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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강경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는 자상한 아이였다.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듯이, 경대는 자신을 잊고 진심으로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살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입이 궁금할 땐 ‘센베이4)’를 사 와서 경대와 함께 먹곤 했다. 경대는 한창 과자를 좋아할 나이에도 더 먹겠다고 욕심을 내지 않고 아버지를 챙겼다. 또 호주머니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집에 들어올 때 꼭 과자를 사 와서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센베이구나.” 아버지는 경대가 사 온 과자를 보고 말했다. “아빠가 좋아해서 사 왔어요. 드세요.” 경대는 TV를 볼 때도 그랬다.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보다가도 아버지가 자주 보는 축구나 권투 경기가 ..

010. 약속을 지킨 부자

경대는 동정심이 많아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했다. 이웃들에게 떡을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셋방 사는 사람들부터 챙겼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주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가 있으면 나서서 들어줬으며, 길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찾아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직접 데려다줬고, 행여 갈 수 없을 만큼 먼 곳이라면 알아들을 때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소외를 느껴보지도 않았고, 업신여김을 당해보지도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경대는 영적인 영역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진실한 마음을 싹틔웠고, 실천했다. “거리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경대는 애석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음이 좋지 않았구나?” 어머니는 어린 경..

009. 2부 - 신록으로 우거진 젊음

경대는 자라면서 한층 드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유행하는 것, 무익하고 생활에 겉치레를 더해주는 것을 멀리하고 일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자기 생활 안으로 끌어들였다. 활기 넘치고 즐거운 눈망울로 정당한 것, 바람직한 것을 예찬했으며 사랑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여. 어깨를 활짝 펴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 여기 잠들어 있는 순수한 영혼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냐고. 강경대는 가슴속에 존경과 사랑을 가득 채우며 성장했다.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롭게 알게 된 현실과 조화를 이뤄나갔으며,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

008. 아무나 할 수 없는 꼴찌

강경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아니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글만 겨우 떼고 학교에 갔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입학한 동급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서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교육관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알고 가면 오히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강조하다가 아이가 비뚤어지는 것을 더욱 염려했다. 그래서 경대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경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서 학교 공부를 미리 배우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크는 것이 중요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건강한 육체를 기르고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는 일,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과 의욕을 갖는 일, 이 모든 것이 어린 시기의 가정교육에서 형성된다고 믿었다...

007. 예쁘고 인사 잘하는 어린이

강경대는 이목구비가 곱상한 데다 하얀 얼굴에 살이 토실토실 올라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예뻤다. 긴 단발머리에 가느다란 머리핀을 꽂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모두 여자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앉아 있을 때면 어른들은 흡족한 듯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 했다. “그 놈 참 예쁘게 생겼다.” 경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신문에 예쁜 어린이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났다. 경대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머니를 끈덕지게 졸랐다. “엄마, 저 예쁜 어린이 선발 대회에 나갈게요.” “대회에 나가겠다고?” 어머니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자신 있어요. 저처럼 예쁜 아들이 나가야죠. 상 받을 자신 있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식이 나간다고 하니 말릴 수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어..

006. 검소한 천하장사

강경대는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남달랐다. 덩치도 좋고, 키도 커서 식당에 가면 어른 3인분을 해치웠다. 음식을 가리는 일도 없어서 해주면 해주는 대로, 사주면 사주는 대로 맛있게 먹었다. 맛 좋은 음식 냄새가 나면 냉큼 식탁에 앉아 코를 벌름거리며 어머니를 채근했다. 어머니는 경대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피로가 쌓일 틈이 없었다. 때로는 경대가 한 번에 먹는 양이 너무 많아서 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식 키우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정원에 가둬놓고 잘 손질해서 어여쁘게만 키우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자라도록 거름을 적당하게 주는 것이 화초에 더 좋듯이, 잘 먹고 소화만 잘 시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경대는 체격이 좋아서 그런지, 타고날 때부터 힘도 장사였다. 어머니가 ..

