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64

032. 망월동에서 잠들다

광주 도청 앞에서 노제를 마치고 8km가 넘는 거리를 행진한 시민들은 새벽 3시경 망월동 묘역에 도착했다. 모두들 환희와 슬픔이 교차된 얼굴이었다. 이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광주출정가’, ‘농민가’, ‘아침이슬’ 등을 합창하며, 간간이 구호를 외쳤다. “광주 시민 일어섰다.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망월동은 통곡한다. 미국 놈들 물러가라.”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경대 열사의 하관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대형 태극기가 덮인 관이 동료 학우들에 의해 무덤으로 옮겨지자 묘역을 가득메운 1만여 명의 추모객들이 침통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합창했다. 유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경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다 끝내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오열했다. “경대야 갈래. 어미만 남겨놓고 정말로..

031. 운암대첩

광주 시민과 학생 10만여 명은 금남로에서 5·18 광주항쟁 11주기를 기리고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태우 대통령을 형상화한 허수아비 화형식을 거행하며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때 故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광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대들은 속속 광주 톨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5월 19일 새벽 4시 15분. 강경대 열사의 운구행렬이 광주 톨게이트에 멈춰 섰다. 전경 20개 중대 3천여 명이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례행렬의 광주 시내 진입을 막고 있었다. 광주 도청 앞 노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선봉 깃발을 들고 곳곳에서 강경대 장례행렬의 진입을 돕기 위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돌과 쇠파이프로 맞섰고, 일부 학생..

030. 시청 앞 노제를 사수하라

5월 14일 오전 10시부터 명지대 서울캠퍼스에서 故 강경대 열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명지대를 둘러싼 담장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졌고, 흰색과 검은색 깃발이 교차해 꽂혔다. 또 영결식장 앞 본관에는 경대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로 20m, 세로 30m 크기의 검은색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영결식 도중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 명의의 조화가 도착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문에서 돌려보냈다. 명지대 총장은 추도식 비용을 학교에서도 대겠으니 추도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했지만 추도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식이 파행적으로 진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운구행렬은 영결식을 마치고 시청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교문을 나섰다. 운구는 민족예술총연맹 소속 풍물패 2백여 명이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이끌었고, 그 뒤로..

029. 지역·나이·성별·직업을 초월한 투쟁

시위 현장에는 여러 가지 홍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책회의 소속 각 단체들과 학보사들은 각종 호외와 속보 유인물을 통해 전국의 투쟁 상황을 알렸고, 학생들은 번화가, 지하철,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배포해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유인물은 딱딱한 글로만 구성되지 않고 만화, 사진 등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변협을 비롯해 전국교수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전국 20여 개 단체들이 잇따라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변협은 ‘시위를 진압할 때 정책적으로 고압 분위기를 조장하고, 은연 중에 불법수단을 쓰도록 고무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

028. 결사항전의 다짐

4월 27일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여 강경대 사망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고, 신촌 로터리까지 행진하기 위해 교문 앞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전경들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를 막았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애초 이날 싸움은 명지대 학생들이 주도했다. 명지대 학생들은 명지대 교문에서 연세대까지 평화행진을 진행한 뒤, 전대협이 주최한 이날 집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제일은행 사거리에서 막고 길을 내주지 않자 학생들은 그 자리에 앉아 농성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좌 농성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나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027. 5부 - 일어나라 열사여

순진한 웃음 속에서 삶을 포식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대의 상처를 품에 안았던 강경대. 역사의 아픔인지, 운명의 조롱인지 경대는 무거운 절망을 짊어지고 끝내 산화했다. 하지만 절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뜨거운 용기와 의지로 꽃피어 거대한 혁명을 만들었다. 더 이상 춥다 하지 마라. 더 이상 배고프다 하지 마라. 끈기 있는 사랑과 인내만이 경대의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참으로 고되다.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경대를 떠올리자.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구국의 아들을. 노태우 대통령은 강경대의 죽음에도 꿈쩍하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는 망발을 했다. 오만한 군사독재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이 보여줬다. “현재 민주화..

