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29. 지역·나이·성별·직업을 초월한 투쟁

이동권 2021. 11. 15. 16:25

1991년 5월 1일 노동자 대회

 

시위 현장에는 여러 가지 홍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책회의 소속 각 단체들과 학보사들은 각종 호외와 속보 유인물을 통해 전국의 투쟁 상황을 알렸고, 학생들은 번화가, 지하철,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배포해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유인물은 딱딱한 글로만 구성되지 않고 만화, 사진 등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변협을 비롯해 전국교수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전국 20여 개 단체들이 잇따라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변협은 ‘시위를 진압할 때 정책적으로 고압 분위기를 조장하고, 은연 중에 불법수단을 쓰도록 고무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이 땅에서 폭력적 권력이 물러날 때까지 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은 ‘노 정권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백골단을 해체하지 않고 대국민 무마용 인책 등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면 이것은 현 정권이 스스로 백색테러 집단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꾸짖었다.


5월 1일에는 노동절 행사와 맞물려 각종 집회와 시위, 평화행진, 문화제, 추모제 등이 전국적으로 개최됐다. 


전국 66개 대학 학생들은 노동절 전야제 행사를 마친 뒤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집회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수업거부를 결의하고 싸우는 학생들도 있었다.


전노협 산하 전체 사업장 노동자들은 노동운동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동시에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강경대 타살 사건과 원진레이온 직업병환자 대량 발생,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등 잇따른 비상 상황에 따른 것이다. 며칠 뒤에는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의문사에 개입됐다는 의혹이 날로 증폭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빠르게 확산됐다. 


목포교도소를 비롯해 대구·안동·대구·마산·순천 교도소 등 시국 재소자들도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어 전국 대학 교수들도 이에 동참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여러 단체에서도 시국성명을 잇따라 발표했고, 종교계에서도 거리시위에 참여해 싸울 것을 결의했으며, 백골단들의 양심선언도 줄을 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6월 항쟁과 같은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질 것이 두려웠다. 들끓는 국민의 분노와 점점 확산되는 반정부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극약처방을 썼다. 대국민 사과문과 후속대책 발표가 그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됐다.


“전환기를 매듭짓고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 가슴 아프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며 이번 일로 국민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데 대해 다시 한 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보다 성숙한 법질서 의식을 갖고 모두가 조금씩 자제했다면 그 같은 안타까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국민은 속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는 형식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죽음의 책임을 시위대에 돌린 것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또 대책으로 내놓은 방안은 백골단 ‘해체’가 아니라 ‘시위진압방법 개선에 대한 노력’에 그쳤다. 이후에도 강경진압이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5월 초까지만 해도 시위는 민주세력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더 많은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몸을 불살랐다. 안동대 김영균을 비롯해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등 많은 이들이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이들의 바람은 박승희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희생으로 투쟁이 더욱 강고해지고 널리 확산되는 것이었다. 


분신이 늘어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걱정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 몸에 불을 붙여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열사들의 몸부림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이었다. 그래서 경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가 아무리 크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는 호소가 끊이질 않았다.


4일 ‘백골단 해체의 날’을 맞아 서울·광주·부산·대구 등 전국 21개 지역에서 학생과 재야·종교단체 인사, 일반시민 등 2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대회가 일제히 열렸다. 백골단 해체의 날을 맞은 시민들은 곳곳에서 전경의 방석모에 꽃을 달아주었고, 시위 도중에 백골단을 잡아 무장해제를 시켰다. 


신세계 백화점 본점 앞에서는 백골단 3백여 명이 시위대에 포위되는 일도 있었다. 시위대는 이들의 가스 마스크를 벗기고 무선 연락을 통제하면서 양심선언을 촉구했다. 몇몇 흥분한 학생은 쓰러진 백골단을 구타하기도 했지만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의 만류로 무장해제당한 백골단들을 조용히 되돌려 보냈다. 


9일에도 전국 곳곳에서 50여만 명이 모여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외쳤다. 이날 시위는 노태우 정권 아래 최대 규모였다. 


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복학생들은 군복을 입고 나와 외쳤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강경대가 죽었다.” 


대학원생들도 재밌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동참했다.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2학기 땐 논문 쓰자.” 


넥타이 부대 등 일반 시민들도 시위대에 적극 합류해 구호를 외쳤다.


“민생파탄 살인정권 우리도 못 참겠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시민들도 시위대를 향해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시위대가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전경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격렬하게 싸우고 있을 때, 시민들은 백화점 뒤 고가도로에 올라가 일제히 돌을 들고 난간을 치며 시위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시위대들은 청와대로 진격투쟁을 벌였다. 그중에서 약 5백여 명의 시위대는 종로 3가 뒷골목으로 빠져 미대사관 뒤까지 진출하며 본진을 도왔다. 


이날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밤 8시경, 광화문 네거리와 미대사관 주변에는 전경 2천여 명과 페퍼포그 10여 대가 배치돼 전두환 정권 때의 계엄령을 보는 듯했다.


대책회의는 평화시위를 원칙으로 세우고, 비폭력을 주장했다. 하지만 5월 4일 이후 경찰의 진압 강도가 더욱 세지면서 더 이상 비폭력을 호소할 수 없는 처지가 됐고, 화염병이 자연발생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심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한편 미국은 반정부시위가 반미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해서 바짝 수그렸다. 그레그 미국대사는 일체 활동을 자제하고 시위 상황을 주시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시위에도 논평을 자제하고 비공식적으로 정부와 정보만 교류했다. 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홀부르크 대사, 87년 6월 항쟁 당시 시거 대사의 교훈 때문이었다. 미국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이 반미시위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면에 나서서 대활약을 펼쳤지만 그럴수록 시민들의 반미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91년 5월 4일 백골단 해체의 날, 을지로 입구
시위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과 시민
1991년 5월 4일 백골단 해체의 날, 백골단 해체를 기원하면서 거리에 만들어놓은 故 강경대 열사 분향소
1991년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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