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육은 대부분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유의 시발점에는 근본이 있고, 그 결과의 산물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미(美)에 관해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영육은 조금 더 오묘하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 투영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조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부정해 버리거나 내적인 염원을 심화해 이데아의 세계까지 담아낸다.
이동환 작가가 형상화한 '고래 뱃속'도 예술가만의 남다른 사유에서 시작됐다.
족히 육칠십 년은 산다는 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어린 개체로 추정되는 젊은 고래가 배에 가스가 가득 차 죽어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웬만큼 먹어도 가스가 차지 않는다. 사냥 자체가 어려워 배불리 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냥에 성공해도 죽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다.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해양생물학자들이 고래를 해부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뱃속에서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버린 플라스틱과 각종 폐기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동환 작가는 부패한 쓰레기가 가득 찬 고래 뱃속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한국 사회 같았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발견한 고래 숨구멍에서 갈 곳 잃은 인간도 보였다. 그는 날카롭게 붓끝을 휘둘러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인간을 신랄하게 그려냈다. 일신의 안위와 실리에만 영악하고, 비뚤어진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한 저 '상것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의 사유가 하릴없는 넋두리로 끝나지 않고 결실을 본 셈이다.)
끔찍하고 처절한 고래 뱃속 풍경
고래 뱃속은 벌겋게 불에 탄 숯덩어리였다. 거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쓸모없이 밀려나 형체만 남은 환영과 시꺼멓게 불에 그슬려 처연한 표정을 짓는 인간이 있었다.
이 작가는 고래 뱃속에서 검붉게 번질거리는 이들의 얼굴도 클로즈업했다. 얼굴은 죄다 불편함을 줄 만큼 처절했고 기묘했다. 현실이라는 전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온갖 군상의 발악과 좌절, 죄악과 분노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작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고 신념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상처받기 쉬운 일인지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괴로워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미덕은 사랑과 신념이지 않은가.
불확실한 시대,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아귀다툼할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상황을 이해한다.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삶을 사색할 여유조차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되돌아보면 돈에 쫓겨 정신없이 보내야 했던 하루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이동환 작가의 고래 뱃속 작품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고래 뱃속은 매캐한 냄새로 진동하는 작품 '검은 숲'과 '삼계화택(三界火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검은 숲'은 말 그대로 푸르름을 잃고 아수라처럼 변해버린 나무숲이지만 파멸과 죽음의 상징한다기보다 오히려 삶의 덧없음을 깨우치는 연작이다. '삼계화택'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사회를 화마에 휩싸여 폐허가 돼가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치환해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시리즈다. (삼계화택은 이동환 작가의 전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고래 뱃속을 생각하면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낯익은 작품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그중에서 유독 관심을 끈 작품은 이동환 작가가 올해 최초로 공개한 목판화 신작이다. 이 작품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가 쓴 회고록 「서간도시종기」를 기초로 조선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목판화다.
독립운동사 목판화는 세간에 화젯거리가 될 만큼 대작이었다.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목판화보다 데생은 치밀했고 기법은 섬세했다. 이동환 작가만의 독창적인 조형미와 미학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어 보는 재미도 가득했다. 그만큼 목판에 수련도 됐고 공력도 붙었다는 증거겠다.
전시장에 가면 파일로 묶어둔 독립운동사 작품집이 있다. 벽면에 전시된 작품을 자세히 보고 싶다면 이 파일을 넘겨보길 바란다. 그가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하게 목판을 연구하고 노동에 열중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사 목판화 작품은 조만간 책으로도 출판될 예정이다.
이동환 작가의 '고래 뱃속'전은 오는 13일까지 금호미술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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