005. 집안을 세운 복덩이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불안한 일이 생겨날 법도 한데, 경대가 태어난 후로는 액땜이라도 한 것처럼 좋은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무엇을 해도 영업이 잘 됐다. 모르는 곳에 가더라도 거래가 쉽게 이뤄졌고, 자신을 찾는 고객이 점점 늘어 1등 영업사원이 됐다. 덩달아 살림도 크게 불었다. 말씨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낯선 서울생활이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아버지의 성격 덕분에 사람들이 다들 좋아했고, 때때로 보여주는 진지함과 정직함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아버지는 6남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형제가 많은 집이 대부분 그랬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뤄냈다. 아버지는 어릴 때..

004. 퍼주기 좋아하는 경대

1970년대 민중의 삶은 열악하고 처참했다. 1966년 말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한 경제는 대량 실업사태까지 불러 대부분의 가정은 생활이 궁색하기 그지없었고, 먹고사는 일조차 힘에 부쳐했다. 그래서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끼니조차 때우지 못한 빈민촌 사람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만을 짓누르기 위해 ‘국가 안보 저해’, ‘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잡아들이기를 밥 먹듯이 했다. 강경대가 태어난 산동네 사람들의 삶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경대 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집세 걱정 없는 자택에, 방도 두 칸이나 됐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매를 잘 키우려는 욕심에 ..

003. 경대는 장군감

강경대는 1972년 2월 4일, 하월곡동 산동네에서 동백꽃이 첫 움을 트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경대가 태어난 동네는 당시 민중의 척박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3선 개헌1)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사탕발림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강요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조국의 근대화’와 ‘백억 불 수출’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경대가 태어난 날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갑자기 큰 눈이 내렸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영원한 책무와 사명을 양어깨에 짊어지게 될 것을 예감한 듯 찬란한 눈송이가 하염없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스며드는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복덩이를 기다리는 즐거움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첫 아이로 ..

주피터를 내며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파괴당한 분들에게 깊은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주피터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픽션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량과 믿음으로 작가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발간에 힘써준 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티브가 된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나에겐 모두 근사하고 친절한 가족이자 삶의 평화와 안정을 기원해주는 영육의 후견인이다. 어떤 말로도 감사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책/주피터 2021.11.15

밥줄이야기(2009년 문체부 문학 부문 우수도서) 언론보도

밥줄이야기는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문학 분야 우수교양 도서입니다. 이 책은 정직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우리 이웃의 삶을 통해 청소년에게는 노동과 땀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어른에게는 오늘을 사는 희망과 나눔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경향신문 - 모든 밥벌이는 신성하다 [책과 삶]모든 밥벌이는 신성하다 ▲밥줄이야기 이동권 | 알다 “때를 밀 때는 팔이 아니라 몸의 힘으로 밀어야 하고 리듬을 잘 타... www.khan.co.kr 서울신문 -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에도 펴질줄 모르는 인생…서글픈 밥줄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에도 펴질줄 모르는 인생…서글픈 밥줄 [밥줄 이야기] 이동권 지음, 알다 펴냄, 소설가 황순원은 그의 장편소설 ‘일월’에서 봉건시대였던 조선시대의 천민계층인 백정들이 일제시대 전후로 벌였..

책/밥줄이야기 2021.11.15

주피터 -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이 땅에 들어왔다

나는 두 계급의 갈등과 반목을 얘기하고 싶었다. 부자이고 아름다우며 지적인 도시여자와 가난하고 투박하며 무식한 시골여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대립을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과 곁들이고 싶었다.소설은 애석하게도 다른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집필 방향을 바꾼 이유는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날린 덕분이다. 며칠 동안 여러 방법을 동원해 망가진 하드디스크 복구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하늘이 노랬다.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짜내도 똑같은 문장을 쓸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소설에 손대지 못하고 멍하게 살았다. 먹고살려고 일 년 가까이 두 권 분량의 기록물을 썼을 뿐이다. 다시 기운을 낸 건 2021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전 세계인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 ..

