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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태우 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탄압의 결과로 강경대는 스무 살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했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대는 잊혔다. 한때 열심히 싸웠지만 다시 관성에 젖어버렸고, 경대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도 희미해져 갔다. 어쩌면 세상사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경대가 죽어갈 때도 도서관에 앉아 책을 봤던 사람들, 사랑타령 하던 사람들, 신나게 놀러 다니던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경대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민중을 위한 세상도, 자주, 민주, 통일의 세상도 아직 오지 않았기에 무덤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또한 경대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뜨거운 해방의 불씨를 곳곳에..

040. 선미의 외출

선미는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불안해하고,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후에는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상담하고 봉사 활동에 매진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생각하며 살았던 부모님의 생활에서 배운 그대로였다. 선미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딸로서의 역할보다 동아리, 학생회, 농활 등에 자신을 쏟아부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만약 경대가 죽지 않았다면 선미는 아마도 심리학자가 아니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일을 하는 예술인이 됐을 것이다. 선미는 인간문화재 선생님들도 칭찬할 정도로 꽹과리를 잘 쳤다. 장단을 들으면 곧바로 칠 수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음악 지식도 해박했다. 특히 전통문화에 깃든 신명을 좋아했다. 사물놀이를 하면 신이 났고, 이것만큼 즐거움을..

039. 경민회관

어머니는 1993년 2월 광주시 우산동에 대지 125평을 사서 조립식 2층 건물을 지었다. 1층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은 50여 명이 잘 수 있는 방을 마련했다.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은 아니었다. 아들의 뜻을 기리는 마음이었다. 경대가 망월동에 묻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함께 싸워줬던 광주 시민들이 고마웠고, 또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경대가 광주 망월동에 묻힌 것도 사연이 있다. 사람들은 경대의 묘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석 모란공원을 권했다. 망월동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모란공원에 있는 박종철 열사 옆에 가묘 20평을 준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광주 망월동을 고집했다. 찾아가기 쉽고, 자주 갈 수 있는 곳을 원했다면 모란공원을 선택했겠지만 ..

038. 부질없는 원망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경대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구속되고, 집에는 어머니와 딸, 둘만 남았다. 덕수궁 옆 서부지원에서 경대를 죽인 백골단들의 마지막 재판이 열리던 8월 6일에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무너졌다. 법원에서 유족들에게마저 방청권을 주지 않은 데다 ‘방청안내문’ 어디에도 ‘강경대’라는 이름조차 공지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선미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방청권을 달라고 항의했지만 법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재판은 피해자 측의 증인도, 방청객도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선미는 식음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력, 면역력이 약해지고 몸에 진이 다 빠지면서 결핵이 찾아왔다. 원래부터 건강한 체질이 아닌데다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통에 병이 들었..

037. 감옥살이

감옥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원래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몸에 결석증이 생겼고, 발에는 동상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경대를 죽인 백골단들과 함께 같은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돼 괴로움이 심했다. 면회나 운동을 나가는 길에 이들과 마주치는 것은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심정을 아내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경대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전경들과 같이 있어요. 현 정권의 야수들이 별의별 고통을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저들이 하는 짓이 너무나 야비하고 수치스러워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그래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어요. 이 땅에서 독재를 완전히 몰아내서 민중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고, 7천만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설 때까지 ..

036. 법정소란죄

아버지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은 엄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 범죄자의 죄를 파헤치고, 판사는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내리는 줄 알았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었고, 어떤 경우에도 검사나 판사의 의견을 존중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 법의 잣대가 때론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법정소란죄’로 기소됐다. 7월 4일 경대를 죽인 전경들에 대한 첫 공판이 벌어진 날이었다. 검사, 변호사 할 것 없이 모두 똘똘 뭉쳐 재판을 일사천리로 끝내려고 했다. 이 사건에 가담한 전경 5명에 대한 신문도 어물쩍 끝내버렸고, 이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고로 서둘러 결론지으려 했다. 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고 명령을 내렸던..

