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여자는 회식이 끝나면 매번 남자 선생과 잔다. 때론 관계를 맺는 과정을 다른 남자 선생에게 사진으로 남겨 달라고 부탁한다. 한 여자 선생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다그치지만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 한다. 수치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상실감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잠자리에 집착할 뿐이다.
그녀와 같은 학원에서 근무하는 남자 선생은 다산콜센터에 전화해 황당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옆집 사는 개가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 그의 어이없는 요구가 계속되자, 급기야 콜센터직원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그에게는 극한에 달한 불안을 덜어 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을 감추는 거짓말로 소통을 시도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두 사람의 대화는 잘 이어진다. 내면에 깃든 슬픔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과 흐름은 형식적이고 괴상하다. 여자는 태연하게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응대한다. 여자가 "5억 있으세요?"라고 물으면 남자가 "여러 통장 모아 보면 될 거예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옷을 벗고 해괴한 섹스를 시도한다. 여자가 "젓가락 좀 제 밑에 넣어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남자는 "더 넣어요."라며 그대로 따른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됐을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진하게 화장을 한 여자가 번화가를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상궤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를 단순히 미치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한 남자는 갈기갈기 찢긴 옷을 입고 시커먼 얼굴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두 팔을 벌린 채 "나를 사랑해 달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이들의 행동은 웃기지 않았다. 무시할 수도 없었다. 가슴에 범람한 것은 마냥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이었다.
영화 <소통과 거짓말>은 과거의 그런 경험들을 떠올리게 했다. 놀란 가슴으로 멀뚱멀뚱 눈을 껌뻑거리며 스크린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외로움과 상처로 잠식된 자신을 감췄다. 타인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외롭지 않은 척, 용건이 있는 척 자신을 포장하고 둘러댔다. 맘속에 감춰진 상처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는 섹스와 다산콜센터를 찾았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때는 자학과 폭력을 탐닉했다. 얼음장 같은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개나 소돼지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의 소통은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필요했던 이들에게는 체념이나 회한조차 사치 같은 것이었다.
이 영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 소통과 배려가 부족한 우리 사회를 투영했다. 원망과 애상에 사로잡힌 음성, 정신과 육체를 스스로 내리치는 학대, 두꺼운 근심이 삼켜버린 이성으로 관객들을 순식간에 발가벗겼다.
<소통과 거짓말>은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과 판에 박은 듯 똑같고 단조로운 배경, 4:3 비율의 흑백 영상은 현실감을 높였다. 특히 8분에 달하는 도입부 롱테이크와 음악이 나오지 않은 편집은 시종일관 삶에 대한 무기력과 염증을 유발했다. 이 영화에 유일하게 나오는 소녀시대의 노래는 텍스트와 다르지 않게 들렸다.
이승원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그의 팬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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