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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감단직 노동자 - 우리는 하인, 머슴이 아니에요

건물의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 건전한 정신과 태도가 실존하는 증거는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고 양심의 가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편하게 쉬고, 일하며, 삶을 찬미할 수 있는 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있어서다. 가까운 지인은 아파트 경비원이다. 언제나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라고 입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넉살 좋은 할아버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조금은 변했나 싶었지만 웬일인지 더욱 인사성이 밝아졌다. 아파트 주민들의 목소리가 드세진 까닭이다. 2007년 무렵이었다.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시행돼, 경비원들에게 법정 최저임금액의 70%를 지급할 때부터다. 이전에는 임금이 50여 만 원에 불과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3분의 1가량의 경비원을 해고하면서 임금인상분..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9. 로프공 - 18㎜ 외줄이 밥줄이에요

고층빌딩에 매달려 청소하는 사람들 나와 내 가족의 건강과 영화에만 매몰된 채 깊은 행복감에 빠져버리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 이웃의 노고에 대해 얼마나 애쓰고 생각해 줄까. 거무스름한 먼지가 구름처럼 도시 하늘을 뒤덮고 있다. 메뚜기 떼처럼 지나다니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와 매연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빌딩들도 이것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매일같이 별의별 먼지들이 달라붙어 버섯처럼 커져간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건물 안에 무엇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빌딩들은 가끔 로프공들의 손을 빌려 목욕을 한다. 먼지가 쌓인 상태에서 비가 내리면 건물 외벽이 블랙커피 색으로 변하면서 더욱 많은 먼지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청소할 시기를 놓친 빌딩 외..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8. 사회복지사 -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전문 직업인이에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들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고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덕망은 쌓인다. 하지만 경박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은 우리 이웃과 함께 동화돼 살아가는 것뿐이다. 깡마른 나무에 불꽃이 탁탁 튀자마자 순식간에 벌건 불길이 치솟았다. 기름을 약간 부어놓았는지 불은 금방 나무에 옮겨 붙었다. 군고구마를 손질하던 한 젊은이는 손잡이가 달린 불쏘시개로 나무를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바람을 넣어 불을 지폈다. 행인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뜻한 숄을 걸친 한 아주머니도 훈훈한 기운이 싫지 않은지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몸을 녹였고, 시장 모퉁이에 서서 마른기침을 내뱉던 한 노인도 군고구마통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7. VIP 수행비서·운전기사 - 안전과 보안이 최우선이에요

VIP 모시는 사람들 생활에서 기분을 전환하고 일상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니라 소박한 기쁨이다.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 해도 무엇이 문제이랴. 두 시간이 지났다. 승용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고, 잠을 자는 것도 지겨운 일. 박기범 씨는 날이 어두워지자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와 가슴을 펴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주차장 한편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박 씨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두 다리를 가지런히 쭉 뻗어 위아래로 엇갈아 흔들었다. 하지만 VIP 운전기사 경력 10년에 생활교양은 기본. ‘누구 집 운전기사가 이상하더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몸단속을 했다. 박 씨는 한때 이런 환경이 적응이 안 돼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6. 배전선로 기술자 - 전선 잘못 만지면 죽어요

전봇대에 오르는 사람들 왜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될까.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날이다. 당신은 정녕 이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가. 어스름한 밤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불빛이 하도 고와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뾰족한 전주에 볼품없이 매달린 작은 백열등이었다. 낮에 보았을 때는 메마른 나무 돌기처럼 보기 흉한 전구에 불과했다. 녹슨 철 기둥에 매달린 간판과 나란히 걸려 있어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밤에는 달랐다.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암흑과 같은 지하실에서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름다웠고, 시원한 밤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금빛 반딧불처럼 신비로웠다. 늦은 밤,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검고 깊게 뚫려 있는 이 좁은 길을 환하게 내리쪼이는 ..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5. 자동차 영업사원 - 최고로 멋진 직업이에요

