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730

포천 - 토박이 싱어송라이터 이지상이 들려주는 ‘포천’ 이야기

싱어송라이터 이지상이 경기도 포천의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기록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 『포천』이다.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롭다. 도시 여행 정보 그 이상의 감흥과 권태로운 일상에서 모처럼 벗어나는 유를 선사한다. 재지와 달관을 촘촘히 땋은 단문과 시적 언어, 풍부한 사료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책임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수이나 시인이고, 교육자이나 철학가의 면모를 풍긴다. 공간의 감미로움을 씹고, 서정의 애달픔을 변주하고, 지성의 창날을 번뜩이는 내면의 심상과 진실성이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던 흔적들이 글에서 묻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책은 저자의 안목과 성찰, 미의식이 담긴 결과물이자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이 그대로..

‘문화가 있는 날’을 평일 아닌 주말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가까이에 있다. 점심 먹고 산책 겸 둘러보기 좋은 장소다. 호젓하고 넓은 마당과 시원시원한 건물들, 상쾌한 날씨를 한가롭게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관람료마저 무료라 웬만하면 이날은 꼭 찾으려고 노력한다.  평일 ‘문화가 있는 날’을 찾아 먹는 즐거움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에 거주하는 자의 특권이다. 평일에, 그것도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각자 생업에 있고,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문화가 있는 날’ 미술관 무료 관람은 그림의 떡이다.  여전히 미술관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술관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류인 -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한 조각가

故 류인 조각가는 근현대 조각의 구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표현기법을 과감히 모색한 조각가다. 조각의 볼륨과 무게 그리고 재료적 물성을 이용해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했지만 과감한 인체 생략과 왜곡, 극적 강조 같은 형상성을 도입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류인 조각가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아버지 류경채와 희곡작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자의식과 흙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80년대 당시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한국 화단에 정밀하고 힘찬 인체 구상조각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구상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형상적 요소가 접목된 새로운 구상조각을 선보였고, 최초로 조각과 설치미술을 결합한..

미술의 다양성 보장은 갤러리 순기능을 되살리는 것부터가 시작

매일매일 작가나 갤러리로부터 수십 통의 메일이 온다. 회화, 조각, 공예, 사진, 팝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 소식을 알리는 메일이다. 작품들은 대단히 아름답고, 멋지며, 기발한데 다소 회화에 ‘쏠림현상’이 심하다. 조각이나 판화 등 소외 장르의 전시 소식은 매우 뜸하다. 전시되는 작품의 주제는 비슷비슷하다. 작가의 소소한 일상이나 자연, 정물 등을 담아낸 풍경화가 많다. 우리 사회의 현상을 포착하거나 정치, 역사, 남북, 빈곤, 환경 등 여러 분야의 고민거리를 던지는 작품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러한 점도 일종의 ‘쏠림현상’이다. 갤러리는 유명한 작가나 보기 좋은 회화 작품, 팔릴 만한 회화 작품을 전시하는데 치중한다. 돈 때문이다. 갤러리가 전시를 열려면 보통 홍보비와 부대비용으로 한 전시 당 약..

이념을 떠나 다시 평가받아 마땅한 이름 ‘정율성’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음악가 ‘정율성’을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 태생으로 1930년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중국공산당에 몸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였던 연안을 찾아가 ‘팔로군 행진곡’, ‘연안송’ 등 많은 곡을 남겼고, 신중국 성립 이후엔 건국에 공헌한 100명의 영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은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율성이 중국 건국에 기여했으니 그는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가 중국 군가뿐만 아니라 북한 군가를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절 중국공산당에 참여했으니 매우 당..

