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훈. 고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두툼하게 열린 가슴’이다. 피 터지는 시위 현장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후배들의 긴장을 풀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도대체 저분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늘 궁금했었다.
문경식 추모사업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넉넉하고 낙관적인 분이다. 안된다고 타박하지 않았고, 실망하는 법도 없었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도 ‘쉬운 일이면 우리에게 오겠냐. 어려우니까 온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기를 북돋아줬다. 기술이 좋은 분이셨다. 1970년대 티브이가 보급될 당시 못 고칠 가전제품이 없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 돈을 엄청 벌었지만 농민운동한다고 다 접었다. 보통사람들처럼 돈을 벌었으면 큰 부자가 됐을 것이다. 정말 땅 한 평 없이 살다 생을 마감했다. 운동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분이다.”
고 정광훈 의장의 평전이 출간됐다. ‘변함없이,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을 이제는 손 안에서 만날 수 있다. 2011년 5월 13일, 교통사고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던가. 평전 출간이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원래 5주기 때 평전을 출간하려고 했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됐다. 평전에 실릴 내용을 서로 조율하다 보니 늦었다. 정광훈 의장님은 농민 쪽에서 보면 농민운동가이지만 민중진영에서 보면 민중지도자, 반세계운동진영에서 보면 반세계운동 지도자다. 농민운동가로서의 삶과 지도력을 중심으로 계획을 짜다 내용을 수정하게 됐다. 민중운동진영, 반세계화운동진영에서의 역할이 빠진 게 있었다. 그 부분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다.”
정광훈 의장을 유독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답하게 얽힌 문제는 풀어주고, 힘들어하는 후배는 조용조용 다독여주며, 의지가 약해진 농민에게는 일일이 편지를 보내 용기를 주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도 더 깊은 내막이 있겠다. 문경식 추모사업회장에게 물어보면 쉽게 해결될 궁금증이다. 문경식 회장은 정광훈 의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스무 살 때부터 정광훈 의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근거리에서 살피며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바로 문 회장이다.
“의장님은 친절하다. 사람을 한 번 만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쑥 들어간다. 사람을 한 번 만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하고, 만난 사람들의 특징을 기억한다. 다시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말을 붙이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 토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장님을 한 번 만나면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정광훈 의장님은 조직을 관리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평소에 편지를 많이 쓰셨다. 저녁마다 2~3통씩 써서 안부를 묻고 토론했다. 고인은 돈이 없었지만 용돈이 생기면 책을 몇 권씩 구입해서 지역 활동가들에게 소포로 보냈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편지를 엄청 많이 썼다. 책으로 출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편지에는 항상 ‘혁명의 축제에 초대한다’고 썼다. ‘혁명은 바람같이 온다’면서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광훈 의장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본 <정광훈 평전>은 어떠할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잃지 않았던 낙관적인 태도, 자주민주통일 방침을 1순위로 내세우면서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삶, 인간의 피가 흐르는 자본주의는 없다고 굳게 믿으며 평생을 투신했던 운동, 민중들의 눈망울을 반짝이게 만들었던 구수한 말투 등을 어찌 글로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봤을 때 고인의 삶과 가치, 세계관이 평전에 잘 수록돼 있다. 그 양반의 운동관, 그 양반의 철학, 그 양반의 고난이 책 속에 녹아 있다. 활동가라면 정광훈 의장님의 삶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의장님의 뜻이 뭔지 읽어보고, 결의하고, 토론하면 조직과 개인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고인은 전선 운동에 대해 주장을 많이 했고 여성, 청년,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고인의 연설을 들으면 감동했다. 그런데도 직접 만나보면 너무 소탈해서 편안해하고 좋아했다. 평전 안에 살아왔던 전부는 아니지만 고인의 삶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일반인들이 읽어도 좋다. 평전이 두꺼우면 먼저 질리는데, 분량도 적당하다. 책에 의장님의 모든 삶을 축약해 넣으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지만 고인이 태어나서 배우고, 운동하는 과정, 사람 만나고 대화하는 내용들까지 자세하게 소개가 돼 있으니 계층에 상관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광훈 의장의 ‘동지애’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동지를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았고, 동지에게 닥친 문제라면 자신의 일처럼 뛰어들었던 고인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한 헌신은 막강한 농민조직을 만들어냈고, 운동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됐으며, 고인이 그토록 바라던 민중세상, 통일세상을 한걸음 더 앞당겨 왔다.
“정광훈 의장님은 ‘민중권력’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항상 ‘전선을 돈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모든 이념과 정파를 떠나서 연대해야 한다.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촛불이 그렇지 않았겠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거리에 나와서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성과를 만들었다. 정광훈 의장이 평생 강조했던 일들이, 고인이 주장했던 성과들이 나왔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지만 우리 민중들은 여전히 거리에 나와 있다. 우리 민중들이 주인이 될 때까지 정파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 통 큰 단결, 통 큰 연대를 통해 민중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미처 평전을 펼쳐보진 못했지만 문경식 추모사업회장이 역설하는 정광훈 의장의 ‘정신’이 무엇인지는 고개부터 끄덕여진다. 고인은 개인이나 조직이 당위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비판해 왔었다. 자신이나 자기 조직에 대한 요구에는 치중하면서 연대나 연합에 나서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결합하는 것을 진정한 운동이라고 보지 않았다. 고인이 왜 농민운동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민중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이해가 된다.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근성 고르예술단 예술감독 -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사람 (0) | 2024.03.18 |
---|---|
방효성 작가 - 사유하는 몸으로서의 행위예술가 (0) | 2024.03.17 |
최대선 작가 -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다 미술가가 되다 (0) | 2022.10.28 |
지형범 영재로드맵컨설팅 대표 -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정말 비정상일까? (0) | 2022.10.28 |
한도숙 시인 - 그것은 모두 투쟁의 불씨 (0) | 202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