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08. 아무나 할 수 없는 꼴찌

이동권 2021. 11. 15. 13:44

V자를 그리며 웃고 있는 경대

 

강경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아니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글만 겨우 떼고 학교에 갔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입학한 동급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서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교육관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알고 가면 오히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강조하다가 아이가 비뚤어지는 것을 더욱 염려했다. 그래서 경대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경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서 학교 공부를 미리 배우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크는 것이 중요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건강한 육체를 기르고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는 일,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과 의욕을 갖는 일, 이 모든 것이 어린 시기의 가정교육에서 형성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신은 경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별난 걱정거리를 만들었다. 


경대는 집에서 ‘착하다’, ‘잘한다’는 칭찬만 받다가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에게 전혀 칭찬을 받지 못했다. 선생님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모든 일에 열심이었지만 칭찬은 항상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돌아갔다. 


받아쓰기 시험이 있던 날, 경대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고 졸랐다.


“선생님, 저도 잘 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넌 60점 밖에 못 받았잖니?”
“점수는 그렇지만 전 최선을 다했어요. 그 정도 점수라면 저도 잘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칭찬해 주세요.”


경대는 조금도 웃지 않고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경대가 나중에 100점 맞으면 선생님이 칭찬해줄게.”
“점수가 다는 아니잖아요. 선생님. 저도 잘했다고 동그라미 쳐주세요.”


경대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항의를 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다. 선생님은 하는 수 없이 잘했다고 경대의 시험지에 동그라미를 쳐줘야 했다. 


경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다. 어른들이 심심풀이 삼아 노래를 시켜도 칭찬을 받기 위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남진의 ‘님과 함께’를 부르며 춤을 추거나 ‘마징가Z’ 같은 만화영화의 주제곡을 열창했다. 다른 아이들이 뒤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도 모범생으로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면 경대는 항상 침착한 몸가짐으로 자신을 다스렸고, 과장하는 법이 없었다. 


경대는 공부보다는 밖에서 누나와 뛰어 놀거나 공놀이, 술래잡기, 눈싸움하는 것을 즐겼다. TV에서 나오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흉내 내거나 동화책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부모님은 경대가 하루 종일 놀아도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그렇게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대의 초등학교 때 성적은 늘 뒤에서 맴돌았다.


경대는 단국대학교부속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꼴찌에서 두 번째를 했다. 


아버지는 경대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학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경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공부를 외면하길 원치 않았고, 삶의 한 방편으로 긍정하면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큰 욕심은 내지 않았다. 경대가 대학생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대학 생활은 무슨 일이 됐건 앞길을 해쳐나가는데 도움이 되고,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경대야 기념사진 찍자.”
“무슨 일을 기념하는데요?”
“꼴찌 한 거. 꼴찌는 누구나 하는 게 아니야. 꼴찌에서 두 번째를 해봤으니까 이제는 앞에서도 두 번째를 해봐라.”


경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오그린 채 사진을 찍었다. 반항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 가슴에 두고두고 남을 일이었지만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처방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대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공부에 흥미를 붙여 2학기부터는 전교에서 50등, 100등씩 성적이 올라갔고, 중학교 3학년 때 이르러서는 10등까지 치고 올라갔다. 


어머니는 변해가는 경대의 모습이 너무도 대견했다.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잘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대가 순종과 굴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경대는 공부하라고 말을 하지 않는 어머니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다.  


“엄마는 아들이 대학 못가도 괜찮아요?”
“자식 대학 가는 걸 싫어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엄마는 경대가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는 걸.”
“그런데, 엄마는 왜 저에게 공부하라는 말은 안 하세요. 만날 자고 해라, 먹고 해라, 그런 말씀만 하시잖아요?” 
“공부라는 게 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니. 네가 하고 싶어서 해야 공부가 되지. 네가 대학 가고 싶으면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단다.”
“엄마는 만날 똑같은 말만 하시네요.”


어머니는 공부에 대한 소신이 투철했다. 공부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해야겠다는 동기와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다른 어머니들이 자기 아들 공부하는데 방해되니까 경대를 놀러 오지 못하게 해도, 어머니는 경대 친구들이 오면 반갑게 맞아주었고, 냉장고를 청소할 정도로 음식을 몽땅 꺼내 한 상 차려주고 놀다 가게 했다. 


경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철이 들었는지, 어머니의 교육 방식에 대한 의문을 버리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세상에 엄마 같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엄마가 왜?”
“친구 엄마들은 놀러 가면 라면 밖에 안 끓여줘요. 공부하라면서 빨리 집에 가라고 해요. 근데 엄마는 배불리 먹게 해주고 친구들을 편하게 대해줘요. 이렇게 인자한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경대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경대가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아주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내. 집에도 데려 오고. 맛있는 음식 많이 해줄게.”


경대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경대에게 더 많이 못해준 것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아프다. 가끔 어머니는 집안에 불화가 있을 때 경대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도 마음이 쓰인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면 집안의 불화까지도 모두 추억거리가 되지만 경대는 그런 추억조차 가족들과 나누지 못하고 먼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집 정원에서 아빠와 함께
경대를 잃고 슬피 우는 어머니

008. 아무나 할 수 없는 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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