026. 검안

강경대가 사망하자 유가족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도 사건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갖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경대의 죽음은 몇몇 백골단의 소행에서 비롯된 ‘사고’가 아니라 노 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통치가 부른 ‘살인’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은 경대가 사망한 다음날, 이례적으로 안응모 내무부장관을 경질하고, 시위 현장을 지휘했던 서장을 직위 해제했다. 그러고선 경대의 사인을 놓고 ‘물타기’ 공작을 시도했다. 전경은 쇠파이프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강경대는 아마도 날아오는 돌에 맞아 사망했을지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서울시경도 시위진압에 나선 백골단은 사과탄 두 개와 50cm 길이의 플라스틱 경찰봉과 방패 등 정식 장비만 갖췄다고 발표했다. 하..

025. 어머니의 슬픔

경대가 죽기 전 그날 새벽. 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공부하는데 별도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주로 새벽시간을 이용해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세수를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어와 꽃이 핀 가지를 흔들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이고 슬픔에 젖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경대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종이를 펼쳤다. 부모님께 메모를 남기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올게요. 경대 올림 잠에서 깬 아버지는 경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라고 썼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툴게 ‘어머니’라고 고쳐 쓴 편지였다.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고 챙기는 아..

024. 떨어지는 꽃잎

4월 26일 오후 3시. 선미가 서부서 유치장에 갇혀있을 무렵, 강경대는 5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전경과 대치했다. 이들 중에서 10여 명의 학생들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교문 밖으로 50미터 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경대는 이날 사회과학 학회원들과 함께 용인캠퍼스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학내 집회가 있다며 선배에게 사정을 구하고 혼자만 빠졌다. 늘 그랬듯이 경대는 거리에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경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새내기였지만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고 매사를 결정했다. 그래서 학내 집회에도 열심히 참가했고, 궁금한 것을 선배에게 물으며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는 것보다 몸으로 실천했고, 깨달은 것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겼다. 그날 집회에서 경대는 연락책을 맡았다...

023. 선미의 눈물

4월 26일 12시. 여학생 22명이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서부서 항의방문 투쟁 출정식’을 갖고 서부경찰서로 향했다. 여학생들은 서부서 앞에서 ‘총학생회장을 석방하라.’를 외치며 경찰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잡아 가뒀다. 선미도 총학생회장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경찰의 억센 팔뚝에 붙들려 개 끌려가듯이 질질 유치장으로 잡혀갔다. 경찰은 여학생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 조사했다. 선미도 범죄자처럼 불려 앉아 경찰과 마주했다. “주소, 학교, 학년, 과, 이름 대.” 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라고 해서 죄 없는 사람을 가둬서도, 그들이 개인의 정보를 알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미는 경찰들을 향해 분하고 억울한 마음..

022. 죽음의 전조

4월 24일. 박광철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상명여대에서 지지·연대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불법으로 연행됐다. 학원자주화투쟁의 구심점이었던 총학생회장을 잡아들여 명지대사태가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막아보려는 꼼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지대 학생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시위를 조직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학생들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싸웠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면 학교 측에서 등록금 인상을 포기하고 손을 번쩍 들 줄 알았다. 아니, 5% 미만이라도 인하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경찰과 한몸이 된 학교 측의 대응은 강경했다.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고, 타협안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집회 시작을 40여 분 남겨놓고 학교..

021. 4부 - 떨어진 붉은 꽃잎

죽음에 대한 고통과 비애는 살아남은 사람에게도 크지만 죽은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위로하는 길은 어떠한 재물이나 추모 행사가 아니라 죽은 이에 대해 올바르게 기억하고 내면세계에 재건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면 경대는 늘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또한 값진 열매로 승화될 것이다. 경대가 가졌던 순수한 동경이 광폭한 쇠파이프 아래 무너져 내린 날을 기억한다. 애달픈 마음이 죽음을 쫓고, 그리움이 사무쳐 고뇌의 끝으로 되살아나던 날. 울어라. 하늘이여. 이 기약도 없는 이별을 너라고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노태우 정권은 집권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민주세력을 ‘적’으로 몰아세워 탄압했다. ‘법질서 수호’와 ‘좌경폭력세력 척결..

