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하다는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사람들
밤마다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은 벽에 기대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졸면서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홀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아
남몰래 간직한 그들의 아픔을, 이제는 반갑게 맞아들여라.
새벽 2시. 영등포 유흥가 뒤편 골목길에서 시끄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넷이었다. 검은색 양복에 짧은 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와 금목걸이. 얼핏 봐도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새였다. 술에 취한 얼굴로 노랫가락을 늘어놓던 이들은 G모텔로 들어가 아치형 창문을 두세 차례 심하게 두드렸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는 여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깜짝 놀라 일어난 그녀는 숙박료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5만 원이라고 말했다.
“5만 원. 왜 이렇게 비싸 씨발. 시설도 꼬지구만.”
“비싼 거 아닌데요. 남자 네 분이 주무실 수 있는 큰 방이에요.”
“야. 딴 데 가자.”
남자들은 바닥 한편에 쌓인 신문지 뭉치를 발로 차며 문을 확 밀치고 나가버렸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온갖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어내도 전혀 감동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요?”
눈가 주름에서 순함이 뚝뚝 떨어지는 40대 초반의 아주머니였다.
“사장님이세요?”
“종업원인데요. 사장님은 오늘 밤에 안 나오세요.”
나는 그녀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인터뷰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 같은 사람한테 들을만한 얘기가 뭐 있나요?”라며 너무나 뜻밖이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또 “사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고 숙박업에 피해도 주고 싶지 않다.”며 시선을 피했다. 숙박업 종사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눈치였다.
말 못할 사연 간직한 사람 많다
1층 계단 끝에 있는 의자로 안내한 그녀는 커피를 타 들고 나타났다. 바로 맞은편에는 101호부터 시작하는 객실이 몇 개 있었는데 어디선지 소곤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쇠줄이 한꺼번에 끌리는 듯싶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하룻밤이지만 왠지 모르게 은밀한 느낌은 숨길 수 없었다.
‘한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나이가 많지만 15년 전부터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보니 성이 ‘한’ 씨여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씨의 아버지는 결혼 후 사업에 실패한 뒤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괴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의 짐을 놓아버린 것이겠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방탕’이라는 단어를 썼다. 생존의 마법사인 효모가 발효하고 성장해 불어나는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점점 커져버린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됐다. 조금 남아있는 재산마저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 뒤 집을 나가버린 까닭이다. 그때부터 한 씨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연명해야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는 괜찮았어요. 세 식구 먹고사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살았거든요.”
종이컵을 쥐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차온다. 돌과 담벼락에 달라붙어 있는 이끼처럼 땀이 엉겨 붙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습하다.
“폐가 좋지 않아 병약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오빠도 집 나간 지 오래였고 연락도 안 됐지요. 처녀 때 동네 어르신들이 아버지가 영등포 큰 시장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향 집을 처분하고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역에 내렸지요. 막상 서울에 오니까 무섭더라고요. 아버지를 찾을 방법도 없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에서 노숙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처음 서울에 올라와 한식집에서 일했어요. 술집, 병원, 슈퍼마켓, 노래방 등등 여러 군데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 살았는데 손찌검이 심해서 도망쳐 나왔어요. 입을 옷도 못 챙긴 채 돈 몇 푼 들고 나와 지금 이 여관에 묵은 거예요. 방값 내기도 힘들어서, 세끼 밥을 챙겨 먹을 수 없었어요. 그 남자가 나타날까 봐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섭고요. 점심때마다 자장면을 한 그릇씩 시켜 먹었어요. 배고프면 욕실에서 물을 마시고요. 종일 방 안에서 살았어요. 사나흘 있으니까 사장님이 오셨어요. 하루에 자장면 한 그릇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고요. 다 아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눈물이 나서 참을 수 없었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펑펑 울었지요. 사장님이 내려오라고 하더니 밥을 챙겨주더라고요. 그 집 딸이랑 아들이랑 겸상을 했는데 어려워서 도저히 밥이 넘어가질 않았어요. 울다가 밥 먹다가 사정이 통해 여기서 일하게 됐어요. 사장님 남편도 가정폭력이 심하고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라고요. 이곳은 세상이 버린 저를 안아준 곳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보지만.”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 씨와 같은 사연을 간직한 사람이 많았다. 큰 호텔이나 규모 있는 여관 빼고는 비슷하다. 조선족 동포들도 많았고, 일요일마다 청소하러 오는 일용직 파출부들도 있었다.
