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16. 1991년

이동권 2021. 11. 15. 15:14

1991년에는 어지러운 정세 만큼이나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강경대가 대학에 들어가던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집권 3년 만에 5공화국으로 돌아갔다. 변화된 듯 보였던 조치들은 모두 무산됐고, 정치는 폭력으로 대체됐으며, 거리정치가 되살아났다. 


6공화국 초반에는 5공화국과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국민의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 정치권의 공간이 확대돼 민주세력의 움직임이 조금은 자유로워졌고, 폭력만으로 통치하던 지배방식도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정권은 1989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반민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가의 폭력을 공권력으로 정당화하고 민주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들어간 것도 이때쯤이다.


1990년에는 ‘3당합당7)’을 통해 폭력을 정치적으로 정당화시키고, 공안통치를 일상적으로 구조화하면서 권력을 유지해갔다. 또 민주세력의 분열을 일으켜 비리정국, 민생파탄으로 들끓은 국민의 분노가 정권퇴진 운동으로 결집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따라 정치범의 숫자도 5공화국에 비해 3배 가까이 됐다.


국민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고, 환경이 파괴되고 주택난이 이어지면서 민중의 생존권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국민은 패배주의에 빠져 쉽게 조직화되지 못했다. 6월 항쟁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위기가 정치적 요인보다는 생존권적 요인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짚어보면 이러한 정황은 더욱 명확해진다.


당시에는 권력형 비리가 속출하면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매우 컸다. 수서비리8), 판검사 조직폭력배 술자리 합석사건9), 국회의원 뇌물외유사건10), 광역의회선거 후보 공천 금품 수수 사건11) 등 수많은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면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또 3당 합당으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허무주의가 팽배하면서 국민은 정치를 외면해버렸다. 


경제 위기도 가속화됐다. 토지공개념 대폭 축소, 금융실명제의 무기한 연기, 물가폭등 등으로 민중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사회 불평등도 심화됐다. 한 달에 12만 원인 월세조차 내지 못해 노점상과 생활고를 비관한 가장들이 잇달아 자살했고, 아예 일가족 모두가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에 따른 경제 침체를 그 원인으로 돌렸다. 그리고 공익광고 등을 통해 부동산 값 폭등과 과소비 현상에 대한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시켰다. 


우루과이라운드12) 협상 내용이 드러날수록 삶을 자포자기하는 농민들도 속출했다. 경대는 농민들의 현실을 외면한 정부에 분개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남겼다.

우리의 농민은 과연 동네북인가?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불이익을 보는 것은 농민들뿐이요, 절대 자본가에게는 어떤 피해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번 공산품 수출도 그렇다. 공산품 수출은 늘리는데 왜 농산물은 개방해야 하는가. 수출의 문제는 바로 기업가의 문제가 아닌가? 그런 문제를 왜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예를 들면 기술혁신, 경영 혁신 등으로) 농민이 희생돼야 하는가. 국민의 30%에 가까운 사람이 무시되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5%만 보호되는 이 같은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과연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자본가와 소수 독점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그런 집단인가 말이다. 


노태우 정권은 서진 룸살롱사건13), 화성연쇄 살인사건14), 개구리소년실종사건15) 등 강력범죄가 속출하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는 말 뿐인 ‘수사’에 지나지 않았고 대규모 노사분규 현장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데 악용했다. 


노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학생들의 학원자주화투쟁와 정치투쟁을 막는데도 이용했다. 전투경찰을 학내에 침투시켜 영화 상영까지 막았고, ‘화염병 습격 범죄단체죄 적용’, ‘파출소 공격 형법 적용 중형 처벌’ 등 학생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각종 방침을 발표했다. 당시는 학원자주화투쟁이 봇물을 이뤘다.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사학재단이 교직원의 임명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더욱 족벌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등록금으로 재정을 메우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에 많은 사립대학의 학생운동이 등록금인상 저지와 재단비리 투쟁 등 학원 자주화투쟁으로 모아졌다.


두산전자가 페놀을 방출한 낙동강페놀오염사건16)을 계기로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도 사회적으로 대두됐다. 하지만 정부는 환경위기의 책임 소재를 감추고, 환경문제를 일반화시켜버린 광고를 제작해 방송에 내보냈다.


경대는 당시 사회를 발깍 뒤집어 놓았던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기업이 가져야 할 공생윤리와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이번 두산 전기회사 페놀방류사건은 온 국민을 분노와 공포로 떨게 했다. 과연 기업이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비인간화된 영리추구 집단인가? 또 정부는 어떤가. 그런 기업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도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 정부에 우리의 생활 환경을 맡길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시민단체들이 생겨나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 왔듯이 이런 환경의 문제에도 드디어 시민의 힘이 필요할 때가 온 것 같다(아니, 오히려 절실하다는 말이 나을 것 같다). 유럽의 녹색당처럼 우리도 그 정도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버금갈 만한 힘을 가진 어떤 단체가 필요하다. 만약 그러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야겠다. 이제는 시민 하나하나가 똑바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오늘의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일 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생존권 문제이기 때문이다.