020. 총학생회 진군식

3월 22일.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총학생회 진군식이 열렸다. 명지대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의 학원 탄압을 분쇄하고, 터무니없는 등록금 인상률을 저지하자는 각오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대는 무대 뒤에서 ‘따람’ 회원들과 함께 ‘투쟁의 한길로’를 열창했고, 선미는 탈반 학우들과 함께 무대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쳤다. 학생들의 기세는 몰아치는 폭풍우 소리처럼 커다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이날 진군식에서는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이 진행됐다. 집회할 때는 상징의식을 하지 않을 것처럼 전경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깜짝쇼’처럼 감행했다. 진군식이 끝나기 전까지 전경들의 교내 진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경들이 처음부터 교내로 진입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할 때만 막..

019. 명지대의 속사정

1991년 당시 명지대는 서울캠퍼스의 학생 수가 2,000명이 고작인 작은 학교였다. 반면 학생운동은 튼튼했다. 이 시기만큼 명지대에서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없었다. 학생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은 사회 변혁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크고 작은 사업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총집중했다. 특히 새내기가 들어올 때쯤이면 운동에 열심이었던 학생들이 주축이 돼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과학생회에서 일찌감치 사업을 준비하고 새내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명지대는 88년을 전후로 NL(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과 PD(People’s Democracy;민중민주)18)로 그룹이 나뉘었다. 사업은 주로 NL그룹이 주도했으나 PD그룹에서도 대등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분..

018. 투쟁의 한길로

선미는 경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북과 장구를 곧잘 따라 쳐 함께 동아리 생활을 하길 원했다. 하지만 경대는 선미가 활동하던 동아리 ‘탈터사랑’이 아니라 노래패 ‘따람’에 가입했다. 누나의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경대는 무엇보다 여러 가지 배움을 통해 자신의 갈증을 풀고 싶었다. 경대는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낼 만한 연결고리를 필요로 했고,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일신우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길 원했다. 동아리 선배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으로 철철 넘쳤던 경대의 본모습을 처음부터 알아봤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내기 중에 괜찮은 애 있더라.” “누군데?” “경제학과 강경대.” “왜?” “동아리 가입원서 봤어? 우리 동아리에 지원한 이유가 ‘사상이 투철..

017. 배우고 깨닫고 싸우다

강경대는 명지대 합격통지서를 받은 다음날부터 매일 학교에 갔다. 재수할 때부터 선미가 활동하고 있던 탈패 동아리 ‘탈터사랑’ 선배들과 맥주 한 잔씩은 할 정도로 친분이 있어 학교가 낯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3학년이었던 선미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붙임성이 좋은데다 눈치를 보기는커녕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곧잘 말을 걸 수 있었던 성격 덕분이다. 경대는 선배를 만나면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았다. 머릿속에 맴돌았던 문제나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 그래도 선배들은 귀찮아하지 않고 허허 웃으며 경대를 상대해 주었다. 경대는 선미와 함께 있을 때도 개념치 않았다. 선미를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선배들과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선미가 집에 가자고 재촉을 하면 경대의..

016. 1991년

강경대가 대학에 들어가던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집권 3년 만에 5공화국으로 돌아갔다. 변화된 듯 보였던 조치들은 모두 무산됐고, 정치는 폭력으로 대체됐으며, 거리정치가 되살아났다. 6공화국 초반에는 5공화국과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국민의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제도 정치권의 공간이 확대돼 민주세력의 움직임이 조금은 자유로워졌고, 폭력만으로 통치하던 지배방식도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정권은 1989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반민중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가의 폭력을 공권력으로 정당화하고 민주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들어간 것도 이때쯤이다. 1990년에는 ‘3당합당7)’을 통해 폭력을 정치적으로 정당화시키고, 공..

