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19. 명지대의 속사정

이동권 2021. 11. 15. 15:31

1991년 3월 22일 총학생회 진군식

 

1991년 당시 명지대는 서울캠퍼스의 학생 수가 2,000명이 고작인 작은 학교였다. 반면 학생운동은 튼튼했다. 이 시기만큼 명지대에서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없었다. 학생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은 사회 변혁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크고 작은 사업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총집중했다. 특히 새내기가 들어올 때쯤이면 운동에 열심이었던 학생들이 주축이 돼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과학생회에서 일찌감치 사업을 준비하고 새내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명지대는 88년을 전후로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과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18)로 그룹이 나뉘었다. 사업은 주로 NL그룹이 주도했으나 PD그룹에서도 대등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분열’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았다. 각 정파가 실천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운동은 양적, 질적으로 팽창했다. 이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이 등록금협상투쟁이었다. 


명지대의 학원자주화투쟁은 다른 대학과 달리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명지대 서울캠퍼스는 원래 야간대학이었다. 하지만 1988년을 기점으로 학교 측은 주간대학으로 변경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학내에 큰 분규가 일어났다. 용인캠퍼스에 다니는 대다수 학생들이 서울캠퍼스의 주간대학 변경을 반대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학교 집기를 끄집어내 놓고 싸웠고, 서울캠퍼스까지 와서 충돌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서울캠퍼스가 주간대학이 되면 본교였던 용인캠퍼스가 분교가 된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계열별 이원화로 용인캠퍼스는 이공대, 서울캠퍼스는 인문대로 나눴고, 명지대 서울캠퍼스는 주간대학이 됐다. 


명지대는 더 나아가 건설적인 학교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명지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재단, 교수, 학생이 참여해서 학내 예·결산, 등록금 같은 문제들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논의하는 기구다. 이로써 삼자가 함께 등록금을 협상할 수 있는 테이블이 만들어졌고, 공식적인 협상을 통해서 등록금 인상률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등록금 책정과 관련한 협상은 11월 말에서 12월 초, 방학과 함께 시작됐다. 먼저 학교에서 등록금 인상에 대한 합당한 자료를 제시하고, 그 근거가 타당하면 삼자가 합의해 등록금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91년 학교 측은 등록금 인상에 대한 근거 자료만 내놓고는 학생회와 아무런 논의 없이 거의 20%에 가까운 인상률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처음 학생회에서는 그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등록금 인상안에는 큰 사항들만 적혀있어 윤곽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학생회에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충분치 않아 학교를 믿고 넘어갔다. 하지만 항목을 면밀히 따져보니 자료에 문제가 많았다. 올해 집행할 예산이 내년 예산에도 이중으로 기입돼 있었던 것이다. 


학생회는 학교 측에 즉각 시정을 요구했다. 이중으로 기입된 항목은 등록금 인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니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억지로 우겨서 학생들을 굴복시키려고 했다. 결국 1991년 2월 27일 명지발전위원회 협상은 결렬됐고, 학교 측은 합의가 안 된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인상된 등록금을 고지했다. 


곧바로 학생회는 등록 연기를 결의했다. 그리고 학생회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해 학우들에게 등록금을 학교가 아닌 학생회에 내달라고 호소했다. 등록금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학우들의 ‘단합’과 ‘통장’이 필요했다. 많은 학우들이 학생회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강경하게 대처했다. 학생회와의 대화는 물론 ‘예산이중기입 오류’를 바로잡아달라는 의견조차 깡그리 무시했고, 은행에 요청해서 계좌까지 없애버렸다. 은행에서 예금주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계좌를 폐쇄시키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권과 유착한 학교는 무소불위한 힘을 휘둘렀다. 


그 당시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TV토론 프로그램 ‘여론광장’에서 등록금 문제로 명지대 학생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학생회에서는 투쟁을 그릇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성언론의 편향적인 보도가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들은 토론회에 참가하지 않고, 현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MBC와 합의했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현장 인터뷰에는 명지방송국에서 5명, 총학생회에서 5명이 출연했다. 이들은 학교 측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에 대한 생각과 입장을 조목조목 설명했고, 이 인터뷰는 여과 없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전해졌다. 


방송이 나간 뒤 학생회로 시민들의 격려 전화가 쇄도했다. 반대로 학교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학교 측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로 등록금을 고지한 사실은 누가 보아도 정당성을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 커졌지만 학교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학생회를 탄압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3월 19일 ‘민주계단’에서 집회를 열고 총장실 집기를 본관으로 들어내는 투쟁을 전개했다. 전체 학생 2,000명 중 6백여 명이 모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하루가 멀다시피 강경한 투쟁이 계속됐다. 그러나 인상률은 조정되지 않았고, 철저하게 학생들의 요구는 묵살됐다. 명지대의 뒷배를 노태우 정권이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정권의 입장에서 명지대 사태는 단순한 학내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등록금 투쟁을 꺾지 못하면 그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 정권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등록금 투쟁에 강경하게 대처하도록 일선 경찰에 지시했다. 


노 정권은 생존권 투쟁, 노동자 임금투쟁, 등록금 투쟁에 적극 개입했다.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이 정치투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등록금 투쟁의 여세가 4·3, 4·19, 5·18투쟁으로 이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그 규모가 커질 것을 우려해 사전에 뿌리를 흔들어놓으려고 기를 썼다.

 

 

18) ‘삼민혁명론’으로 통일됐던 학생운동은 1986년 ‘자민투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와 ‘민민투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 조직으로 양분됐다. 자민투는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주창하면서 반미자주화를 정점에 놓고 투쟁한다. 하지만 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 학생 투쟁연합(애학투련)’발족식에서 전두환 정권의 잔혹한 물리적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에 밀려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이전의 선도투쟁 조직체계 대신 대중노선의 구현이라는 기치아래 총학생회를 독자적으로 장악하고 각 대학 대표자 협의회인 서대협, 전대협을 발족시켰다. NL은 한국을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파악하고 반제직투, 품성론, 혁명전통에 대해 호소하면서 학생운동의 주축이 된다. 반면 민민투는 신식민지 예속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로 국가권력을 군부파쇼로 규정하고, ‘헌법투쟁’을 민중의 정치의식의 혁명적 분출구로 파악했다. 그리고 ‘헌법제정민중회의’의 오류를 지적하는 CA(제헌의회) 그룹과 결합하고, 비주사NL 및 여러 단체와 연대하면서 PD학생운동의 정파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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