잡상인 취급받는 사람들 말을 잘해서도 아니고 수완이 좋아서도 아니라 마음이다. 정성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둡고 칙칙한 마음을 씻어주는 따뜻한 노래처럼 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 사람들을 더없이 좋아했다. 생김이 어떠하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면이 성숙함으로 꽉 차 있어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목소리는 가늘지만 신중하고, 눈은 활력이 없어 보이지만 맑으며, 돋보이지 않지만 주위 사람을 돕는 성정을 지닌 인물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은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고결한 상대였다.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천방지축인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늘 꿈속에서..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4. 우편배달부 - 결혼 못 한 노총각 많아요

인간의 정을 배달해주는 사람들 모두가 잠든 새벽 힘든 몸 일으켜 오토바이를 탄다.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르게 점심을 먹고 여유 있게 차 한 잔 할 시간도 없이 달리고 달려 우리 이웃에게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을 전한다. 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스러운 일꾼인가. 깊은 잠에 떨어졌다. 자리에 눕자마자 이렇게 쉽게 잠에 빠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허리가 아파 뒤돌아 눕거나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기 위해 잠깐 잠에서 깼을 뿐, 사나운 지진에 유리창이 산산조각 부서진다 해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잠은 물리치지 못했으리라. 새벽녘에는 보리밭에서 흙을 돋우는 농부와 마을 어귀를 따라 길게 뻗은 수로가 나타나는 짤막한 꿈을 꾸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처럼 한꺼번에 빛이 쏟아지면서 나타나는 이미지였지만, 어찌나 또렷..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3. 교도관 - 우리가 악당인가요?

재소자들과 함께 절반의 징역을 사는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잔인해도 유순하고 정직한 마음은 통한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주 보고 있는 교도관과 재소자. 이들 사이의 창살이 인간을 나누는 경계선이 아니었으면. 교도소에는 두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다. 서로 진술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교도관이나 수감자 모두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은 교도관이, 내일은 수감자가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돼 연일 뉴스에 오르내린다. 공교롭게도 교도소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산교도소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을 상습적으로 집단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용소 내의 인권유린을 감시하는 CCTV는 무용지물. 수감자가 폭행당하는 장면이 녹화된 자료들은 모두 교도관들에 의해 삭제된 상태였다. ..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2. 조선족 식당아줌마 - 말투는 달라도 같은 동포예요

외국인이라고 차별받는 사람들 사랑해라는 말을 같이 쓰는 우리 동포들이 조국을 찾아와도 진정으로 껴안아줄 사람이 없네. “아저씨.” 식당에서 억센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 여자가 창밖으로 몸을 젖혀 한 사내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큰일이 난 사람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계속 “아저씨.”를 외쳤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그가 식당에서 뭔가를 먹고 계산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약간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틀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운 하늘처럼 푸르무레한 냉기에 잠겨있다. 그는 여자와 몇 마디를 나눈 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흔들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뛰어나와 사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돈을 받아 들고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식당에서 만난 조선족 아줌마 정연숙 씨..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1. 시각장애인 안마사 - 손을 꼭 잡아주세요