거친 물살을 타고 짜릿한 스릴 만끽하는 내린천 래프팅

아주 사소한 욕구마저 꺾어버리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물소리 우렁찬 계곡에 앉아 시원한 수박을 먹는 것도 좋고, 금빛 모래 반짝이는 백사장에 누워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서로 몸 부대끼면서 자연을 만끽하는 레저스포츠도 그만이다.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치는 여름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윗옷을 훌떡 벗고 즐기는 목물이 간절해진다. 그럴 때는 콸콸거리며 쏟아지는 강물에 몸을 맡겨 보자. 고무보트를 타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맛이 제법이다. 거기에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물결로 넘실대는 숲, 올올하게 솟아 있는 기암괴석이 배경으로 어우러지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행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

간단한 산행과 함께 즐기는 여름가을 계곡 여행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기분도 찝찔하다. 찜통더위는 추석이 되기 전까지 이어진다. 더운 날에는 계곡을 따라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이 제법이다.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향연이 한창인 숲을 바라보면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무더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버린다. 세차게 흘러내리며 부서지는 계곡물, 총천연색 빛을 발산하는 폭포,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청량한 바람,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갈해 주는 차가운 약수가 일품인 계곡 여행지 여섯 곳을 소개한다. 설악산 - 십이선녀탕과 구만동계곡, 천불동계곡, 미천골계곡, 공수전계곡 내설악에 있는 십이선녀탕은 탕수동계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려한 풍광과 변화무쌍한 자태를 뽐내는 설악산의 진면..

의미작용 달리하는 병치의 미학, 황기훈 ‘마크 어브 플라워’ 전

황기훈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항상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 키득거렸던 적도 있었다. 황 작가의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그와 아는 사이여서 일게다. 얘기도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으니 작품이 더 잘 보이고, 의미도 색다르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인다. 황 작가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봐오면서 작가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새삼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해 나가고,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콜렉터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건 대중과의 ‘교류’다. 대중과의 교류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만나 대화하는 일부터 하면 된다. 전시 기획자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언어화 과정보..

이동환 ‘고래 뱃속’전 - 인간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육은 대부분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유의 시발점에는 근본이 있고, 그 결과의 산물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미(美)에 관해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영육은 조금 더 오묘하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 투영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조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부정해 버리거나 내적인 염원을 심화해 이데아의 세계까지 담아낸다. 이동환 작가가 형상화한 '고래 뱃속'도 예술가만의 남다른 사유에서 시작됐다. 족히 육칠십 년은 산다는 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어린 개체로 추정되는 젊은 고래가 배에 가스가 가득 차 죽어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웬만큼 먹어도 가스가 차지 않는다. 사냥 자체가 어려워 배불리 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냥에 성공해도 죽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다.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해양생물학자..

미술가들이 만든 '장난감이랑 놀자'전 - 떠올리게 하는 장난감

장난감을 떠올리면 제자리에 서서 왈왈 짖는 강아지나 자동차로 변신하는 로봇, 요란한 소리를 내는 플라스틱 실로폰이나 고무줄로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게 생각난다. 모두 공장에서 생산한 장난감이다. 블록, 소꿉놀이 같은 놀이용품도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장난감이었다. 갤러리담에서 본 장난감은 달랐다. 손에 쥐고 놀기보다 보고 즐기며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른들의 장난감이었다. 도자기처럼 깨질 위험도 있고, 괴기스러운 캐릭터도 있고, 벽에 거는 액자 형식도 있어서 아이들 앞에 놓으면 울어버릴지 모른다. 담갤러리 윈도에는 이수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도자기로 만든 중세 시대 검투사 인형이다. 이 인형들은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투사와 해골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황기훈 작가는 여러 가지..

이동환 '칼로 새긴 장준하'전 - 목판화의 힘 느끼게 하는 흑백의 강렬함

사자의 무덤을 찾고, 역사와 마주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나 애도의 의미보다는 반성적 자기 성찰을 위한 행위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고, 내면적 자각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동환 화가가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134장의 판화로 새긴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쁜 현실에 쫓기면서도 3년 동안 장 선생의 삶에 집중했던 동기는 숨김없는 고백과 반성의 시간을 통해 생활의 중심을 잡고,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데 작은 밀알이라도 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미술관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게 아카데미적이거나 요란스럽게 포장된 전시는 부담스러웠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받았다. 이동화 화가의 목판화전은 달랐..