참교육의 열망도 땅에 떨어졌다. 전교조 교사 1,500명이 해직되면서 사학비리는 만연했고, 경쟁논리가 심화되면서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반도에는 전쟁위험이 고조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초긴장 상태에 휩싸였고, 남한에서는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선보였던 스커드 미사일이 북한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쟁의혹설이 나돌았다. 이러한 때 노태우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장기집권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켜 반공 군사독재를 유지시키는 한편 북한을 제외한 유엔 단독가입을 통해 분단고착화를 병행 추진했다. 이를 위해 고르바초프의 방한과 한소정상회담17) 등을 성사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을 전면적으로 펼쳤다.

 

 

7) 3당합당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정당이 민주당, 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사건이다. 노태우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라는 거센 반발에 부딪쳤고, 특히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 밀약을 조건으로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해 거대 여당을 탄생시켰다. 

 

8) 수서비리사건은 서울시가 수서, 대치 택지 개발 예정 지구를 일반 주택청약 예금자들과의 형평에 맞지 않게 특정조합에 공급한 특혜비리사건이다. 서울시는 정치권의 압력과 한보 그룹의 로비를 받고 법적 근거 없이 1991년 1월 21일 이 지구를 특별 분양했고, 특히 분양을 받은 조합 중에는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기관이 수두룩해 국민의 원성을 샀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갖가지 의혹을 밝히지 못하고 마무리 돼 노태우 정권 때의 정·경·관 유착관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9) 판검사 조직폭력배 술자리 합석사건은 김정기 부장검사가 단순히 술자리에서 어울린 게 아니라 조직폭력배들에게 금전과 향응을 제공받고 뒤를 봐주는 ‘공생의혹’ 사건으로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의혹을 심화시켰다.

10) 국회의원 뇌물외유사건은 이재근 상공위원장과 이돈만, 박진구 세 의원이 자동차공업협회에서 제공한 경비로 외유를 떠났던 사건이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자동차공업협회가 상공위의 피감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공위는 자동차공업협회에 대한 예산 지원 법안을 다루고 있었다.

11) 광역의회선거 후보 공천 금품 수수사건은 1991년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에 후보들이 공천을 조건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거액의 금품을 제공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국민들의 비난을 샀다.

 

12) 우루과이라운드는 미국의 대자본들이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협정이다. 미국은 자국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세계경제가 붕괴되자 새로운 무역질서구축을 시도했다. 다시 말하면 비교우위에 있었던 농업·서비스·첨단기술 산업을 무기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농산물에 대한 보조금 및 수입관세 때문이었다. 결국 우루과이라운드는 7년여에 걸친 협상 끝에 타결됐으며, 이에 따라 1995년 세계무역 기구(WTO)가 설립됐다. WTO는 GATT체제가 포괄하지 못했던 농산물, 섬유, 무역관련 투자조치 서비스교역 등을 국제무역 규범 내에 포함했고, 무역 관련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적 구속력도 대폭 강화했다.

 

13)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서진 룸살롱에서 서울목포파 조직원이 맘보파 조직원 4명을 무차별 난도질하고 살해했다. 범인들 중 2명은 사형을 당하고, 나머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의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됐으며, 1990년대에도 비슷한 사건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14)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1986년 9월 19일 71세 노인의 하의가 벗겨지고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86년 2명, 1987년 3명, 1988년 2명, 1990년과 1991년에 각각 1명씩 총 10명의 여성이 강간 살해를 당했다. 하지만 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15) 1991년 3월 26일 9~13세이던 5명의 소년들이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나간 뒤 실종됐다.11년이 지나고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성산고등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유골이 발견됐으나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2006년 3월 25일자로 공소시효가 끝나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16) 낙동강페놀오염사건은 1991년 3월, 두산전자의 페놀원액 30톤이 수돗물을 오염시킨 사건이다. 취수장 측은 원인 규명도 하지 않고 수돗물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다량의 염소를 투입해 사태를 약화시켰다. 이 사고로 공무원 7명과 두산전자 관계자 6명이 구속되고 공무원 11명이 징계됐지만, 조업 재개 후 페놀원액 2톤이 다시 낙동강에 유입돼 전 국민적인 항의시위와 두산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이후 두산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환경처 장차관이 경질됐다.

 

17) 1991.4.19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방한해 제주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남북을 통틀어 소련의 최고지도자 국가원수가 한반도를 방문하는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기에 상징적 의미가 컸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고르바초프 방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30억 달러에 이르는 경협기금지원을 미끼로 남한이 유엔에 단독가입할 수 있도록 소련의 승인을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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