결리고 쑤시는 육체를 풀어주는 사람들 기나긴 노력에도 대답이 없어 낙심도 하고 험난한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세상에 떠밀려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억울한 일이 되는구나. 새하얀 눈이 휘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하얀 벚꽃 같아 잠시 마음이 훈훈해진다. 꽃가게에는 계절을 잊은 장미들이 만발했다. 풍성한 꽃잎이 하나둘씩 벌어지면서 풍성한 향기를 늘어뜨린다. 어둠이 땅에 깔리자 거리를 뒤덮은 네온사인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쏟아낸다. 그것이 그렇게 멋지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날은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아니, 이날의 거리 풍경은 모든 것이 인상 깊고 뜨겁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축복인가. 수수께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10. 무당 - 무당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길흉을 점치고 굿 하는 사람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해버리는 세상. 이렇게도 억울하고 서글픈 누명을 쓰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또 있을까.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대나무, 그 끝에 매달린 하얀 천이 연방 바람에 휘날렸다. 그 밑으로는 어린아이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드러낸 채 뛰놀았고, 하얀 털이 곱상한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휘저으며 그 아이를 뒤따랐다. 조금 큰 아이들은 긴소매를 팔락거리며 잔심부름에 여념이 없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앉은 평상에는 노인들이 둘러앉아 특별한 소식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뭔가를 주시했다. 겉으로만 보면 분명 잔칫집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신중하고 무거워 웃을 때도 입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북적북적한 마당을 지나 태평소 가락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단아한 한복..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09. 포장마차 주인 - 포장마차요? 쉽게 보지 마세요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차가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면 객실에도 어둠이 깃든다. 선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이 힘들어한다면 이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삶도 점점 야만적이고 살벌하게 될 것이고. 거대한 쇼핑센터가 밀집한 동대문. 이곳의 밤은 한낮처럼 부산하다. 도로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밀려드는 자동차들이 가득하고, 상점 앞에는 싼값에 좋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는 동대문운동장 건너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 포장마차들은 의류 상가를 기점으로 빙 둘러 진을 치고 있다. 이곳의 밤풍경은 다양하다. 쇼핑을 끝낸 연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들을 유인하는 포장마차 아주머니들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08. 트럭 노점상 - 길 위에서 삶의 희망을 팔아요

길 따라 물건 파는 사람들 치열한 삶의 현장과 마주치면 한층 더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집으로 가는 길, 가슴이 훈훈해지는 이유도 당차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노고 때문이리라.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다.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만이 활달하게 장난을 치며 걸어 다닐 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어른들은 길을 물어도 못 들은 척 상대도 해주지 않을 표정이다. 서서히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다. 잠시 내리다 그칠 비가 아니었다. 점점 옷이 축축해지자 자연스럽게 입가가 실쭉해졌다. 트럭 짐칸에 야채나 과일, 생선, 화장품 등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행상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 종일 걸은 탓이다. 첫날, 정말 많이 걸었다. 집에 들어와 간신히 차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자..

책/밥줄이야기 2021.04.07

007. 숙박업 종사자 - 다른 일처럼 하나의 직업일 뿐이에요

음란하다는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사람들 밤마다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은 벽에 기대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졸면서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홀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아 남몰래 간직한 그들의 아픔을, 이제는 반갑게 맞아들여라. 새벽 2시. 영등포 유흥가 뒤편 골목길에서 시끄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넷이었다. 검은색 양복에 짧은 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와 금목걸이. 얼핏 봐도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새였다. 술에 취한 얼굴로 노랫가락을 늘어놓던 이들은 G모텔로 들어가 아치형 창문을 두세 차례 심하게 두드렸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는 여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깜짝 놀라 일어난 그녀는 숙박료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5만 원이라고 말했다. “5만 원. 왜 이렇게 비싸 씨발. ..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6. 연극배우 - 인간 구실도 못하고 살아요

헝그리 정신으로 무대를 지키는 사람들 연극배우를 고무하는 것은 오로지 밥값만은 아니다. 하지만 밥값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연극배우의 삶을 화려한 무대 위로 한정하지만 이들의 대부분 삶은 무대 아래에 있다. 화려한 무대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의 시간이. 밝고 야무진 성격이었지만 눈빛만은 늘 우수에 차 있었던 친구. 그는 술에 취하면 업소에 나가 기타를 연주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심각해지곤 했다. 음악인으로서 빛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꿈은 접어두더라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단란주점에 나가 밴드를 했던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대에 선지 10년이 지나도 자기 용돈벌이조차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5. 누드모델 - 누드가 왜 외설로 보이죠?

