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30. 시청 앞 노제를 사수하라

이동권 2021. 11. 15. 16:33

강경대 열사 영결식

 

5월 14일 오전 10시부터 명지대 서울캠퍼스에서 故 강경대 열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명지대를 둘러싼 담장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졌고, 흰색과 검은색 깃발이 교차해 꽂혔다. 또 영결식장 앞 본관에는 경대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로 20m, 세로 30m 크기의 검은색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영결식 도중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 명의의 조화가 도착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문에서 돌려보냈다. 명지대 총장은 추도식 비용을 학교에서도 대겠으니 추도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했지만 추도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식이 파행적으로 진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운구행렬은 영결식을 마치고 시청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교문을 나섰다. 운구는 민족예술총연맹 소속 풍물패 2백여 명이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이끌었고, 그 뒤로 대책회의 장례위원회의 대형 깃발과 故 강경대 열사의 영정, 태극기에 덮인 관이 뒤따랐다. 이어서 노란 수건을 쓴 민가협 소속 회원 50여 명과 높이 6~7m 정도의 대나무 만장 2백여 개가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시청 앞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경찰은 연희동과 남가좌동을 잇는 흥남교에서 장례행렬을 막았다. 흥남교를 넘으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청소차에 흙을 담아 도로에 세워 놓았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대열 앞으로 나와 전경들을 향해 소리쳤다.


“경찰과 우리는 똑같은 국민이다. 막는 척하고 길을 비켜 달라. 만약 여러분이 비켜주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이 시신을 안고 뛰어넘어 가겠다.”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구호를 외쳤다. 


“애국전경 동참하라.”


장례행렬은 이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2시간여에 걸친 경찰과의 대치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장례행렬의 선두에 있던 유가협, 민가협 어머니들과 학생들은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써야 했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신촌로터리에는 이미 오전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오후 4시경에는 어느새 그 수가 50만여 명으로 늘어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민들은 건물 옥상, 가로수, 지하철 출입구 지붕 등 장례행렬을 볼 수 있는 곳에 올라가 강경대 열사의 운구를 기다렸다. 하지만 경찰들이 길을 막아 장례행렬이 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했다.


“전두환보다 지독한 놈이네.”
“그놈이 그놈이지 뭘 그래.”
“한열이도 시청 앞에서 노제를 지냈는데.”


장례 행렬은 그야말로 정연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기세가 대단했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신민당 버스를 개조한 방송차량 위에서 남녀가 돌아가며 연설을 하면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문화예술인 10여 명은 트럭을 타고 방송차를 뒤따르면서 즉흥적으로 노래와 구호를 선창해 추모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강경대 열사의 운구는 4시경 신촌로터리에 들어왔다. 시민과 학생들은 팔을 치켜들고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치면서 운구를 맞았다.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세대를 초월한 외침이었다. 


곧이어 故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 도중 서울대 이애주 교수가 가슴을 울리는 곡조를 따라 애절한 진혼굿을 펼쳐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장례행렬은 시청 노제를 위해 다시 아현동 방면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례행렬은 경찰이 저지선으로 잡은 이대입구 아현동 고개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경찰이 흙을 담은 청소차와 와이어로 묶은 바리케이드로 8차선 도로를 촘촘하게 봉쇄해 놓았기 때문이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 던지며 격렬하게 싸웠다. 또 저지선을 뚫기 위해 청소차와 바리케이트에 줄을 묶어 당겼다. 하지만 경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경찰은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난사하며 맞섰다. 


두 시간 동안 피 말리는 공방이 계속되자 대책회의는 더 이상 저지선을 뚫는 것은 역부족이라 판단하고 장례를 연기해 이날 시청 앞 노제는 결국 무산됐다.


아버지는 극도의 슬픔이 몰려와 숨이 멎는 듯했다.


‘시민의 자식을 죽여 놓고 문상은 커녕 사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운구행렬까지 멋대로 이리가라 저리 가라라고 할 수 있는가. 서슬이 시퍼렇던 5공 때도 한열이가 밟았던 길인데, 그때보다 더 처절하게 백주에 아들을 죽여 놓고 못 가게 한단 말인가. 아들의 원혼을 풀어주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비보다 먼저 간 자식을 어떻게 볼까. 부모로서 차마 못 할 일을 했다. 미안하다. 경대야.’


아버지는 시청 앞에서 노제를 열어 경대의 영혼을 달래고자 했다. 많은 시민들과 함께 모여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빌고자 했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아버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행렬은 연세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신을 받아주지 않아 경대의 시신은 영안실 밖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대책회의에서는 냉동실이 딸린 영구차량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사실 경대의 장례식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투쟁의 성과 없이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았다. 하지만 부담이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분신 때문이었다. 특히 유가족들의 부담은 더욱 컸다. 그래서 아버지는 ‘계속 싸우더라도 경대는 보내주자.’고 주장했다.


노태우 정권은 시청에서 경대의 노제가 진행되는 것에 위기를 느꼈다. 이한열, 박종철 열사의 노제가 시청에서 열려 6월 항쟁 당시 싸움에서 졌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노 정권은 결사적으로 시청 앞 노제를 막았다. 


18일 강경대 열사의 장례행렬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발인 예배를 마치고 신촌로터리에서 출정식을 가진 뒤 서울역으로 향했다. 경찰이 불허하는 시청 대신 서울역으로 장소를 옮겨 노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이 이대 입구에서 다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례행렬을 막자 4시간에 걸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보도블록 조각과 화염병을 던졌다. 그리고 바리케이트에 밧줄을 묶어 수십 차례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싸움이 치열했는지 이 일대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루탄 가스가 뒤덮였고 노고산 파출소와 치안본부 분실, 페퍼포구차 등이 화염병에 맞아서 불에 탔다.


대책회의는 대치상황이 계속되자 저녁 6시 40분경 공덕동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내기로 했다. 이날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투신한 이정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꼭 이겨야 할 싸움이었지만 더 이상 장례를 미룰 수만은 없었다.


노제는 열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달래는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노제가 끝난 뒤 유가족과 민가협 어머니, 학생 등은 영구차와 명지대 스쿨버스편으로 모교인 휘문고에 들른 뒤 장지인 광주 망월동으로 향했다.


이날 노제와는 별도로 시청 앞 광장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국민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으며, 도심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5월 14일 명지대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시청으로 향하는 유가협, 민가협 어머님들
신촌로터리에서 故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을 기다리는 시민들
신촌로터리에서 열린 故 강경대 열사 노제
故 강경대 열사의 장례행렬
제폭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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