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39. 경민회관

이동권 2021. 11. 17. 16:28

故 강경대 열사 1주기, 망월동을 찾은 가족들

 

어머니는 1993년 2월 광주시 우산동에 대지 125평을 사서 조립식 2층 건물을 지었다. 1층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은 50여 명이 잘 수 있는 방을 마련했다.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은 아니었다. 아들의 뜻을 기리는 마음이었다. 경대가 망월동에 묻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함께 싸워줬던 광주 시민들이 고마웠고, 또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경대가 광주 망월동에 묻힌 것도 사연이 있다.


사람들은 경대의 묘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석 모란공원을 권했다. 망월동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모란공원에 있는 박종철 열사 옆에 가묘 20평을 준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광주 망월동을 고집했다. 찾아가기 쉽고, 자주 갈 수 있는 곳을 원했다면 모란공원을 선택했겠지만 광주는 아버지의 고향이면서 광주항쟁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식당 이름은 ‘경민회관’으로 지었다. 강경대의 가운데 글자 ‘경’과 강민조의 가운데 글자 ‘민’을 따온 것이다. 


어머니는 식당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주부니까 밥은 할 줄 알았고, 학생들이 찾아오면 따뜻한 밥은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덤볐다.


개업식 날, 어머니는 경대의 생일잔치를 겸해서 노인들을 다 불러놓고 잔치를 했다. 노인들은 고마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맘껏 축하해줬다. 그 시절 광주 시민들 중에 강경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광주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강경한 시위가 벌어졌고, 많은 이들이 서로 돕는 마음으로 힘을 보탰다.


경민회관 2층에는 경대 방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광주에 내려오면 맨 먼저 경대 방에 들어가 불을 켰다. 그리고 경대가 방에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경대야. 애비 왔다. 잘 지냈니?”


아버지는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방안을 쳐다보면서 갖가지 집안의 대소사를 얘기해줬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불을 껐다. 그리고 경대가 죽지 않고 함께 살아온 것처럼 말했다.


“잘 시간 됐다. 잘 자라. 경대야.”


경대 방 옆에는 손님방이 있었다. 누구나 편안하게 묵고 갈 수 있도록 만든 방이었다. 


경민회관은 인심이 후해서 일반 손님들도 많이 찾아왔다. 학생들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어머니는 일반인들에게는 원하는 대로 해주었고, 학생들에게는 고기를 맘껏 먹도록 했다. 그 재미로 식당을 운영했다. 하루에 쌀 한 가마니가 모자랄 정도였다. 그래서 경민회관은 계속 적자가 났다. 하지만 학생들,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대접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은 미안한 마음에 밥값을 내려고 했다. 


“어머니. 여기 밥값이요.”
“밥값 안 받아.”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경민회관은 단돈 10원도 받지 않는 곳이니 경대 생각하면서 편히 지내다 돌아가.”


돈을 받지 않은 어머니 때문에 더러 선물을 사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모님께 갖다 드리라며 모두 돌려보냈다. 대신 경대 방에 꽃 한 송이 놓고 가겠다는 마음만은 받았다.  


어머니는 밤에도 식당 문을 열었고, 일요일도 없이 장사를 했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못하는 식당일이었지만 주방아줌마, 홀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 학생과 함께 묵묵히 즐겁게 일했다. 


손님들 중 대부분은 남총련(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김영삼 정부 때도 치열하게 싸웠고, 어머니도 아들과 함께 싸우는 마음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많이 먹어. 밥은 나중에 먹고 고기를 많이 먹어. 그래야 힘내서 싸우지.”


어머니에게 학생들은 자식이었고, 학생들에게 경대 어머니는 부모였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됐다.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면서부터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베풀고 돕는 일이 마냥 줘버리는 희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실천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경대의 뜻을 잇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식당일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는 문득 힘이 들고, 경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운명처럼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지금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다면 참 행복했을 텐데.’
‘아들 잘 두면 팔자가 늘어진다는데, 나는 오그라졌구나.’ 


故 강경대 열사의 3주기 추모제를 한 달 남겨놓을 때였다. 어머니는 새벽에 꿈을 꿨다. 마치 누군가에게 계시를 받은 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한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했다. 


‘아들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은 좋은데 왜 밤마다 한숨을 쉬느냐. 여기를 쳐다봐라. 너의 아들 경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다. 아들 걱정은 그만 하고 인생을 찾아라.’ 


어머니는 비몽사몽 간에 대답했다. 


‘잘 살겠습니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거짓말처럼 창문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들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경대라는 짐을 훌훌 털고 마음을 바꿨다. 경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바깥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주방 아줌마에게 식당 운영까지 맡겨놓고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여행도 가고, 여러 친목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아들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또다시 슬픔이 밀려올까 봐, 주위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마음속에 꼭꼭 숨겼다.


어머니는 광주가 좋았다. 광주 사람들과 만나면 모두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됐다. 민주화에 대한 정서를 서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좋은 데 보태 쓰라며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뜻을 거절할 수 없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다. 5만 원도 5백만 원 못지않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민회관을 정리하고 서울로 온 뒤에는 달라졌다. 경대 생일 때도 뜻있는 사람들만 찾아왔고, 경대 얘기를 하면 꺼려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아예 초대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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