문경식 정광훈추모사업회장 - 운동가는 그래야 해

정광훈. 고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두툼하게 열린 가슴’이다. 피 터지는 시위 현장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후배들의 긴장을 풀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도대체 저분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늘 궁금했었다. 문경식 추모사업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넉넉하고 낙관적인 분이다. 안된다고 타박하지 않았고, 실망하는 법도 없었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도 ‘쉬운 일이면 우리에게 오겠냐. 어려우니까 온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기를 북돋아줬다. 기술이 좋은 분이셨다. 1970년대 티브이가 보급될 당시 못 고칠 가전제품이 없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 돈을 엄청 벌었지만 농민운동한다고 다 접었다. 보통사람들처럼 돈을 벌었으면 큰 부자가 됐을 것..

최대선 작가 -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다 미술가가 되다

원색적인 팝아트에 익숙해져서일까? 순간적으로 매료시키는 구상 미술에만 현혹돼 왔을까? 전시장에 가득 찬 고요한 열정이 어색하지만 흥미롭게 마음을 뒤흔든다. 분명한 것은 위대한 화가의 미술만 주류를 구성하는 것도,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적 해석의 틀로만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도 우매한 감상법이다. 정확한 데생력과 색채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미술도 있지만 마음속에 색다른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미술도 존재한다. 최대선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그는 유다른 표현력과 예사롭지 않은 인내심으로 작품에 묵직한 기품을 담아낸다. 자신만의 독특한 비구상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통찰하려고 애쓴다. 그가 비구상 작품을 시작한 이유도 오랜 연습과 통찰의 과정 중에 발현됐다. ‘..

지형범 영재로드맵컨설팅 대표 -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정말 비정상일까?

‘영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진 않았다. 목표를 성취하는 데 아이큐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역사에서 위대한 발명과 발견은 대부분 영재의 천재성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이뤄졌던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영재든, 영재가 아니든 누구나 사회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으며, 영재가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그에 알맞은 교육과 사회적 환경이 요구된다. 지형범 영재로드맵컨설팅 대표도 상위 2%의 지능을 가진 아이들이 모두 뛰어난 성과를 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능이 높아도 스스로 계발하지 않거나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남다른 두각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명문대학에 다니거나 의대, 치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멘사 회원 중에 10~15% 정도다. 비율로 보면 80~90%..

한도숙 시인 - 그것은 모두 투쟁의 불씨

비애를 맛봤다. 농민으로 살아야 하는 아픔을 아들에게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다. 한도숙 시인(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계급보다 농촌의 암담한 현실에 더욱 밀착했다. 아무래도 시인이 농민이어서 그럴 테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밥쌀 수입은 안된다’고 외치다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을 끌어안으면서 강요된 농정과 예속을 과감히 거부하라고 부르짖고 말았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가슴에 진 시퍼런 멍울을 터뜨리는 것이다. 농촌의 현실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은 모두가 투쟁의 불씨가 된다.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저는 시를 쓸 자격이 있는 거로 생각됩니다. (웃음) 고맙고요. 우선 백남기 회장님의 쾌유를 빕니다. 또한 가족들에게도..

이지상 - 그리움과 연애하다, 가슴 도려내는 통증 뒤에는

애가 타고 사무쳤다. 아련한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애틋한 연정이 서정적인 선율과 어우러질 때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수 이지상이 읊고 부르는 그리움이 어렴풋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움 가까이에는 어머니나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있었고, 멀리에는 평화로운 세상과 정의를 향한 그의 바람이 있었다. 노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콧마루가 찡해오는 그리움은 자기 성찰로 이어졌다. 이지상은 ‘당신 모습을 대못처럼 새겨 내 심장을 꾸욱 눌렀지(저물 무렵 중에서)’라며 자신에게서 비롯된 굴레를 속박했고, ‘날이 저문다고 모든 것이 저무는 건 아니니 이 완전하지 못한 세상에 휴식이 되리(황혼 중에서)’라며 마음속 다짐을 나직하게 털어놓았다. 왜 그리움이어야 할까?..