이 사회에 믿음이 없어요
여인숙과 여관 간판들이 줄줄이 걸려있는 영등포 골목. 대문마다 ‘달방있음’이라고 적힌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한쪽 대문이 열린 C여관 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출입구는 매우 비좁았지만 안쪽은 제법 넓었다. 담 한쪽에는 사철나무와 어린 전나무를 심어놓은 정원도 있었다. 여관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가정집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아주머니가 세제 냄새 물씬 풍기는 하얀 이불보를 널고 있었다. 대부분은 빨래를 전문 세탁업체에 맡기지만 이곳은 달랐다.
“빨래가 많지 않아서 직접 해요. 양이 많으면 맡기는 게 싼데 이 정도 빨래는 그냥 집에서 하는 게 나아요.”
“어떻게 하다가 숙박업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어요. 찝찝하게 생각했는데 해보니까 그렇지 않네요.”
노란 호박꽃을 연상시키는 푸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얼굴이 몰라보게 굳어졌다. 거절도 승낙도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색안경을 쓰고 숙박업 종사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느껴져 가슴이 아파왔다. 충분한 설명을 거듭한 끝에 짧게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박 씨는 30여 년 전 숙박업을 시작했다. 페인트칠을 하는 남편의 수입이 일정치 않아 하루하루 생활을 걱정하는 그녀에게 먼저 여관을 하고 있던 시댁 친척의 권유였다.
“시고모 댁이 여인숙을 잡아주셨어요. 돈이 없어서 모두 빚이었죠. 빚 갚느라 먹지도 못하고 밤새 일해서 몸이 말이 아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시어머니 밥 챙겨드리고 손님들 나가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일이 많았죠. 연탄가스 때문에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기름이나 가스보일러가 아니라 모두 연탄을 땠거든요. 고생한 거 일일이 설명 다 못해요. 10년 정도 일하다 빚 갚고 자리를 옮겼어요. 조금 규모를 키워 여관을 했지요. 좀 형편이 나아졌나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남편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고, 애들 공부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고요. 예전에는 달마다 경찰들 돈도 챙겨줘야 했어요. 일부러 천 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넣었어요. 두둑하게 보이라고요. 요즘은 그런 거 없어요. 험한 시대라 괜히 꼬투리 잡을까 봐 그랬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잖아요. 애들 때문에도 속 많이 탔어요. 사람들이 여관집 자식이라고 놀리잖아요. 어떤 부모들은 우리 애들과 같이 놀지 말라고 얘기할 정도였다니까요. 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제 자식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요. 믿음이 없어요. 정말. 이사회에.”
박 씨는 여기까지 말하다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말을 하다 보니 거리낌 없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빨래를 널었다.
숙박업에 대한 편견 만드는 손님
영등포보다 훨씬 규모가 큰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는 강남, C호텔에서 일하는 W 씨와 K 씨. 이들은 실명보다 이니셜로 적어달라고 부탁한다. ‘외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이유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숙박업 종사자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했다. 무조건 ‘음란하다’고 단정했다. 색안경도 이런 총천연색 색안경이 없다.
전주가 고향인 W 씨는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고, 돈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고, 또 지방에서 해 먹을 것이 없어 무작정 상경하다 보면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숙박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W 씨 부모님도 아들이 숙박업에 종사하는 것에 반대가 심했다.
“숙박업에 대한 편견이에요. 음란한 직업 아니냐, 거기서 뭐 하느냐고 말들이 많았지요. 나이 드신 분들은 잘 모르시잖아요. 저희들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고객을 위해서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고 있어요. 당당하게 일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연스럽게 떳떳하지 못하게 돼요.”
K 씨도 “숙박업소에서 일하면‘바닥’으로 보거나 음란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여기에서 하는 일은 카운터, 주차관리, 룸서비스(수건, 음료, 담배 등 심부름)예요. 청소하는 분은 따로 계시고요. 전혀 음란한 일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해요. 다른 일처럼 하나의 직업일 뿐이거든요. 요즘은 시설이 좋아져서 영화를 보러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대낮에 고급차를 끌고 와 신변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들과 함께 오거나 외국인 관광객, 출장, 친구들끼리 놀러 오는 경우도 있지요. 예전엔 간혹 남자분 혼자 오셔서 여자를 불러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객실에서 인터넷이 다 되거든요. 저희들이 따로 하는 일은 없어요.”
영등포 G모텔에서 일하는 한 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서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여자가 여관에서 일하면 ‘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여관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몸 파는 줄 알아요. 카운터에서 손님 받고 물이랑 수건 갖다주고 청소하면 땡이거든요. 참 어이가 없어서. 가끔 손님들이 여자 불러달라거나 치근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객실로 자꾸 부르기도 하고 팬티만 입고 카운터로 와요. 발가벗은 채 문을 열어놓고 있는 분도 있고요. 이상한 손님들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몹쓸 년으로 만드는 거예요.”
