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한성필 '지극의 상속'전 - 시간 층위서 발견한 인류 책무

이동권 2022. 10. 27. 23:52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거대한 빙하는 수정처럼 희고 푸른 빛을 발산하고, 하얀 설산은 신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영험한 자태로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신묘불측이다.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처럼 청월한 빛깔에 눈부터 휘둥그레진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흙마저도 지극에서는 예사롭지 않고, 하얀 얼음 위의 연못은 말 그대로 보석처럼 빛난다.하지만 이곳에도 어김없이 인간은 침범했다. 흉물스럽게 녹슨 배와 탄광,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수용소, 선혈이 낭자했던 전쟁의 흔적들이 대자연에 매몰된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담하게 지어진 가옥과 도로, 자동차는 대자연 앞에선 미물이다.

남극과 북극은 현대인에게 오지로 읽힌다. 영겁의 세월에 걸쳐 생성된 거대한 빙하와 극한의 추위, 희귀 동물의 서식지 정도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때론 인간의 간섭과 훼방으로부터 독립된 공간, 대자연이 빚어낸 극한의 숭고미가 흐르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탐험가의 찬란한 모험심을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또한 인간의 탐욕이 빚은 슬픈 역사로 얼룩져 있다.

16세기 네덜란드 탐험가 빌럼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를 발견한 이후, 주변 바다 전체가 핏빛으로 변할만큼 수많은 고래가 살육됐다.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남극권에 최초로 다가선 이후 그곳은 거대한 고래 무덤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야 비로소 고래 멸종을 위해 포경을 막고 있지만 이미 고사 직전의 위기까지 몰린 고래 개체수를 늘리긴 어려운 지경이다.

20세기에는 남극의 펭귄과 물개도 수십만 마리가 도살됐다. 도살된 동물들은 식용으로 사용되거나 화장품, 약, 옷, 에너지원으로 사용됐다. 

이와 함께 스발바르 제도에서 발견된 어마한 양의 석탄은 광산 개발 붐을 일으켰고, 급기야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과 나치 독일의 탄광 정복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전쟁의 잔해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막대한 양이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정유회사들의 치열한 유정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남극과 북극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부른 갖가지 비애 또한 간직하고 있다.

한성필 작가는 수십만 년간 빙하의 침식과 퇴적을 만들어낸 시간의 적층에서 대자연에 경이를 표하는 한편 그 뒤에 숨어 있는 역사와 현실의 간극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고래포획, 광산개발, 극점 정복과 같은 형적의 산물을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담아냈다.

한 작가의 작품은 미래에 대한 인류의 책무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풍요로운 지구로부터 대대로 삶을 상속받아 왔다. 하지만 탐욕과 오용으로 환경오염과 파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또 인구, 식량, 대기오염, 자원, 지구온난화, 물부족, 원자력 등 생존을 위협하는 다양한 위기에 봉착했다. 그의 작품은 북극과 남극의 과거와 현재를 미래로 영구히 상속한다. 그가 발굴하고 기록하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그곳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변해갈 미래를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