소통과 거짓말 - 미치광이라 할 수 있나, 이승원 감독 2015년작

학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여자는 회식이 끝나면 매번 남자 선생과 잔다. 때론 관계를 맺는 과정을 다른 남자 선생에게 사진으로 남겨 달라고 부탁한다. 한 여자 선생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다그치지만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 한다. 수치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상실감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잠자리에 집착할 뿐이다. 그녀와 같은 학원에서 근무하는 남자 선생은 다산콜센터에 전화해 황당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옆집 사는 개가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 그의 어이없는 요구가 계속되자, 급기야 콜센터직원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그에게는 극한에 달한 불안을 덜어 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을 감추는 거짓말로 소통을 시도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대화는..

미쓰 리의 전쟁, 더 배틀 오브 광주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지상 감독 2015년작

1980년 5월. 3만여 명의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돼 살육 잔치를 벌였다. 이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비무장의 시민을 총으로 쏴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진압봉으로 때려죽였다. 정치인과 민주화운동가,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계엄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췄다. 반면 구두닦이, 방직공, 다방 종업원, 공병수집상, 자개공 등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던 이들은 광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사투에 나섰다. "무기를 돌려줘야 해요, 계란으로 바위 깨기요."라고 설득하는 종교인, 교육자, 정치인에게 시민군들이 외치는 목소리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귓가에 쩌렁쩌렁 울린다. "뭐여. 이 호로 상놈의 새끼들이 설레발 까는 거여. 뭐여. 시방. 니미 교사고 목사고 나발이고 모두 독재 때 앞..

눈꺼풀 - 황금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오멸 감독 2016년작

고요하고 쓸쓸한 섬 미륵도. 이곳에 한 노인이 살고 있다. 노인은 홀로 고행하면서 가시밭길 같은 마음을 다스린다. 억겁 동안 켜켜이 쌓인 인간의 업을 대신 짊어진 수도승처럼 혹독한 성찰로 자신을 이끌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적막한 섬을 깨우는 것은 전화다. 전화벨이 울리면 손님이 찾아온다. 노인은 그들에게 떡을 쪄서 먹인다. 먼 길을 가는 손님을 걱정하며 뽀얀 떡을 쥐어 보낸다. 첫 손님은 삼십 대 남자, 그다음은 쥐다. 노인은 이들을 담담하게 마중한다. 그다음 손님은 선생님과 학생 두 명이다. 노인은 오지 말아야 할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흥분한다. 평정심을 잃고 극도의 불안과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 분노한다. 노인은 돌부처의 머리로 쌀을 찧고, 부서진 절구통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파계다. 영화 은 줄거..

족보 있는 음식, 냉면알고 먹자

이따금 삶이 지겹고, 지칠 때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맛집을 찾아 냉면 한 사발 즐기길 권한다. 스트레스와 짜증을 훌훌 날려버리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가끔 과음을 한 뒤 먹는 냉면도 좋다. 숙취 때문에 먹은 음식을 왝왝 토할 것 같지만 시원한 냉면 육수를 마시면 어느 순간 속이 진정된다. 냉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먹으면 더욱 맛있겠다. 냉면은 엄연히 족보가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잘하는 집과 못하는 집의 차이가 너무 크다. 특히 인스턴트 육수와 면을 사용하는 곳이 많아 진정한 냉면 맛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업소 정보를 꼼꼼히 따져보고 방문해야겠다. 같은 재료도 요리하는 방법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거기에 색다른 재료가 첨가되면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냉면도 그렇다. 평이해 보여도 음식점마다 맛 내..