015. 3부 - 다시 피는 열정의 꽃

삶은 인내로부터 시작된다. 시간을 극복하고 아픔을 참아내며 헛된 망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삶은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인내를 통해 발현되는 적극적인 행동이나 작은 헌신은 삶에서 그대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것만이 인류를 풍요롭게 해주고,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많은 성현들은 이를 깨닫고 가르쳤으며, 지혜로운 자들은 이를 따랐다. 강경대의 삶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강경대는 대학에서 자신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일들과 마주쳤다.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아련한 상들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거기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스스로 싸웠다. 경대는 빠르게 지나가는 새내기 시절에도 양심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의식을 숨김 없이 드..

014. 편애 속에 꽃핀 남매愛

강경대는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애정 없이는 이웃에 대한 헌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했으며,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 해가 된다면 그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 선미보다 아들 경대를 더 사랑했다. 남아선호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경대 사랑은 남달랐다. 어머니의 마음은 온통 경대에게 치우쳐 있었다. 남편도, 딸도 아니고 경대가 최우선이었다. 사골 국을 끓여도 경대 먼저 챙겨줄 정도였다. 대신 아버지는 선미를 더 사랑했다. 딸은 아빠 딸, 아들은 엄마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경대 때문에 ‘유난스러운 엄마’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시간이 나는 대로 경대와 대화하고, 손을 잡아주거나 쓰다듬어주었다. 하루라도 경대를 안아주지 않..

013. 마음씨 좋은 예비사업가

강경대는 유혹이 일거나 무례한 일을 당할 때, 언제나 원칙을 세우고 사랑으로 일관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친구들과의 다툼이 생길 때에도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 돼 자신을 질책했다. 얻어터지고 싸우는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먼저 아끼고 용서했으며, 이러한 행동이 남자답고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남학생들 중에는 상대방이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화를 참지 못하고 무조건 주먹을 날리는 애들 때문에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경대도 친근한 마음으로 했던 장난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경대는 장난을 치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친구와 부딪쳤다. 힘 꽤나 쓰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짜증 나는 얼굴로 일어나서는 이를 드러내 놓고 웃으며 빈정거렸다. “야, ..

012. 세상을 보는 눈을 뜨다

강경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5·18광주항쟁5)을 알았다. 슬프고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 경대는 충격을 받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웅숭깊은 생각을 했다. 그 중심에는 오만스러운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주위에 냉담의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미웠고, 만약 모두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냉혹해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경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싸웠던 이들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조그마한 것도 마음을 드러내 놓고 헌신할 때에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경대가 5·18광주항쟁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광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광주로 내려가 친구를 만났다. 실성한 듯 보이는..

011.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강경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는 자상한 아이였다.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듯이, 경대는 자신을 잊고 진심으로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살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입이 궁금할 땐 ‘센베이4)’를 사 와서 경대와 함께 먹곤 했다. 경대는 한창 과자를 좋아할 나이에도 더 먹겠다고 욕심을 내지 않고 아버지를 챙겼다. 또 호주머니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집에 들어올 때 꼭 과자를 사 와서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센베이구나.” 아버지는 경대가 사 온 과자를 보고 말했다. “아빠가 좋아해서 사 왔어요. 드세요.” 경대는 TV를 볼 때도 그랬다.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보다가도 아버지가 자주 보는 축구나 권투 경기가 ..

010. 약속을 지킨 부자

경대는 동정심이 많아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했다. 이웃들에게 떡을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셋방 사는 사람들부터 챙겼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주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가 있으면 나서서 들어줬으며, 길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찾아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직접 데려다줬고, 행여 갈 수 없을 만큼 먼 곳이라면 알아들을 때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소외를 느껴보지도 않았고, 업신여김을 당해보지도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경대는 영적인 영역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진실한 마음을 싹틔웠고, 실천했다. “거리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경대는 애석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음이 좋지 않았구나?” 어머니는 어린 경..