035. 잔인한 계절

어머니는 경대를 잃은 지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대문을 열자마자 슬픈 목소리로 경대를 불렀다. 단 한 번도 경대가 집에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딘가에서 활짝 웃으며 나타나 꼭 안아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경대는 온데간데없고 뜻밖의 상황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걸이, 팔찌 할 것 없이 돈이 된다 싶은 것은 모두 도둑을 맞았다. 그 당시에는 흔하게 사용하지 않았던 신용카드도 사라졌다. 카드를 쓰는 게 낯설어서 장롱 서랍에 넣어 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명세서를 보고서야 카드를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신용카드 대금을 내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딱히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경대가 죽은 뒤 신용카드를 사용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

034. 회유와 협박

경대가 죽은 다음날부터 영안실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아버지의 동창생이라고 찾아왔다. 민자당에 있는 높은 사람이라며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다름 아닌 노태우 정권의 끄나풀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어, 자네하고 동창이야. 그런데 말이야. 경대는 갔지만 자네라도 살아야 될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은 5억짜린데, 경대는 20억을 줄 테니 장례를 치르고 합의함세.” 아버지는 모르는 척했다. 뺨이라도 때려야 분이 풀리겠지만, 그럴만한 경황이 없었다. 아버지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경대 엄마 알면 큰일나니까 저리 가시오.” 아버지는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팔아서 자기 살 길을 찾으려는 비정한 부모가 이 세..

033. 6부 - 상처받은 영혼

비천하고 모순된 것들로 넘쳐나고, 추하고 노쇠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 한없이 피로가 몰아친다. 거칠고 야비한 폭력과 욕망에 지쳐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러나 바닥에 주저앉아 포기할 수만은 없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더라도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시키는 힘은 헌신하는 사람의 영혼에서 발견되는 것. 강경대가 잠든 그곳에 혁명이 있고, 참다운 삶이 있다. 경대가 죽은 뒤 갖가지 회유와 협박이 끊이질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진심 어린 사과나 조치 없이 하루빨리 장례를 치러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만 했다. 심지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작은 연민조차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경대의 죽음을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분노만 더욱 키울 뿐이었다. 경대 가..

032. 망월동에서 잠들다

광주 도청 앞에서 노제를 마치고 8km가 넘는 거리를 행진한 시민들은 새벽 3시경 망월동 묘역에 도착했다. 모두들 환희와 슬픔이 교차된 얼굴이었다. 이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광주출정가’, ‘농민가’, ‘아침이슬’ 등을 합창하며, 간간이 구호를 외쳤다. “광주 시민 일어섰다.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망월동은 통곡한다. 미국 놈들 물러가라.”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경대 열사의 하관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대형 태극기가 덮인 관이 동료 학우들에 의해 무덤으로 옮겨지자 묘역을 가득메운 1만여 명의 추모객들이 침통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합창했다. 유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경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다 끝내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오열했다. “경대야 갈래. 어미만 남겨놓고 정말로..

031. 운암대첩

광주 시민과 학생 10만여 명은 금남로에서 5·18 광주항쟁 11주기를 기리고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태우 대통령을 형상화한 허수아비 화형식을 거행하며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때 故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광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대들은 속속 광주 톨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5월 19일 새벽 4시 15분. 강경대 열사의 운구행렬이 광주 톨게이트에 멈춰 섰다. 전경 20개 중대 3천여 명이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례행렬의 광주 시내 진입을 막고 있었다. 광주 도청 앞 노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선봉 깃발을 들고 곳곳에서 강경대 장례행렬의 진입을 돕기 위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돌과 쇠파이프로 맞섰고, 일부 학생..

030. 시청 앞 노제를 사수하라

5월 14일 오전 10시부터 명지대 서울캠퍼스에서 故 강경대 열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명지대를 둘러싼 담장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졌고, 흰색과 검은색 깃발이 교차해 꽂혔다. 또 영결식장 앞 본관에는 경대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로 20m, 세로 30m 크기의 검은색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영결식 도중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 명의의 조화가 도착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문에서 돌려보냈다. 명지대 총장은 추도식 비용을 학교에서도 대겠으니 추도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했지만 추도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식이 파행적으로 진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운구행렬은 영결식을 마치고 시청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교문을 나섰다. 운구는 민족예술총연맹 소속 풍물패 2백여 명이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이끌었고, 그 뒤로..