책/주피터 2021.11.15

김다미 학생의 서평과 광동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의 만남

광동고 1학년 학생 6명이 찾아 왔습니다. 아이들이 참 똑똑하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노동의 소중함과 가치를 잘 알고 있어서 별다른 얘기가 필요 없었지요. 서로 웃고 격려하며 얘기를 마쳤답니다. 저자인터뷰 수업 2010년 보고서 추신) 대안학교 학생들도 찾아와 얘기를 나눴는데, 사진 자료가 없네요. 조금 서운해도 참아주세요!!! [서평] 밥줄이야기를 읽고, 보여 지는 것과 다른 것 김 다미 (광동 고등학교 1학년 9반) 나는 고등학생이 된 후로 직업의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아이들은 자신의 적성의 맞는 직업을 찾아서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직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모습..

책/밥줄이야기 2021.11.14

002. 1부 - 푸르디푸른 꽃씨

강경대는 나긋나긋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였다. 처음 봐도 누구나 호감이 가고 친해지고 싶은 소년이었다. 건장하고 야무진 자태, 정답고 거침없는 성품, 믿음직하고 진실한 영혼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또한 경대는 순수하고 진지한 데다 붙임성도 많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앙상하게 말라붙은 나무를 쳐다보면서도 멋지고 쓸모 있는 나무라고 칭찬할 만큼 마음이 넓었고, 배워야 할 일이라면 머리를 숙이고 당당하게 물어볼 만큼 의욕이 넘쳤다. 이제는 사라져 저 하늘의 별이 됐지만, 죽음으로 인해 더욱더 깊고 섬세해진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기꺼이 그 별의 궤적을 뒤따를 것이다. 하월곡동 밤나무골. 집들이 뒷산 솔밭과 바짝 잇대어 언뜻 보면 공기 좋고 물 맑은 ‘명당자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은 하루살이가 만..

001. 한 점 꽃잎이 지고

제발 잊지 말자. 경대의 죽음이 남긴 수많은 변화를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사색하자. 기억이란 위대하고 경이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하나의 행동으로 모아질 때 기억은 더욱 빛난다. 또 모든 지성과 비평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렇듯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잇는 가교이며 어긋날 일들을 지극히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는 촉매와 같다. 강경대의 죽음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지혜를 줄 것이다. 강경대는 1972년 2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대는 어려서부터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겸허한 마음으로 삶을 배웠다. 어떤 일에 미숙하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부모님의 의견을 따랐고, 아름다움에..

고은 시인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추천이 띠지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

2쇄를 찍을 때 고은 시인의 추천이 띠지로 들어갔다. 당시 훌륭한 선생님께서 책을 추천해 주셔서 너무 놀랐고 기뻤다. 10년이 지난 뒤 나는 또다시 놀랐다. 고인 시은의 미투(Me Too movement)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추천사를 써 주었다. 사진은 목동 방송회관의 PD연합 사무실에서 열린 강연 때의 모습이다. 이정희 의원은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이후 국민입법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추천사 "이 책에서 그려낸 얼굴, 깊이 간직하고 싶어요." 통곡해야 할 비극을 일상으로 바꾸어 사는 사람들.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어 시작했겠느냐"고 되묻는 사람들. 십 년 이십 년 그 일로 먹고사는 인쇄노동자의 말에, 도려줄 말을 찾지 못했습니..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31. [3쇄에서 삭제한 이야기] 밴드 마스터 - 돈 있는 사람들의 밤 생활을 서민들은 몰라요

