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36. 법정소란죄

이동권 2021. 11. 17. 16:16

구치소에 끌려가는 아버지

 

아버지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은 엄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 범죄자의 죄를 파헤치고, 판사는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내리는 줄 알았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었고, 어떤 경우에도 검사나 판사의 의견을 존중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 법의 잣대가 때론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법정소란죄’로 기소됐다. 7월 4일 경대를 죽인 전경들에 대한 첫 공판이 벌어진 날이었다. 


검사, 변호사 할 것 없이 모두 똘똘 뭉쳐 재판을 일사천리로 끝내려고 했다. 이 사건에 가담한 전경 5명에 대한 신문도 어물쩍 끝내버렸고, 이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고로 서둘러 결론지으려 했다. 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고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거론하지 않았다. 특히 재판 과정 중에 변호사가 사건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려 했다. 또 이 사건을 동네 어린이들이 싸운 것처럼, 장난하듯이 묘사했다. 


“한 대 때렸지요?”
“예.”
“두 대 때렸지요?”
“예.” 
“…….”
“…….”

“강경대가 10m 전방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도망갔기 때문에 쫓아가서 때렸지요?”


아버지는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 격분했다. 경대는 화염병을 들지 않았다. 돌도 던지지 않고 선두와 본대를 연결해주는 연락책일 뿐이었다. 게다가 백골단들이 담을 넘어가는 경대의 발목을 잡아 끄집어 내리고 폭행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는 사건의 원인을 경대가 제공한 것처럼 몰고갔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참을 수 없었다. 


“경대는 화염병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선미도 신발을 벗어서 변호사에게 던졌다. 


판사는 곧바로 휴정을 선언하고 변호사와 함께 줄행랑쳤다. 


경대 가족들과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민가협 회원 10여 명은 계속 법정에 남아서 구호를 외치며 책임자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살인마를 옹호하는 변호인들은 각성하라.” 


법정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경고 한마디 없이 지켜만 보다가 아버지를 기소해버렸다. 이것이 ‘법정 소란죄’의 전부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느새 법정에서 태극기까지 훼손한 죄인이 돼 있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하게 사건 내용까지 왜곡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재판은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항변했다.


“거짓말 재판은 안 된다. 법무부 차관이 나와서 재판을 받게 해 달라.”


다음날 아버지는 박승희 열사의 49제에 참가하기 위해 잠시 광주에 내려갔다. 그런데 신문에는 ‘강 씨가 도망쳤다’고 보도됐다. 형이 확정되지 않아 죄인의 신분도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모함해서 흠을 내려는 노태우 정권의 수작이었다. 


아버지는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어 검사에게 전화했다. 


“일 때문에 광주에 내려왔는데 내가 왜 도망을 가. 이게 무슨 짓이야.”


아버지는 이대로 서울에 가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잡힐 것 같아 광주 망월동과 전남대학교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실 양파를 실은 트럭 짐칸에 몰래 타고 서울로 올라가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지만 내부에 프락치가 있어 사전에 탄로가 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광주 검찰청으로 당당하게 출두했다. 많은 광주 시민들은 아버지를 뒤따라 걸으면서 열렬히 성원을 보냈다. 아버지가 검찰청에 들어서자마자 경찰들은 저지선을 빙 둘러 치고 시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날 저녁 아버지는 승합차에 태워 서울로 압송돼, 새벽에 도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기자들이 검찰청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자회견이 성사됐다. 


아버지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검사는 조사에 진척이 없자 미리 혐의 내용을 써놓은 종이를 내놓으며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초등학교도 안 나와서 한글도 모르오. 그래도 내가 사리판단은 할 줄은 아오. 당신이 쓴 걸 내가 왜 찍소. 당신이나 찍으시오.”


결국 아버지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와 함께 ‘법정 소란죄’ 혐의로 법정에 섰다.


어머니는 남편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전경이 막무가내로 막아섰다. 분노한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왜 막아.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아들 죽이고 아버지까지 가둘 거야. 얼른 비켜.”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남편의 감옥행에 절규하던 어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폭행뿐이었다. 어머니는 경찰의 방패에 얼굴을 찍혀 앞니가 모두 나가버렸다. 


재판은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검사는 당시 법정에 있었던 전경을 증인으로 세웠다.


증인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강경대 아버지가 태극기를 훼손했습니다.”


아버지는 증인 심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판사는 피고는 심문할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속 따져 묻자 기회를 줬다. 


아버지는 증인에게 물었다. 


“나는 박종철 아버지고 옆에 있는 사람은 강경대 아버지인데 그 당시에 누가 태극기를 훼손했습니까?”


증인은 박종철 아버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강경대 아버지가 태극기를 훼손했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누가 누구의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전경을 증인대에 세워 놓고 거짓말을 시킨 꼴이 돼버렸다. 


아버지는 힘찬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내가 강경대 아버지인데 증인이 박종철 아버지를 강경대 아버지라고 합니다. 검사, 저 놈이 죄인이요. 검사를 위증교사죄로 당장 잡아넣으세요. 야, 검사. 너, 임마. 십 년, 이십 년 때리지 말고 천 년 때려.”
“피고는 조용히 하세요.”


판사가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아버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판사님. 이것이 빠꿈살이, 소꿉장난이지 재판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말도 못 하게 합니까. 못된 친구한테는 뭐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고, 상고심에서는 8개월을 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법정의 존엄과 권위를 무너뜨린 법정소란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나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점을 참작, 원심형량보다 낮춰 선고한다.’고 밝혔다.

 

1991년 6월 2일, 집회에 참가한 부모님

' > 강경대 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38. 부질없는 원망  (0) 2021.11.17
037. 감옥살이  (0) 2021.11.17
035. 잔인한 계절  (0) 2021.11.17
034. 회유와 협박  (0) 2021.11.17
033. 6부 - 상처받은 영혼  (0) 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