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01. 한 점 꽃잎이 지고

이동권 2021. 4. 8. 22:40

제발 잊지 말자. 경대의 죽음이 남긴 수많은 변화를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사색하자. 기억이란 위대하고 경이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하나의 행동으로 모아질 때 기억은 더욱 빛난다. 또 모든 지성과 비평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렇듯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잇는 가교이며 어긋날 일들을 지극히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는 촉매와 같다. 강경대의 죽음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지혜를 줄 것이다.

 

故 강경대 열사 장례행렬

강경대는 1972년 2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대는 어려서부터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겸허한 마음으로 삶을 배웠다. 어떤 일에 미숙하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부모님의 의견을 따랐고,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할 줄 알았다. 
경대는 짓궂은 친구, 이웃집 아주머니, 가난한 할머니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마음씨 넓은 아이였다. 


어떻게 보면 너무 순수하고 점잖아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어린 아이의 성품이 아니었다. 그 흔한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아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성격은 경대가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열정적인 청년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경대는 대학에 입학한 뒤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민중의 삶이 말살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은 이 나라를 걱정하는 학생운동가의 길로 경대를 서서히 이끌었다. 수많은 선배들이 그랬듯이, 경대는 오로지 그 길을 걷고자 했고, 거기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길 원했다. 하지만 경대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대는 스무 살의 삶과 불과 2개월의 대학생활을 끝으로 한 점 꽃잎이 되어 소리 없이 떨어졌다.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쓰러진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값싸게 찍었다고 좋아했던 사진은 영정사진이 됐고, 등교하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금방 올게요.”라고 부모님께 남긴 메모는 마지막 유언이 됐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단 한 마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숨이 멎어버린 경대와 그의 죽음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낙망(落望)이었다.


경대의 죽음은 우연도, 사고도 아니었다. 공안탄압이 부른 ‘필연’이었고, 무자비한 ‘살인’이었다. 악랄한 독재정권의 ‘실체’였다. 


전국 방방곡곡이 피 끓는 절망으로 가득찼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경대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최루탄과 물대포에 맨몸으로 항거했다. 그리고 91년 ‘5월 투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회유와 협박도 끊이질 않았다. 죽음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폄훼하거나 희석시키는 갖가지 수작도 부렸다. 


이뿐인가. 장례 행렬을 가로막고 시신 위로 최루탄을 난사해 경대를 덮은 태극기를 갈기갈기 찢었고, 그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가족들을 폭행하고 아버지까지 감옥에 가둬 버렸다. 


그럴수록 민중은 더욱 단단해졌다. 세대를 초월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를 외쳤다. 예술인들은 시대의 분노와 눈물을 예술로 승화해 투쟁의지를 북돋았으며, 노태우 파시즘 체제의 본질이었던 백골단들의 양심선언도 잇따랐다. 마치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람들은 강경대가 운동권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학년이 무엇을 알고 시위에 참여했겠느냐’며 ‘열사’라는 호칭이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중요하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경대의 ‘진정성’, 생명과 맞바꾼 ‘정의로움’ 그리고 경대의 죽음을 슬퍼하며 거리로 나온 수많은 학생들을 생각하면, 그 같은 주장은 거대한 바위 위에 얹은 작은 모래알 한 개와 같은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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