029. 지역·나이·성별·직업을 초월한 투쟁

시위 현장에는 여러 가지 홍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책회의 소속 각 단체들과 학보사들은 각종 호외와 속보 유인물을 통해 전국의 투쟁 상황을 알렸고, 학생들은 번화가, 지하철,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배포해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유인물은 딱딱한 글로만 구성되지 않고 만화, 사진 등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변협을 비롯해 전국교수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전국 20여 개 단체들이 잇따라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변협은 ‘시위를 진압할 때 정책적으로 고압 분위기를 조장하고, 은연 중에 불법수단을 쓰도록 고무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

028. 결사항전의 다짐

4월 27일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여 강경대 사망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고, 신촌 로터리까지 행진하기 위해 교문 앞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전경들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를 막았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애초 이날 싸움은 명지대 학생들이 주도했다. 명지대 학생들은 명지대 교문에서 연세대까지 평화행진을 진행한 뒤, 전대협이 주최한 이날 집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제일은행 사거리에서 막고 길을 내주지 않자 학생들은 그 자리에 앉아 농성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좌 농성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나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027. 5부 - 일어나라 열사여

순진한 웃음 속에서 삶을 포식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대의 상처를 품에 안았던 강경대. 역사의 아픔인지, 운명의 조롱인지 경대는 무거운 절망을 짊어지고 끝내 산화했다. 하지만 절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뜨거운 용기와 의지로 꽃피어 거대한 혁명을 만들었다. 더 이상 춥다 하지 마라. 더 이상 배고프다 하지 마라. 끈기 있는 사랑과 인내만이 경대의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참으로 고되다.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경대를 떠올리자.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구국의 아들을. 노태우 대통령은 강경대의 죽음에도 꿈쩍하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는 망발을 했다. 오만한 군사독재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이 보여줬다. “현재 민주화..

026. 검안

강경대가 사망하자 유가족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도 사건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갖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경대의 죽음은 몇몇 백골단의 소행에서 비롯된 ‘사고’가 아니라 노 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통치가 부른 ‘살인’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은 경대가 사망한 다음날, 이례적으로 안응모 내무부장관을 경질하고, 시위 현장을 지휘했던 서장을 직위 해제했다. 그러고선 경대의 사인을 놓고 ‘물타기’ 공작을 시도했다. 전경은 쇠파이프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강경대는 아마도 날아오는 돌에 맞아 사망했을지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서울시경도 시위진압에 나선 백골단은 사과탄 두 개와 50cm 길이의 플라스틱 경찰봉과 방패 등 정식 장비만 갖췄다고 발표했다. 하..

025. 어머니의 슬픔

경대가 죽기 전 그날 새벽. 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공부하는데 별도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주로 새벽시간을 이용해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세수를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어와 꽃이 핀 가지를 흔들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이고 슬픔에 젖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경대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종이를 펼쳤다. 부모님께 메모를 남기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올게요. 경대 올림 잠에서 깬 아버지는 경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라고 썼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툴게 ‘어머니’라고 고쳐 쓴 편지였다.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고 챙기는 아..

024. 떨어지는 꽃잎

4월 26일 오후 3시. 선미가 서부서 유치장에 갇혀있을 무렵, 강경대는 5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전경과 대치했다. 이들 중에서 10여 명의 학생들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교문 밖으로 50미터 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경대는 이날 사회과학 학회원들과 함께 용인캠퍼스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학내 집회가 있다며 선배에게 사정을 구하고 혼자만 빠졌다. 늘 그랬듯이 경대는 거리에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경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새내기였지만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매사를 결정했다. 그래서 학내 집회에도 열심히 참가했고, 궁금한 것을 선배에게 물으며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는 것보다 몸으로 실천했고, 깨달은 것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겼다. 그날 집회에서 경대는 연락책을 맡았다...