성인주점에서 노래 반주하는 사람들 경쾌한 반주를 따라 부드러운 기타 멜로디가 시작되면 빛이 없는 암흑은 환희에 넘치는 별천지가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재능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접대하는 일이 많은 샐러리맨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한국 남자들은 ‘성인주점’에서 놀아야 제대로 접대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쉬운 부탁이 필요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찾게 된다. 성인주점에는 기자나 정치인도 많이 간다. 은밀한 뒷거래 뒤엔 질펀한 술자리와 망측한 희롱이 빠지지 않는 법. 그러한 사실은 가끔씩 ‘여기자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만천하에 드러나곤 하지만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가 ..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30. [책에 없는 이야기] 텔레마케터 - 따지고 욕하면 스트레스 받아요

전화만 보면 숨이 막혀오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어떤 만남보다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게 하며 더 넓은 세계와 조우하게 만든다. 거기가 바로 자신을 성찰해야할 지점이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 여고 졸업을 앞둔 신입 텔레마케터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출근카드부터 찍는다. 매의 눈으로 뒤통수를 쳐다보는 팀장과 오늘은 피하고 싶다. 계속되는 하루 한 건. 저조한 실적에 지각까지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차라리 숨이 가쁜 게 낫다. 신입은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ㄷ자 모양으로 설치된 자리에 앉아 오늘 돌릴 전화번호 명단을 살핀다. ‘어제 어디까지 전화했더라.’ 신입은 전화 돌릴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신입은 고객에게 전화..

책/밥줄이야기 2021.04.08

[책을 읽고] 투명인간, 우리이웃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 허은미 작가

짧은 글로 사물의 중심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나에게, 어느 날 두툼한 원고가 배달되었다. 처음엔 그 방대한 양에 질려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나는 필자가 들려주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어디서나 목소리가 들리는 잘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투명인간’처럼 우리의 시야와 의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온 이웃들이다. 그렇게 아무도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이동권 기자는 3년여의 세월에 걸쳐 기록해왔다. 원고를 읽다 보니 몇 달 전, 환경에 대한 원고를 쓰느라 쓰레기차..

책/밥줄이야기 2021.04.08

[책을 읽고] 우리 이웃의 생생한 삶의 현장 - 강성률 광운대 교수

내가 이동권 기자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여름경으로 기억된다. 편집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조각가 구본주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는데, 삼성화재에서 매우 자의적인 기준으로 보상금을 책정해 예술인들이 일일 시위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본 그는 매우 다정다감하면서도 수수해 보였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사건을 다루는 모습 속에서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지만 ‘한 고집’할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이후 우리는 잊힐 만하면 한 번씩 만났던 것 같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만났고, 친일 예술인들을 특집으로 다룬 인터뷰 때문에도 만났다. 만날 때마다 소주를 마셨던 것 같다. 술기운을 빌려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자주 보지는 ..

책/밥줄이야기 2021.04.08

[책을 읽고]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본 세상 - 이정무 <민중의소리> 편집국장

‘기자’ 이동권의 책은 직업 열전을 방불케 한다. 도부(屠夫), 때밀이, 밴드 마스터, 무명가수, 숙박업 종사자(일명 조바), 감단직 노동자, 안마사, 노점상, 로프공, 무당, 우편배달부, 포장마차, 바텐더, 교도관, 누드모델, 경기보조원(일명 캐디), VIP운전기사, 제빵기사, 배전선로 기술자, 산불감시원, 사회복지사, 미화원, 인쇄노동자, 마방 사람들, 정신병원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직업들이 있었나 물어보지만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 그러저러한 이웃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시원시원한 사진들과 함께 이어지는 이웃들의 열전은 누드모델, 밴드마스터, 숙박업종사자처럼 뭔가 들여다보는 쾌감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도관이나 정신병원 사람들처럼 ‘별취미군...’ 하는 헛웃음을 낳게 하기도 한다. ..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9. 해외 관광객 전용 버스기사 - 해외관광객 유치 활성화 맞나요?

