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18. 투쟁의 한길로

이동권 2021. 11. 15. 15:26

경대에게 대학은 배움의 천국이었다. 사회의 모순을 알고자 동아리 문을 두드렸고, 집회에 참가했으며, 선배들과 밤새 갖는 술자리는 또다른 배움터이기도 했다.

선미는 경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북과 장구를 곧잘 따라 쳐 함께 동아리 생활을 하길 원했다. 하지만 경대는 선미가 활동하던 동아리 ‘탈터사랑’이 아니라 노래패 ‘따람’에 가입했다. 누나의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경대는 무엇보다 여러 가지 배움을 통해 자신의 갈증을 풀고 싶었다. 경대는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낼 만한 연결고리를 필요로 했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일신우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길 원했다.


동아리 선배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으로 철철 넘쳤던 경대의 본모습을 처음부터 알아봤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내기 중에 괜찮은 애 있더라.”
“누군데?”
“경제학과 강경대.”
“왜?”
“동아리 가입원서 봤어? 우리 동아리에 지원한 이유가 ‘사상이 투철한 동아리’라서 지원했대.”
“뭐라고? 사상이 투철하다고?”


선배들은 적잖게 당혹스러웠다. 경대가 그렇게 말한 속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 없는데다 후배가 실망하지 않도록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경대야, 동아리에 새로 들어왔는데 신고식 해야지.”
“어떻게 할까요?”
“막걸리 한 통을 코펠 그릇에 가득 채우고 ‘원샷’ 하는 거야.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선배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농민가를 부르며 경대의 동아리 가입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경대는 ‘따람’ 뿐만 아니라 다른 동아리에도 곁눈질을 했다. ‘탈터사랑’을 비롯해 시사만화모임인 ‘시만화’ 등에도 자주 들려 정회원이 아니면 준회원이라도 시켜달라고 졸랐다. 대단한 힘을 가진 무사도, 고귀한 정신을 가진 학자도 배움 앞에서는 쌍수를 들고 머리를 조아린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많이 배우고, 경험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리고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경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아리 방에 들려 선배에게 기타와 노래를 배웠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 것은 물론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토론회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가끔은 동아리 선배들과 어울려 학교 앞에 있는 주점, ‘까치집’, ‘오계절’ 등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얘기도 나눴다. 술상에 올라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학원자주화와 노태우 정권에 관한 것이었다. 때론 골치 아픈 공부이야기도, 알다가도 모를 연애 이야기도 안주거리로 올랐다.


경대는 술이 오르면 자신만의 애교 필살기를 선보였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운 춤을 추면서 만화 주제곡을 불러 주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술을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에 맞춰 즐길 줄 알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배를 두드리며 뽕짝을 구성지게 뽑곤 했다. 


가끔 경대는 술 때문에 정신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실수를 하거나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또 술자리에서 ‘007빵’ 등 어떤 게임을 해도 잘 걸려 얻어맞는 일이 많았지만 헤헤 웃으며, 거리낌 없이 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친구들은 경대와 놀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순진하고 순수한 경대를 바라보면서 친한 벗으로 삼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쉽게 자신을 잊고 타인만 생각하는 경대를 보면서 걱정도 들었다. 


“너 같은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냐. 너 생각도 좀 하면서 살아라.”


경대는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에 별 관심이 없는 듯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난 괜찮아. 너희들하고 있으면 너무 좋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공부하고, 싸우면서 열심히 살자.”


경대는 경제학과 1학년 과대표였다. 책임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경대는 선배들보다 동기들을 더 잘 챙겼다. 경대는 수첩에 같은 학과 동기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누구와 언제 만났고, 누구와는 어떤 얘기를 아직 하지 못했는지, 누구의 고민은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살폈다. 또 수업에 들어오지 않은 동기들에게는 과제를 알려주고, 시험 때는 중요한 자료를 구해 나눠줬다. 