발가벗어도 야하지 않은 사람들 오늘도 힘겹게 옷을 벗는다. 연갈색 살갗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외면에 지배되지 않는 진실을 믿고 삶 그대로의 모습을 따른다. 이 얼마나 강렬한 동경이며 전투인가. 금방이라도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올 것 같은 소묘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재 받침대와 패널(Panel)에 눌어붙어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 바닥에 나뒹구는 톰보(Tombow) 4B연 심과 지우개 똥, 물기름이 앉아 반질반질해진 이젤과 고정 핀, 사방에 빙 둘러 설치된 사물함과 그 위에 놓인 석고상.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는 냄새였다. 오후의 구름이 걷히고 희끄무레한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자 면이 있는 공간마다 두껍게 쌓여 있는 먼지가 확연하게..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4. 무명가수 - 얼굴은 무명이지만 노래는 유명해요

노래가 좋아 부르는 사람들 저 멀리서 흥겨운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자 웃음을 잃은 노부부가 어깨춤을 들썩인다. 이 노래야말로 슬프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명약이로고. 애절한 트로트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사라지는 기관차의 기적소리처럼 노랫가락이 구슬프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돈 벌러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날은 벌거숭이가 된 아카시아 숲과 코스모스 꽃잎이 길가를 뒤덮었고, 밭 한 귀퉁이에 있던 할아버지의 묘지 군데군데가 추위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울적해진 당신은 웅덩이가 파인 이랑을 건너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도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아들이 보고 싶으면 부르는 노래 ‘찔레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연예인 중에서도 ‘가수..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3. 바텐더 - 바텐더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은밀한 미각과 휴식을 선사하는 사람들 삶이란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스스로 기쁨과 슬픔을 다스리는 치유력도 있지만 가끔은 유쾌하고 탁월한 기교가 필요한 날도 찾아온다. 감미로운 술 한 잔이 그리운 날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도시의 생동감은 곳곳에서 넘쳤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곳에 앉아 피곤한 맘을 달래고 싶었다. 짐짓 사소하고 진부한 이유일지 모르겠다. 자질구레한 것까지 낱낱이 따지고 캐물어야 하는 내 직업이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면 손가락질하려나. 역시 시시콜콜한 이유다. 어떤 일이든 쉽지 않고, 고단한 노동 없이 풍성한 열매를 딸 수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저 그렇고 그런 기분에 젖어들 때면 술 한 잔 마시면서 털어버리는 게 내 스타일이다. 이래저래..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2. 의문의 죽음들 02 - 비밀회동, 장준하 죽음 하루 뒤

소총을 든 군인들이 효자동 삼거리 한가운데 간이 막사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계를 섰다. 무궁화 공원 앞에는 검은 양복을 쑥쑥 빼입은 경호원들이 청와대 출입차량을 검문했다. 경호원들은 차량뿐만 아니라 효자동 인근을 거니는 일반인들도 불러 세웠다. 검문은 형식적이지 않았다. 안면이 있거나 용무가 확실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몸을 더듬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얼굴도 여러 번 대조했고, 가방 안에 든 물건도 꼼꼼히 살핀 뒤 통과시켰다. 지난해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 이후 검문검색이 강화된 탓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효자동 인근을 지나갈 때면 검문을 피해 일부러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어떤 꼬투리를 잡혀 고초를 치를지 몰랐다. 검문소 앞에 안테나를 구부러뜨린 군용 지프차 세 대가 연달아 나타났다..

001. 의문의 죽음들 01 - 류노스케의 밀실, 비열한 일족

예리한 칼로 도려낸 종이들이 책상 위에 널렸다. 천박한 문양의 욱일승천기와 누렇게 바랜 일본 군가 악보, 일본 천황의 작위를 받는 조선인 사진도 주절주절했다. 제일 위에 놓인 것은 작은 활자가 빼곡히 들어찬 신문 쪼가리였다. 쪼가리 오른쪽 모퉁이에는 붉은 사인펜으로 눌러쓴 별표가 유난히 선명했다. 한신일보 김유진 기자의 기사였다. 류노스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1975년 8월 18일자 헤드라인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긴급조치 석방 8개월 만에 장준하 실족사’ ‘함석헌 등 각계 재야 지도자들 장례식장 줄이어’ ‘산행의 달인이 왜 벼랑으로? 타살 의혹 제기도’ 류노스케의 뺨은 뼈만 남은 듯 핼쑥했지만 며칠 잠을 못 잤는지 피부가 부숭부숭 부어올랐다. 솜털이 송송히 돋은 목덜미는 발그레했다. 손가락으로 ..