여관을 직접 경영하는 박 씨도 비슷했다. 자신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웃어 넘겼는데 아이들은 달랐다는 것. 한 번은 같은 반 친구들이 자꾸 놀려서 아들이 집에 와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아이들 모르게 학교에도 자주 갔어요. 사춘기가 되니까 너무 민감해져서 선생님하고 상의를 많이 했죠. 애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른 일을 하려고 했는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세상의 차가운 냉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반말은 기본인 데다 상소리, 폭행도 다반사다.
“손님들이 함부로 대해요. 바닥으로 보지요. 고급 승용차 몰고 오는 사람들, 건달들 다 비슷해요. 반말에 상소리도 하고요. 한마디로 매너가 꽝이에요. 제일 싫은 건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들이에요. 방값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들도 싫고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꼭 그런 사람들을 만나요.”
그럼에도 손님에 대한 서비스 정신은 투철하다고 이구동성이다.
“물리적으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최대한 비위를 맞춰드려요. 제 직업이잖아요. 하지만 폭력을 행사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면서 영업을 방해하면 경찰을 부르거나 대항할 수밖에 없어요. 속으로 무시해도 좋아요. 반말까진 이해해요. 하지만 저희들 고충을 아신다면 상소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똑같이 일하는 직업인으로 봐주세요. 색안경 끼는 사고를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숙박업에 대한 편견은 종사자들이 아니라 손님들이 만들고 있었다. 손님들의 음란한 행태와 무례한 행동이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형국이다. 비춰보면 이들은 인생이 바닥이 아니라 바닥 같은 손님들을 뒤처리하는 선량한 우리이웃이 맞다.
인터뷰를 마치고 허름한 여관을 찾았다. 이날은 왠지 이곳에서 쉬며 원고를 정리하고 싶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맥주를 마시면서 이날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러나 고된 육체가 잠을 몰고 왔다. 잠시 후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빗소리였다. 갑자기 아치형 창문 사이로 졸고 있는 한 씨의 얼굴이 생각났다. 한 씨는 “외로울 때면 가수 방실이의 ‘서울탱고’라는 노래를 좋아해 자주 흥얼거린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월급날 감자탕 집에 함께 가고 싶다면서.
잠 못 이루는 밤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밤에 잠을 못 자요. 새벽에 오는 손님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대부분 숙박업 종사자들은 카운터에서 졸다시피 밤을 보내다 새벽녘이 돼서야 자고 오전 늦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규모가 큰 모텔이나 호텔에서는 격일제로 근무해요. 오전에 출근해서 이튿날 오전에 다음 근무자와 교대하죠. 그런데 격일제 근무가 더 힘들대요. 강남 C호텔에서 근무하는 W 씨의 얘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한 달에 15일 일해요. 오전에 퇴근해서 잠자면 저녁이 돼요. 일어나서 밥 먹고 쉬다 다시 자면 또 출근이죠. 이런 생활이 반복돼요. 개인 생활이 없어요. 무척 고단해요.”
찜질방과 고시원
대도시에 찜질방이 생기면서 여관을 찾는 손님이 줄었어요. 저렴하게 하룻밤 묵을 수 있잖아요. 대부분 24시간 영업을 하고 있어 여관 대신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여관이나 여인숙에는 ‘달방’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요즘은 고시원이 생겨서 안 나가요. 어떤 이들은 찜질방에서 장기체류도 하더라고요.
대실
여관에는 낮이나 밤에 잠시 여관방을 빌리는 대실 제도가 있어요. 하루 숙박 요금보다 아주 저렴하죠. 보통 2시간이 기본인며, 잠시 은밀한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자주 이용합니다. 누구냐고요? 대부분은 연인이랍니다.
서울탱고
G모텔에 근무하는 한 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노래는 몇 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가수 방실이의 곡 ‘서울탱고’예요.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사무치네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에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책 > 밥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9. 포장마차 주인 - 포장마차요? 쉽게 보지 마세요 (0) | 2021.04.07 |
---|---|
008. 트럭 노점상 - 길 위에서 삶의 희망을 팔아요 (0) | 2021.04.07 |
006. 연극배우 - 인간 구실도 못하고 살아요 (0) | 2021.04.05 |
005. 누드모델 - 누드가 왜 외설로 보이죠? (0) | 2021.04.05 |
004. 무명가수 - 얼굴은 무명이지만 노래는 유명해요 (0) | 2021.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