023. 선미의 눈물

4월 26일 12시. 여학생 22명이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서부서 항의방문 투쟁 출정식’을 갖고 서부경찰서로 향했다. 여학생들은 서부서 앞에서 ‘총학생회장을 석방하라.’를 외치며 경찰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잡아 가뒀다. 선미도 총학생회장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경찰의 억센 팔뚝에 붙들려 개 끌려가듯이 질질 유치장으로 잡혀갔다. 경찰은 여학생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 조사했다. 선미도 범죄자처럼 불려 앉아 경찰과 마주했다. “주소, 학교, 학년, 과, 이름 대.” 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라고 해서 죄 없는 사람을 가둬서도, 그들이 개인의 정보를 알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미는 경찰들을 향해 분하고 억울한 마음..

022. 죽음의 전조

4월 24일. 박광철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상명여대에서 지지·연대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불법으로 연행됐다. 학원자주화투쟁의 구심점이었던 총학생회장을 잡아들여 명지대사태가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막아보려는 꼼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지대 학생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시위를 조직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학생들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싸웠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면 학교 측에서 등록금 인상을 포기하고 손을 번쩍 들 줄 알았다. 아니, 5% 미만이라도 인하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경찰과 한몸이 된 학교 측의 대응은 강경했다.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고, 타협안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집회 시작을 40여 분 남겨놓고 학교..

021. 4부 - 떨어진 붉은 꽃잎

죽음에 대한 고통과 비애는 살아남은 사람에게도 크지만 죽은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위로하는 길은 어떠한 재물이나 추모 행사가 아니라 죽은 이에 대해 올바르게 기억하고 내면세계에 재건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면 경대는 늘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또한 값진 열매로 승화될 것이다. 경대가 가졌던 순수한 동경이 광폭한 쇠파이프 아래 무너져 내린 날을 기억한다. 애달픈 마음이 죽음을 쫓고, 그리움이 사무쳐 고뇌의 끝으로 되살아나던 날. 울어라. 하늘이여. 이 기약도 없는 이별을 너라고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노태우 정권은 집권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민주세력을 ‘적’으로 몰아세워 탄압했다. ‘법질서 수호’와 ‘좌경폭력세력 척결..

020. 총학생회 진군식

3월 22일.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총학생회 진군식이 열렸다. 명지대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의 학원 탄압을 분쇄하고, 터무니없는 등록금 인상률을 저지하자는 각오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대는 무대 뒤에서 ‘따람’ 회원들과 함께 ‘투쟁의 한길로’를 열창했고, 선미는 탈반 학우들과 함께 무대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쳤다. 학생들의 기세는 몰아치는 폭풍우 소리처럼 커다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이날 진군식에서는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이 진행됐다. 집회할 때는 상징의식을 하지 않을 것처럼 전경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깜짝쇼’처럼 감행했다. 진군식이 끝나기 전까지 전경들의 교내 진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경들이 처음부터 교내로 진입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할 때만 막..

019. 명지대의 속사정

1991년 당시 명지대는 서울캠퍼스의 학생 수가 2,000명이 고작인 작은 학교였다. 반면 학생운동은 튼튼했다. 이 시기만큼 명지대에서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없었다. 학생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은 사회 변혁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크고 작은 사업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총집중했다. 특히 새내기가 들어올 때쯤이면 운동에 열심이었던 학생들이 주축이 돼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과학생회에서 일찌감치 사업을 준비하고 새내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명지대는 88년을 전후로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과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18)로 그룹이 나뉘었다. 사업은 주로 NL그룹이 주도했으나 PD그룹에서도 대등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분..

018. 투쟁의 한길로

선미는 경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북과 장구를 곧잘 따라 쳐 함께 동아리 생활을 하길 원했다. 하지만 경대는 선미가 활동하던 동아리 ‘탈터사랑’이 아니라 노래패 ‘따람’에 가입했다. 누나의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경대는 무엇보다 여러 가지 배움을 통해 자신의 갈증을 풀고 싶었다. 경대는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낼 만한 연결고리를 필요로 했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일신우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길 원했다. 동아리 선배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으로 철철 넘쳤던 경대의 본모습을 처음부터 알아봤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내기 중에 괜찮은 애 있더라.” “누군데?” “경제학과 강경대.” “왜?” “동아리 가입원서 봤어? 우리 동아리에 지원한 이유가 ‘사상이 투철..