후쿠시마의 미래 - 죽음의 땅 체르노빌에서 상상한 우리의 미래, 이홍기 감독 2013년작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는 어떻게 변할까? 다큐 는 그 미래의 모습을 1986년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서 찾는다. 이 다큐는 원전 사고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는지, 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지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끊임없이 원자력 발전에 눈을 돌리는 세계에 경각심을 심어준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원전 인근 지역은 불모지가 됐다. 원전에서 200km가량 떨어진 곳마저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 수치가 나올 정도로 변했다. 불안에 떨던 일본인들은 시민조사단을 꾸려 체르노빌을 방문했다. 5년 내지 10년 후 후쿠시마 아이들과 우리의 건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조사단을 태운 버스가 체르노빌에 들어서자마자 방사능 경보..

명량: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 - 명량해전 직전 16일간 이순신은? 정세교, 김한민 감독 2015년작

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이순신은 천운이 아니면 어려웠을 명량해전에서 통쾌하게 왜군을 물리쳤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중 조선과 왜의 화의교섭이 결렬되자 왜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한 전쟁이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때보다 조선에 더욱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순신은 이듬해 왜군과 마지막 전쟁인 노량대첩으로 7년간의 왜란을 끝냈다. 영화 은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고뇌하고 번민하지만 반대로 침착하고 신중한 장군의 내면을 잔잔하게 그렸다. 예를 들면 이순신은 수백 척의 함선과 수만 명에 이르는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면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전장에서도 이순신의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는 변함없..

생 로랑 - 홀로 뛰어난 천재는 없다,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 2014년작

천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용납될 수 있을까? 천재들은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다른 고통을 겪었다. 그래도 천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는 없다. 영화 을 봐도 그렇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주위 사람들을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재능을 보증삼아 갖가지 난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향락과 쾌락에 몰두한 천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지 않다. 그의 성적 지향 또한 논외다. 얘기하고 싶은 점은 단 하나, 옷에 대한 이브 생 로랑의 열정이다. 영화 은 2014년 개봉된 영화 과 자연스레 교차됐다. 은 재미와 대중성을 추구한 영화였다. 표현의 수위도 거북하지 않은 수준에서 선을 그었다. 반면 은 인물과 예술성에 집..

버드맨 - 삶의 아픔에 눈을 뜨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2014년작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인 성공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좋은 자리에 오르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고, 기성세대 또한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인내하라고 설교한다. 왜 그런 것일까? 성공의 의미를 ‘채우는 것’에 두어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보다 오래된 생각을 비워내는 것이 우선이다. 틀에 박힌 사고를 먼저 비워내지 못하면 새로운 것이 들어갈 공간은 없다. 따라서 성공은 채우는 것에만 몰두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빈곤함을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명성이나 재물이 아니라 단순하게 즐기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가슴 깊이 느끼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타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행복도 ..

위플래쉬 - 최고란 명성인가 평판인가, 데미안 셔젤 감독 2015년작

사람들은 대부분 최고가 되길 갈망한다. 그러나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삶의 목표를 ‘최고’가 아니라 ‘최고가 되는 과정’에 둔다면 관계없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활화산 불구덩이다. 자신의 몸이 탈 줄 모르고 뛰어드는 불나방이다. 이 불구덩이로 뛰어들 자신이 없다면 최고이고 싶은 꿈은 접는 게 좋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멋진 음악이 있다. 이 음악은 어떻게 탄생될까? 훌륭한 뮤지션과 작곡가, 지휘자가 만나야 멋진 음악은 만들어지겠다. 그럼 훌륭한 뮤지션과 작곡가, 지휘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재주가 있으면 조금은 쉽겠지만 뼈를 깎는 각자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명검도 대장장이가 뜨거운 쇳덩이를 꾸준하게 두드리고 다듬어야 만들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내기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 멋지고 웃기게 계급적인 영화, 매튜 본 감독 2014년작