잔정 많은 경대는 화통한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경대는 종종 여자 동기들이 버스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하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털 털어서 집에 보내고 동아리 방에서 잤다. 가끔 동아리 방에서 잘 땐, 선배들을 붙잡고 막걸리 한 통만 더 마시자고 조르곤 했다. 선배들은 경대의 유쾌한 얼굴을 보고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열사 이름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정을 나눴다.


경대는 ‘따람’의 기장을 뽑을 때 후보로 나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경대는 이날 속상한 마음에 막걸리 한 통을 ‘원샷’한 뒤 미련 없이 잊어버리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다. 


경대가 술을 마실 때마다 자주 부르는 노래는 ‘투쟁의 한길로’ 였다. 경대는 이 노래를 좋아해서 손수 악보를 만들어 노래집 첫 장에 붙이고 다녔다.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 되어
조국을 등질 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
풀 한 포기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식민의 땅 아들(딸들)아 어서 일어나거라.
붉은 태양 떠올라 깃발이 서면
탄압의 총소리 나를 부르는 함성.
나서거라 투쟁의 한길로 산산히 부서지거라!
그대 따라 이 내 몸도 투쟁의 한길로.

 


경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기분이 좋아 입 꼬리가 뺨에 붙고 생기가 돌아 불그레해졌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경외하는 시선으로 하늘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경대는 과연 이 노래를 부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경대는 악기는 잘 다뤘지만 노래 솜씨는 형편없었다. 박자감각이 떨어져 남들이 한 번 연습할 때 두세 번은 연습해야 따라갔다. 하지만 경대는 개의치 않았다. 노래는 진정한 친구이자 마음을 대신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노래할 때는 밝은 여름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어린애처럼 표정이 명랑해졌고, 진지한 노래를 부를 때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사를 음미하면서 진심으로 불렀다.


경대는 선배들과 어울리고,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면서 점점 어린티를 벗었다. 어리광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아무런 생각 없이 이리저리 끌리는 대로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부모님께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고 더욱 신중히 행동했다.


“대학가더니 많이 달라졌네. 예전에는 엄마한테 안기기도 잘하더니.”
“엄마. 저도 이제 대학생이에요. 너무 애 취급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품으로 달려들곤 했던 경대가 달라지자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언젠가는 품에서 떠나 한 집안의 가장이 될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잠시 멍하게 경대를 바라보다가 머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아들.”


경대는 새로운 대학 생활에 적응하고, 의젓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운한 표정의 어머니를 모르는 척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섭섭해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다정하게 위로해주었다. 


“저 때문에 엄마가 자꾸 약해지는 것이 염려돼요. 선배들이 제가 좀 더 어른스러워질 것을 당부해서 그런 거예요.”


경대의 따뜻한 성품이 어디를 가겠는가. 어머니는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 다른 아이 같았으면 한 마디 말도 없이 등을 보였을 터였다. 


“엄마는 괜찮으니까 많이 배우고 어른스러워져. 알았지.”


경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학과에 함께 입학한 한 동기를 애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없어서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도 쉽지 않았다. 


경대는 더 이상 가슴앓이 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너, 좋아한다.”
“뭐라고?”
“너랑 진지한 만남을 갖고 싶어.”
“우리 그냥 친구하면 안 될까?”
“너와 특별한 친구가 되고 싶어.”
“난 뚱뚱한 애는 싫은데.”
“…….”


경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내 ‘인연이 아니려니’ 생각하며 그냥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 그녀가 말했던 ‘뚱뚱한 애’ 라는 말이 생각나 참을 수가 없었다. 


경대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엉엉 울었다. 마음도 보지 않고 외모부터 따지는 그녀에게 속상했기 때문이다.


경대는 누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동기 중에 사귀고 싶은 여자 애가 있어서 고백했는데 퇴짜 맞았어.”
“정말? 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누나, 어떻게 하면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어?”
“방법이란 게 있겠니. 언젠가는 너를 진짜로 알아주는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될거야.”


선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랑을 찾는 그날이 오면,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나타나면, 경대는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될 거야.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너라면 분명.’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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