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03. 경대는 장군감

이동권 2021. 11. 15. 13:16

백일사진

강경대는 1972년 2월 4일, 하월곡동 산동네에서 동백꽃이 첫 움을 트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경대가 태어난 동네는 당시 민중의 척박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3선 개헌1)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사탕발림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강요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조국의 근대화’와 ‘백억 불 수출’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경대가 태어난 날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갑자기 큰 눈이 내렸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영원한 책무와 사명을 양어깨에 짊어지게 될 것을 예감한 듯 찬란한 눈송이가 하염없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스며드는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복덩이를 기다리는 즐거움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첫 아이로 딸을 낳은 뒤 은근히 아들을 바라던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가 왠지 마음에 걸려 눈이 내리는 하늘을 자꾸 쳐다보았다. 


‘별일 없을 거야. 눈이 무슨 대수야.’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갑자기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산통을 느꼈다. 첩첩이 쌓인 책에 책장 받침이 휘어지듯이 아랫배를 짓누르는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 내려갔다. 


어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여보. 아이…….”


시간이 지날수록 뱃속 아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어머니는 첫 아이를 낳았던 경험을 거울삼아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산파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뱃속에서도 어미를 편하게 해 줬던 아이’여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조심할 일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어머니는 택시를 타고 산파 집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병원이 많지 않은데다 전반적으로 경제사정이 어려워 대부분 산파가 병원을 대신해 아이를 받았다. 


어머니는 택시 안에서 참을 수 없는 복통을 느꼈다. 양수가 터지고 핏줄이 발끝까지 뻗치기 시작했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려움 같은 것이 엄습했다. 


‘여기서 낳으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하지만 부산을 떠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바보스러운 짓이었다. 오히려 급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출산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통을 참았다. 그러나 갑자기 아랫배 밑으로 아이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절박하게 외쳤다. 


“여보, 아이가 나오려고 해요.”
“좀만 참아요. 다 왔어요.”
“…….”
“기사님 빨리 좀 가주세요.”


아버지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것처럼 정신없는 목소리로 택시 운전사를 재촉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속력을 냈다. 어머니가 이를 악물고 지르는 소리가 깊고 강해질수록 택시는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이 겨울처럼 조용해지더니, 어머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악.”


경대는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그런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경대를 보며 외쳤다. 


“아들이다!”


기쁨도 잠시, 이 사태를 예상치 못했던 택시 안의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기사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순식간에 태어난 이 복덩이를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산파가 서둘러 아이를 받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될까봐 급히 목욕부터 시켰다. 흔하게 겪는 일이 아니었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산파는 아이의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에서 어미젖을 바라는 간절함을 느끼고 안도했다. 순산(順産)이었다. 아이도, 산모도 모두 건강했다. 


산파는 어머니 옆에 경대를 눕히면서 말했다. 


“이놈 장군감이네. 참 잘 생겼다.”


어머니는 반쯤 감긴 눈으로 아이의 얼굴을 봤다. 


반짝이는 눈, 야무진 입술, 뽀얀 피부, 솜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어여뿐 내 강아지.’


어머니는 몸이 힘들었지만 일시에 피로가 싹 가셨다. 마술에 걸린 듯 두 눈이 번쩍 떠지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한없이 기뻤다. 


어머니는 행복한 마음에 활짝 웃으면서 산파에게 물었다.


“어디를 보고 잘 생긴 것을 아세요?”
“하루에도 몇 명씩 아이를 받는데 왜 몰라요. 정말 잘 생겼어요. 듣기 좋으라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산파는 미심쩍어 하는 산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 칭찬은 갓난아이의 오관과 뼈대를 보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오랜 경험을 통한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기 자식이 그토록 고귀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싫어하는 어미가 있을까. 어머니는 산파의 얘기가 그저 고맙고 흐뭇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에 빠졌다. 경대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미묘한 표정으로 까만 눈동자를 끔뻑이며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경대 할머니는 산통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가장 귀엽고, 성실하기까지 했던 막내아들의 자식이어서 그런지 손주를 보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뛸 듯이 기뻐하며 며느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경대가 몸을 뒤집고 미음을 먹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팔을 부여잡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 경대처럼 건강하고 잘난 아이를 하나 더 낳으면 어떻겠니?”
“생각해 볼게요.”
“그러지 말고 하나 더 낳아라. 둘은 부족하단다. 아이가 집안의 기둥이야.”


대개의 노인들이 그렇듯이, 노인들에게 아이는 힘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핏줄의 근원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이며, 자손이 늘어나는 것은 늙어가는 자신을 위로하는 선물이자 자신의 인생을 치하하는 훈장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숙고를 거듭했다. 시어머니의 당부처럼 ‘하나를 더 낳아서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나라도 제대로 키우고 싶었고, 그마저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민 끝에 아이 욕심을 버렸다. 아이 둘을 남 못지않게 잘 키우는 것이 중요했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산아제한 캠페인2)이 한창일 때여서, 셋째를 낳으면 사회·정책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아이에게는 내 변함없는 사랑을 솔직하게 고백할 거야. 불행의 그림자가 닿지 않은 삶으로 이끌어 건강하고 씩씩한 사내아이로 키울 거야.’ 


아버지의 마음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둘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아버지는 정관수술을 받으면 예비군 훈련에 빠질 수 있다는 말에, 기회다 싶어 수술을 받았다. 당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에게 예비군 훈련이 있는 날은 적잖은 부담이 됐던 것이다. 


경대는 이렇게 강민조, 이덕순의 외아들이자 누나 강선미의 남동생이 됐다.

 

 

 

1) 3선 개헌은 1969년 박정희가 대통령을 3선 연임하기 위해 국회에서 변칙 통과시킨 개헌안이다. 박정희는 3선 개헌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72년 이후 유신체재를 통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2) 정부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인구 감소를 위해 출산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대대적으로 산아제한 캠페인을 벌였다. 산아제한 캠페인 당시 대표적인 표어로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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