영화 는 재밌고 명랑하다. 단 아이들과는 금물이다. ‘세상을 구한다면 뒤로하게 해 줄게요’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게 내뱉는 스칸디나비아 공주의 대사로 이유는 대신하겠다. 영화란 알기 쉬우면서 감칠맛이 있어야 한다. 비비 꼬거나 색다른 아이디어를 장착해야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와 감독도 많지만 좋은 영화는 그럼에도 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렇다. 레스토랑 출입문 잠금장치를 하나하나 걸면서 ‘매너가(철컥) 사람을(철컥) 만든다(철컥)’고 얘기하며 매너 없는 것들을 빼어난 격투 솜씨로 때려눕히던 콜린 퍼스가 자꾸 생각난다. 그는 정말 멋지고 섹시한 배우다. 또렷한 ‘왕(王)자근육’, 탱탱한 ‘엉덩이’ 한 번 노출하지 않지만 무척 관능적이다. 폭력적이고 끔찍한 현장에서도 신사도를 잃지 않고, 생..

나운하 가수 - 갑질, 이해는 하는데 ‘야’, ‘너’는 못 참겠더라

글을 쓰는 재주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모두에게 감흥을 주는 건 아니다. 마음 없이 머리로만 써서 그렇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은 역시 마음에서 우러난 글이다. 노래도 똑같다.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목소리에 마음을 담아내지 않으면 감흥을 주지 못한다. 감동적인 무대는 진심 어린 마음과 노래 부르는 재주가 합쳐져야 만들어진다. 가수 나운하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무엇보다 마음에서 우러난 노래를 들려준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심각하면 심각한 대로, 곡의 분위기에 맞게 감정을 담아낸다. 어떤 노래라도 열심히, 주의 깊게 하려는 그의 고집 때문이기도 하지만 털털한 외모와 다르게 천성이 곱고 정이 많은 성격이 자연스레 작용했다. “오랫동안 부르다 보니 노래의 맛을 알게 됐다...

폭스캐처 - 재벌가 ‘똘아이’의 충격 실화, 베넷 밀러 감독 2014년작

영화 는 미국 최고의 재벌 ‘듀폰가’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사건을 다룬다. 이 살인사건은 실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듀폰가 사람들의 일상과 생각, 대화는 상식을 초월한다. 듀폰가의 상속자 존 듀폰은 돈이면 다 되는 사람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돈으로 해결한다. 그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래도 안 되면 분노한다. 사람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사회에서 존경받기 위해 레슬링팀 ‘폭스캐처’를 꾸리지만, 끝내 레슬링 코치를 죽이고 만다. 이유는 얼토당토않다.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 그러나 레슬링 코치는 자기 신념대로 일을 열심히 했을 뿐, 단 한 번도..

강남 1970 -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나요? 유하 감독 2015년작

묵직한 영화였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숙연했다. 화려한 액션과 자극적인 대사가 난무하는 조폭영화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두 청년의 삶이 남긴 메시지가 너무도 강해 가슴이 찡해왔다. 시커먼 터널 안에서 빛이 쏟아지는 터널 끝을 바라보며 손짓하던 청년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고통과도 중첩됐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앞만 보며 달려온 것일까. 영화 은 물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은 모두 다르고,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도 같지 않다. 삶의 행복은 ‘가치 있는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에 달려 있다. 욕망의 대상이 그릇되거나, 자신만의 문제로 국한하거..

존 윅 - 돈이면 다 된다는 재벌에게, 데이비드 레이치,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 2014년작

영화보다 배우가 궁금했던 영화가 키아누 리브스의 주연작 이었다. 존 윅은 키아누 리브스가 한국 나이로 50살 때 개봉됐다. 50살은 이미 부모와 사별했거나, 모시던 부모의 임종을 서서히 준비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키아누 리브스는 부모 외에도 가슴 아픈 사별을 네 번이나 겪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가까이했던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시달려 끝내 노숙자가 되고 말았다. 키아누 리브스는 영화 에 함께 출연했던 친구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목도했다. 리버 피닉스는 약물중독으로 고생하다 심장발작으로 돌연사했다. 키아누는 또 출산 예정이었던 딸과 약혼녀였던 제니퍼 사임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제니퍼 사임은 만삭의 상태에서 태명 ‘에바’라고 불리던 그의 딸을 사산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고, 제니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