017. 배우고 깨닫고 싸우다

강경대는 명지대 합격통지서를 받은 다음날부터 매일 학교에 갔다. 재수할 때부터 선미가 활동하고 있던 탈패 동아리 ‘탈터사랑’ 선배들과 맥주 한 잔씩은 할 정도로 친분이 있어 학교가 낯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3학년이었던 선미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붙임성이 좋은데다 눈치를 보기는커녕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곧잘 말을 걸 수 있었던 성격 덕분이다. 경대는 선배를 만나면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았다. 머릿속에 맴돌았던 문제나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 그래도 선배들은 귀찮아하지 않고 허허 웃으며 경대를 상대해 주었다. 경대는 선미와 함께 있을 때도 개념치 않았다. 선미를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선배들과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선미가 집에 가자고 재촉을 하면 경대의..

016. 1991년

강경대가 대학에 들어가던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집권 3년 만에 5공화국으로 돌아갔다. 변화된 듯 보였던 조치들은 모두 무산됐고, 정치는 폭력으로 대체됐으며, 거리정치가 되살아났다. 6공화국 초반에는 5공화국과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국민의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 정치권의 공간이 확대돼 민주세력의 움직임이 조금은 자유로워졌고, 폭력만으로 통치하던 지배방식도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정권은 1989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반민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가의 폭력을 공권력으로 정당화하고 민주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들어간 것도 이때쯤이다. 1990년에는 ‘3당합당7)’을 통해 폭력을 정치적으로 정당화시키고, 공..

015. 3부 - 다시 피는 열정의 꽃

삶은 인내로부터 시작된다. 시간을 극복하고 아픔을 참아내며 헛된 망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삶은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인내를 통해 발현되는 적극적인 행동이나 작은 헌신은 삶에서 그대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것만이 인류를 풍요롭게 해주고,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많은 성현들은 이를 깨닫고 가르쳤으며, 지혜로운 자들은 이를 따랐다. 강경대의 삶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강경대는 대학에서 자신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일들과 마주쳤다.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아련한 상들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거기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스스로 싸웠다. 경대는 빠르게 지나가는 새내기 시절에도 양심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의식을 숨김 없이 드..

014. 편애 속에 꽃핀 남매愛

강경대는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애정 없이는 이웃에 대한 헌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했으며,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 해가 된다면 그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 선미보다 아들 경대를 더 사랑했다. 남아선호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경대 사랑은 남달랐다. 어머니의 마음은 온통 경대에게 치우쳐 있었다. 남편도, 딸도 아니고 경대가 최우선이었다. 사골 국을 끓여도 경대 먼저 챙겨줄 정도였다. 대신 아버지는 선미를 더 사랑했다. 딸은 아빠 딸, 아들은 엄마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경대 때문에 ‘유난스러운 엄마’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시간이 나는 대로 경대와 대화하고, 손을 잡아주거나 쓰다듬어주었다. 하루라도 경대를 안아주지 않..

013. 마음씨 좋은 예비사업가

강경대는 유혹이 일거나 무례한 일을 당할 때, 언제나 원칙을 세우고 사랑으로 일관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친구들과의 다툼이 생길 때에도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 돼 자신을 질책했다. 얻어터지고 싸우는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먼저 아끼고 용서했으며, 이러한 행동이 남자답고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남학생들 중에는 상대방이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화를 참지 못하고 무조건 주먹을 날리는 애들 때문에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경대도 친근한 마음으로 했던 장난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경대는 장난을 치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친구와 부딪쳤다. 힘 꽤나 쓰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짜증 나는 얼굴로 일어나서는 이를 드러내 놓고 웃으며 빈정거렸다. “야, ..

012. 세상을 보는 눈을 뜨다

강경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5·18광주항쟁5)을 알았다. 슬프고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 경대는 충격을 받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웅숭깊은 생각을 했다. 그 중심에는 오만스러운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주위에 냉담의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미웠고, 만약 모두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냉혹해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경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싸웠던 이들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조그마한 것도 마음을 드러내 놓고 헌신할 때에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경대가 5·18광주항쟁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광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광주로 내려가 친구를 만났다. 실성한 듯 보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