영웅처럼 묘사돼 있다. 이런 분위기의 그림은 이전까지 영웅이나 귀족, 상류층 계급의 사람의 전유물이었지만, 밀레는 관습을 뒤엎고 농부를 영웅으로 내세웠다.
<추수 중에 휴식(룻과 보아스)> 같은 작품도 농민의 삶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작품에는 ‘만인을 먹여 살리는 농부는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밀레의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농부들이 휴식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밀레의 작품 가운데 최고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밀레는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잇는 바통 역할을 했고,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반 고흐나 피사로 등의 화가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전 국민의 존경을 받았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밀레의 작품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영원한 감동을 준다. 그 이유는 밀레가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려 했던 진정성을 그림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서 인간의 행복, 노동의 고결함, 만인의 평등, 세계의 평화 같은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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