009. 2부 - 신록으로 우거진 젊음

경대는 자라면서 한층 드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유행하는 것, 무익하고 생활에 겉치레를 더해주는 것을 멀리하고 일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자기 생활 안으로 끌어들였다. 활기 넘치고 즐거운 눈망울로 정당한 것, 바람직한 것을 예찬했으며 사랑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여. 어깨를 활짝 펴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 여기 잠들어 있는 순수한 영혼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냐고. 강경대는 가슴속에 존경과 사랑을 가득 채우며 성장했다.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롭게 알게 된 현실과 조화를 이뤄나갔으며,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

008. 아무나 할 수 없는 꼴찌

강경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아니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글만 겨우 떼고 학교에 갔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입학한 동급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서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교육관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알고 가면 오히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강조하다가 아이가 비뚤어지는 것을 더욱 염려했다. 그래서 경대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경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에서 학교 공부를 미리 배우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크는 것이 중요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건강한 육체를 기르고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는 일,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과 의욕을 갖는 일, 이 모든 것이 어린 시기의 가정교육에서 형성된다고 믿었다...

007. 예쁘고 인사 잘하는 어린이

강경대는 이목구비가 곱상한 데다 하얀 얼굴에 살이 토실토실 올라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예뻤다. 긴 단발머리에 가느다란 머리핀을 꽂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모두 여자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앉아 있을 때면 어른들은 흡족한 듯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 했다. “그 놈 참 예쁘게 생겼다.” 경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신문에 예쁜 어린이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났다. 경대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머니를 끈덕지게 졸랐다. “엄마, 저 예쁜 어린이 선발 대회에 나갈게요.” “대회에 나가겠다고?” 어머니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자신 있어요. 저처럼 예쁜 아들이 나가야죠. 상 받을 자신 있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식이 나간다고 하니 말릴 수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어..

006. 검소한 천하장사

강경대는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남달랐다. 덩치도 좋고, 키도 커서 식당에 가면 어른 3인분을 해치웠다. 음식을 가리는 일도 없어서 해주면 해주는 대로, 사주면 사주는 대로 맛있게 먹었다. 맛 좋은 음식 냄새가 나면 냉큼 식탁에 앉아 코를 벌름거리며 어머니를 채근했다. 어머니는 경대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피로가 쌓일 틈이 없었다. 때로는 경대가 한 번에 먹는 양이 너무 많아서 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식 키우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정원에 가둬놓고 잘 손질해서 어여쁘게만 키우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자라도록 거름을 적당하게 주는 것이 화초에 더 좋듯이, 잘 먹고 소화만 잘 시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경대는 체격이 좋아서 그런지, 타고날 때부터 힘도 장사였다. 어머니가 ..

005. 집안을 세운 복덩이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불안한 일이 생겨날 법도 한데, 경대가 태어난 후로는 액땜이라도 한 것처럼 좋은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무엇을 해도 영업이 잘 됐다. 모르는 곳에 가더라도 거래가 쉽게 이뤄졌고, 자신을 찾는 고객이 점점 늘어 1등 영업사원이 됐다. 덩달아 살림도 크게 불었다. 말씨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낯선 서울생활이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아버지의 성격 덕분에 사람들이 다들 좋아했고, 때때로 보여주는 진지함과 정직함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아버지는 6남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형제가 많은 집이 대부분 그랬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뤄냈다. 아버지는 어릴 때..

004. 퍼주기 좋아하는 경대

1970년대 민중의 삶은 열악하고 처참했다. 1966년 말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한 경제는 대량 실업사태까지 불러 대부분의 가정은 생활이 궁색하기 그지없었고, 먹고사는 일조차 힘에 부쳐했다. 그래서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끼니조차 때우지 못한 빈민촌 사람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만을 짓누르기 위해 ‘국가 안보 저해’, ‘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잡아들이기를 밥 먹듯이 했다. 강경대가 태어난 산동네 사람들의 삶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경대 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집세 걱정 없는 자택에, 방도 두 칸이나 됐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매를 잘 키우려는 욕심에 ..

003. 경대는 장군감

강경대는 1972년 2월 4일, 하월곡동 산동네에서 동백꽃이 첫 움을 트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경대가 태어난 동네는 당시 민중의 척박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3선 개헌1)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경제성장’이라는 사탕발림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강요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조국의 근대화’와 ‘백억 불 수출’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경대가 태어난 날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갑자기 큰 눈이 내렸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영원한 책무와 사명을 양어깨에 짊어지게 될 것을 예감한 듯 찬란한 눈송이가 하염없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스며드는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복덩이를 기다리는 즐거움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첫 아이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