한 판, 한 판 숨을 몰아쉬며 - 못난 선배가 되지 말자

한창 국정교과서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그 무렵, 아마도 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른다. 우연히 들른 동네서점에서 집어든 이 「돌베개」 책은, 세월호 사건 이후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나에게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고, 한 번 읽고 책장을 그대로 덮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엔 온통 진흙 밭을 뒹구는 장면, 타는 목마름, 목숨을 건 행군 그리고 벅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로 가득 찼고. 그 동안 무심했던 지난 역사의 아픈 상처가 지금도 채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연필을 쥐고, 조각칼을 잡고, 나무를 어루만졌다. 한 판, 한 판 숨을 몰아쉬며 걷기 시작했다. 아니 함께 철조망을 뛰어 넘고, ..

스토리

1975년 8월 20일 정상일 중령(보안사령부 수사과장, 현 기무사)이 죽는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지 3일 만이다. 이 사건은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자살로 종결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정 중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부검소견서를 낸다. 강동일 형사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정 중령의 수사를 방해하자 그의 죽음 뒤에 어떤 비밀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정 중령의 애인 소영은 강동일 형사를 은밀히 만나 정 중령이 윗선에서 지시한 특수한 임무 때문에 죽기 일주일 전부터 무척 괴로워했으며, 그 임무가 아마도 장준하 선생과 관련된 것 같다고 추측한다. 그날 밤 소영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장준하 선생과 정 중령의 잇단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정 중..

왜 지금 장준하인가? - 기무사에 칼끝을 대다

예정된 목표를 쉽게 변경해 본 적이 없었다. 안일하게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서였고, 말만 앞세우는 목표는 결과가 초라해서였다. 「칼로 새긴 장준하」는 정말 목표에 없는 집필이었다. 막걸리가 술술 들어가자 덜컥 장문의 글을 쓰겠다고 해버렸다.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대충 따져 봐도 원고지 1,000매가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시중에 풀린 장준하 선생 관련 책과 비교될 것도 뻔했다. 다음날 숙취 때문에 골이 쑤실 때 술집이 떠나갈 듯 외쳤던 결의가 생각났다.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발등을 찍고 싶었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20대부터 컴퓨터 테크니컬 라이터로 책을 냈고, 대기업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글을 쓰며 「방랑」이라는 책자를 계속 발간했고, 10년 넘게..

칼로 새긴 장준하 - 2019년 세종도서

「칼로 새긴 장준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적시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도록 도왔다. 다소 무겁고 재미가 떨어질 수 있지만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사색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기 위해 다큐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칼로 새긴 장준하」에서 장준하 일대기 부분은 장준하 선생이 직접 쓴 「돌베개」를 참조했다. 그러나 모든 감정 표현과 상황 설명, 일부 등장인물 또한 창작해 반영한 허구임을 밝힌다. 이 책이 만약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돌베개」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눈곱만큼도 「돌베개」를 따라갈 수 없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칼로 새긴 장준하」에 실린 판화는 「돌베개」의 내용을 100% 재현한 진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6천리 항일대장정을 따라가며 한 땀 한 땀 ..

누구도 말하지 않은 바다이야기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쓸쓸함이 어리면 바다로 갔다. 무한히 뻗은 길을 따라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파도가 바람을 물어다 주는 바닷가, 운무가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 이른 새벽에 바다로 나가는 어부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바다는 지독한 사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생명력 넘치는 치유를 선사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벗이었고, 끝없는 정화의 노래를 들려줬던 바다와의 대화이자 기행이며 헌사다. 늦은 밤 빌딩 숲을 거닐다 밤하늘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삶은 무엇인지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나아가 나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해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잦은 폭주와 적막한 고독이 이어졌..