한국을 싣고 다니는 사람들 여행은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한다. 어떤 만남보다 강렬한 인연을 만들어주고 아늑한 행복을 선사한다. 대개의 사람은 딱 거기에서 여행의 의미가 머물러 있다.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갑자기 징그럽게 느껴지는 날이면, 서울 바닥을 돌아다니다 인구과잉을 실감하는 날이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숨 가쁘게 생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물론 도로의 먼지까지 들이마시는 삶을 마다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떠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들 때는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다. 불편한 곳에서 새우잠을 자게 되더라도, 이마에 시커먼 땀이 맺히고, 종아리가 퉁퉁 부어오를지라도, 감사하는 마음..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8. 정신병원 사람들, 사무관·의사·간호사 - 정신병원은 혐오시설이 아니다

지역이기주의에 멍든 국립 서울병원 사람들 우리의 정체는 인간, 몸과 마음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존재, 모두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생명체다. 우리는 그 뚜렷한 암시를 따라 서로를 껴안으며 살 수 없을까. 정신병원은 영화나 소설에서 불길한 징조가 가득한 곳으로 묘사되곤 했다. 한 여인이 성에가 얼어붙은 창살을 잡고 짐승처럼 울부짖거나 온몸이 묶인 한 사내가 창밖에 떠있는 보름달을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환자가 전기충격 치료를 받으면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고, 환자들끼리 성관계를 맺거나 괴상한 말과 행동을 반복하면서 등골을 오싹하게도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창작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대중매체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정신병원에 대한 ..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7. 마방 조교사·관리사 - 좋은 말을 훈육한 자, 그랑프리를 거머쥐다

사람보다 말(馬) 많고 말(言) 많은 마방(馬房) 사람들 경마장을 누비는 말 뒤에는, 마권을 손에 쥐고 가슴을 조리는 사람들 뒤에는 말이 잘 달릴 수 있도록 키우고 훈육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사나운 겨울바람이 하얀 찹쌀떡처럼 매끄러운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은 대개 그렇지만 모든 것들이 졸고, 졸리는 듯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빛이나 바람 소리,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사람의 흔적들을 찾기 마련이다. 때론 전혀 생각하지 않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데, 이런 것들을 입 밖으로 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소박한 호기심에서 기인한다. 하염없이 의미를 추구하고 사색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곳일까’ 떠올려보는 단순한 궁금증인 것이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마방..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6. 미화원 - 생계형 직업으로는 힘들어요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 대지가 썩어가고 하늘이 병들어가는 세상. 그것을 고민하고, 그것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자신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순된 존재가 바로 인간. 어둑어둑한 골목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팔짱을 낀 채 모퉁이를 돌아가던 한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정문 옆에 우산을 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 뒤였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는 파수병처럼 주위를 살피다 푸른색 철문을 꽝 닫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쓰레기봉투를 아끼기 위해서겠지만 왠지 모르게 ‘얌체’ 같아 보여 마음이 씁쓸했다. 아마도 이 우산은 학교에서 일하는 미화원이 치울 것이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오후, 대학가는 청춘의 기운으로 들썩인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여학생들의 얼굴은..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5. 산불감시원 - 산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묵묵히 산불을 감시하는 사람들 변덕스러운 산들바람을 따라 걷다 보니 영혼 깊은 곳에서 자유롭고 맑은 입김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사소한 실수로 타버린 산을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최소한 이삼십 년. 공연히 눈꺼풀이 깜박거리고 떨린다. 따뜻한 늦가을. 나뭇잎이 더욱 거칠게 메말랐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부스럭’하고 부서진다. 나뭇가지도 삭정이처럼 말라비틀어져 금방 ‘뚝’ 소리를 내며 꺾인다. 논두렁을 태우다 작은 불씨라도 날아오면 석유를 끼얹은 장작불처럼 거세게 타오를 것만 같다. 나뭇가지 위에 엉거주춤 서서 나를 바라보는 다람쥐 한 마리가 또렷하고 귀여운 꼬리를 휘저으며 모습을 감춘다. 나무 꼭대기에 점잖게 걸려 있는 주황빛 태양은 산등성이를 뒤덮고, 소리 없이 불어오..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4. 제빵·케이크 기사 - 위생적으로 만들어요

