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총을 든 군인들이 효자동 삼거리 한가운데 간이 막사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계를 섰다. 무궁화 공원 앞에는 검은 양복을 쑥쑥 빼입은 경호원들이 청와대 출입차량을 검문했다. 경호원들은 차량뿐만 아니라 효자동 인근을 거니는 일반인들도 불러 세웠다. 검문은 형식적이지 않았다. 안면이 있거나 용무가 확실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몸을 더듬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얼굴도 여러 번 대조했고, 가방 안에 든 물건도 꼼꼼히 살핀 뒤 통과시켰다. 지난해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 이후 검문검색이 강화된 탓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효자동 인근을 지나갈 때면 검문을 피해 일부러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어떤 꼬투리를 잡혀 고초를 치를지 몰랐다.
검문소 앞에 안테나를 구부러뜨린 군용 지프차 세 대가 연달아 나타났다. 앞뒤 두 대가 가운데 차량을 에스코트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뒷짐 지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대통령 수행비서가 달려와 경호원들을 제치고 거수경례를 붙이자 차량은 청와대 방면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대통령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옆에 서있던 비서실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보안사령관이었다.
“각하 강건하십니까?”
보안사령관은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뒤 모자를 벗고 소파에 앉아 각을 잡았다. 대통령은 보안사령관과 독대하기 위해 서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물렸다. 문밖 경호도 서지 말라는 명령도 내렸다. 105보안부 대장이 장준하 실족사 현장을 방문해 검안한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온 자리였다.
보안사령관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각하, 유해분자 추가 공작이 완료됐습니다. 재야에서 나오는 타살의혹은 규명 불능으로 입을 맞춰 놨습니다. 완벽한 뒤처리를 위해 다음 조치를…….”
대통령은 보안사령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말 나오지 않게 사후 처리를 확실하게 하도록.”
그해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장준하가 사망한 다음날 처음으로 만나 47분간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
보안사령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통령 집무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방긋 웃는 얼굴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영부인을 똑 닮은 영애였다. 머리스타일이나 의상, 몸을 가누는 모양새 모두 영부인과 판박이였다. 영부인이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가 쏜 총에 맞고 숨지자 그녀가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대신했다. 그 옆에는 연두색 긴치마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찬미소를 입가에 문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대통령을 들먹이면서 대기업들에게 ‘삥’을 뜯어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최 목사의 딸이었다. 영부인은 죽기 전 최 목사의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그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것이 인연이 돼 최 목사의 딸은 청와대를 제집처럼 들락날락거리며 영애의 비선 비서로 시종했다.
대통령과 보안사령관의 독대가 끝날 즈음, 류노스케는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출전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얼굴로 멍하니 전화기만 쳐다봤다. 뒷골이 욱신욱신 쑤셨는지, 목을 양옆으로 꺾는 동작을 반복했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류노스케는 재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벨소리를 질색했다. 벨소리가 길어지면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벨소리가 더 길어지면 미칠 듯이 고함을 지르며 책상 위의 물건을 죄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류노스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주와 증오가 들끓어 오르는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왔다는 표정이었지만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사라지고 야비한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모가지 딸 사람이 있는데 말야. 높은 데서 움직이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중정이나 보안사도 마찬가지고. 아무도 모르게 사고로 위장할 방법이 없겠나? 자네가 성분 좋은 애로 하나 물색해 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할 놈으로.”
류노스케는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비열한 계교를 머릿속에서 떠올릴 때마다 짓는 미소였다. 그의 간악한 미소 뒤에는 언제나 술책과 가태가 넘쳤다. 살무사가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먹이를 낚아채 듯이 사악한 무자비와 위선을 미소 뒤에 숨겼다. 어쩌면 그에게는 믿음이나 신뢰보다 거짓과 배신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제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끈기와 용기, 인내라는 미덕이 필요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비록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며 등쳐먹고 살았지만 명석한 두뇌와 선뜩선뜩 차갑게 몰아치는 카리스마로 제법 병원 내에서는 인정받는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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