개망나니의 사색 - 크로키와 함께 떠나는 바다 여행

바다로 떠난 여행은 나와 영원히 나눠야 할 대화로 채워졌다. 영혼의 부르짖음이나 자기반성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내가 저질렀거나 목도했던 고통, 횡포, 슬픔 같은 것, 사회의 부조리가 양산하는 것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먼저 살폈다. 육체는 어딘가에 벗어 놓고 정신만 돌아다닌 여행, 내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과의 싸움이 바로 바다로의 여행, 개망나니의 사색이었다. 연평도는 천혜의 자연이 서로 몸 부대끼며 특유의 정취를 연출했다. 넘치지 않았지만 부족한 것이 없는 곳, 여행지로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편하게 위로받고 휴식할 수 있는 곳, 온정이 넘치지만 각박한 삶 또한 엿보이는 곳, 특별히 무엇이 아름다운지 얘기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이 서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연평도는 여행의 참 맛을 느끼게 ..

내 마음속의 벗, 강경대

1991년. 나는 신입생 수련회조차 빠질 정도로 학교에 소홀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학 새내기였다. 뭔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곳이 꼭 불편을 참아야 하는 학교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여정 여정마다 간격을 둬야 차갑고 잔혹한 고통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좀 더 쓸쓸하고 고독한 것에서 성숙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생활 이외에 뭔가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민중문화운동단체에 들어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포스터 때문이었다. 포스터는 두 주먹을 움켜진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몇몇 청년들을 거칠게 파놓은 판화였다. 섬세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이미지였지만 왠지 모르게..

강경대 평전 - 1991년 5월 투쟁의 꽃

故 강경대 열사는 1991년 4월 26일 학원 자주화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시위 도중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사복 경찰들의 쇠파이프에 두들겨 맞아 심장막 내출혈로 숨을 거뒀다. 열사의 주검은 노태우 독재정권의 실체를 만천하에 밝히는 계기가 됐으며, 그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 ‘5월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나는 이 책을 고리타분하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책이란 쓰는 사람이 만족하는 것보다 읽는 사람이 배우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이 책을 ‘부드러운 평전’이라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나는 인터뷰와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으며, 비록 이야기는 내 방식대로 풀었지만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

002. 때밀이 - 때밀이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벌거벗고 일하는 사람들 고단함을 풀어주는 노동마저 쾌락으로 치부했다면 삶은 얼마나 괴롭고 재미없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몸을 맡기는 순간에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 일하는 때밀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0년 동안 때를 밀면서도 아들에게만은 자신의 직업을 숨기는 한 때밀이의 애환처럼, 타인의 삶에 손가락질하고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못난 이웃들을 위해서다. 또 사지가 꽁꽁 묶인 범죄자처럼 차디찬 세상의 이목에 갇혀 사는 때밀이의 삶을 통해 소중한 노동의 의미를 발견해보고자 한다. 나는 때밀이를 만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때를 밀어봤다. 때를 밀어봐야 때밀이라는 직업을 조금이라도 이..

책/밥줄이야기 2021.04.03

001. 도부 - 우리가 백정이라고요?

소·돼지 잡는 사람들 천년을 살아온 고목의 옹이처럼 천 겹 만 겹으로 맺힌 도부들의 애환을 어찌할거나. 구워진 고기가 한 소쿠리 식탁에 올랐다.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알싸한 쌈장에 찍어 먹었다. 유명한 음식점에서 파는 일품요리는 아니지만, 지인들과 함께 먹는 고기 한 점에 무거운 일상은 웃음이 됐다. 요즘 고기 생산의 ‘잔인함’에 대해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다. 가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가축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이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살장에서 일하는 도부들까지 천하게 생각한다. 많고 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이면 동물을 죽여 먹고사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백정에 대한 천대는 아직도 존재하는 셈이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들조차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이들에게 곁눈..

책/밥줄이야기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