고객이 불신에 마냥 억울한 사람들 행복한 날을 축복하기 위해 케이크를 자르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달콤한 빵을 입에 넣는다. 언제나 일상은 그렇게 되풀이되는데 그 순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신용이 아니라 오직 돈으로만 지불되고 있구나. 생일날 환희의 정수는 뭐니 뭐니 해도 ‘케이크’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와 비슷하다. 제아무리 화사한 꽃이라도 언젠가는 시들어 죽어야 할 운명, 어여쁜 케이크도 생일잔치가 끝나면 한순간에 일그러져야 할 운명. 어쩌면 가장 무상한 것이 가장 아름다우며, 사멸을 연상하는 것 자체가 더욱더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것 같다. 우리의 청춘이, 젊음이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다. 케이크 상자를 노란색과 빨간색 리본으로 묶어 내놓으면 일요일의 연미복처럼 더욱 화사한 느낌을 준다..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3. 간호사 - 딸처럼 사랑으로 대해주세요

환자, 보호자, 의사들에게 냉대받는 사람들 사람의 목숨을 다투는 일에 체면과 상황이 무슨 대수더냐. 가는 마음이 고약하면 되돌아오는 마음도 고약한 것을. 수술실로 가는 길. 이른 아침부터 긴장감이 팽팽하다. 환자 A씨는 반쯤 실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 하얀 옷을 입은 병원기사와 순한 인상의 간호사가 동행한다. “별일 없겠지?” “잠깐 주무시고 나오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간곡한 어투로 A 씨를 안심시킨다. 복도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들이 멀리서 “저 남자 성격이 못됐어.”라고 쑥덕거린다. 심장병 병동 보호자들은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근심이 많다. 하룻밤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 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A 씨는 짜증을 내거나 ..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2. 경기보조원 - 고객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 기쁨을 말하는 동안은 그만큼 성숙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고, 주위가 내 것으로 넘칠지라도 기쁨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기쁨이 삶에 미치지 않고 표현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삶은 성숙한다. 호방하게 솟아오른 푸른 언덕에서 향긋한 바람이 풀풀 불어왔다. 잘 가꿔진 정원처럼 인위적인 정취는 지울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휴식’과 같은 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 기분은 사방이 탁 트인 초원을 거니는 ‘산책’이나 파릇파릇한 잔디밭을 뛰노는 ‘피크닉’에서 느낄 수 있는 미완의 ‘청량감’그대로였다. 연둣빛 잔디밭 사이사이에는 전자동 카트(Cart)가 오가는 좁은 도로가 오솔길처럼 뻗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는 골퍼나 갤러리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하거나 피곤한 다..

책/밥줄이야기 2021.04.08

021. 인쇄노동자 - 인쇄도 예술이에요

소음과 먼지에 시달리는 사람들 신문을 펼치고, 책장을 넘기면서 삶의 참된 의미를 구한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를 보는 눈을 키워주는 이 귀중한 토양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 탄생하는지 아는가. 그 가치와 소중함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으리라. 밤이 꽤 깊었다. 이따금씩 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한 빛이 없었다면 무섭게 짓누르는 어둠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반시간쯤 지나자 거리 끄트머리에서 쉴 새 없이 지나가던 자동차 불빛도 뜸해졌다. 세상이 점점 암흑이 돼간다. 털이 북슬북슬한 고양이 서너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찢다 몸을 낮췄다. 인기척 때문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고양이들은 다시 노란 눈을 번득이며 쓰레기봉투 입구에 주둥이를 집어넣었다. 거리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고양이들에게는 무덤덤한 일상에 ..

책/밥줄이야기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