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내 마음속의 벗, 강경대

이동권 2021. 4. 4. 21:19

1991년. 나는 신입생 수련회조차 빠질 정도로 학교에 소홀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학 새내기였다. 뭔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곳이 꼭 불편을 참아야 하는 학교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여정 여정마다 간격을 둬야 차갑고 잔혹한 고통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좀 더 쓸쓸하고 고독한 것에서 성숙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생활 이외에 뭔가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민중문화운동단체에 들어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포스터 때문이었다. 


포스터는 두 주먹을 움켜진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몇몇 청년들을 거칠게 파놓은 판화였다. 섬세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이미지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무엇보다도 그 판화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깃들어 있지 않은 듯해서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거기에서 미지의 세계를 보았던 것 같다. 입시에 지친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이후부터 나는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우면서 데모라는 것을 시작했다. 당시 분위기를 얘기하자면, 그때 처음으로 배웠던 노래는 ‘투쟁가’였고, 처음으로 토론했던 책은 ‘운동권 필독서’였다. 또 거리에 나가서는 시위대 앞에서 북을 쳤고, 공장에 가서는 노동자들 앞에서 정치극을 했다. 


나는 매일 같이 빡빡한 일정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가졌던 작은 소망을 다시 꿈꾸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 나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휴식이다.’ 


그 시절 선배들은 입에 잔소리를 달고 살았다. 목소리가 작다, 걸음걸이가 왜 그러느냐, 몸을 자유롭게 해라, 공부 좀 해라, 머리는 뒀다 어디에 쓰느냐, 자신감은 어디에 팔아먹었느냐, ……. 하나부터 열까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은 답답한 것들에 대해 선배들은 그렇게 닦달을 했다. 도대체 나의 꿈, 욕구, 자유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모든 것이 생각과는 달랐다. 내 젊은 날이 아낌없이 소진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도 모르게 탈출을 꿈꿨다. 나처럼 성정(性情)이 여린 사람과는 맞지 않은 일이라며 물러서기도 했다. 그러나 쉽게 돌아설 수 없었다. 함께 고생하는 동지들이 눈에 밟혔고 이왕 시작한 일, 한번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선배들의 충고를 빌리자면 ‘계급의 한계를 자성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꾸짖으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곤 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제멋대로 굴어본 적은 없었다. 대학 새내기가 한눈을 팔기에는 너무도 엄혹한 시대였다. 


나는 선배들을 따라 이 견고하고 냉랭한 현실 앞에서 열정적으로 팔뚝질을 했다. 이 시절은 내가 생각했던 대학생활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지만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느끼는 갈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을 주었다.


봄이었다. 며칠 전부터 사납게 내리던 소나기가 멈추고 달무리가 지면서 매우 화창한 봄을 예감할 수 있는 무렵이었다. 그러나 거리는 연일 최루탄 가스와 ‘노태우 정권 타도’ 구호로 뒤범벅이었다. ‘수서비리’와 ‘페놀방류사건’으로 서서히 달아오르던 정국이, 4·19를 기점으로 청년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면서 치열한 대결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4월 26일. 거리에 나서면 항상 선두에 서서 ‘북재비(북을 잘 치는 사람)’를 하던 한 선배가 쫓기듯이 민중문화단체 사무실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선배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뺨에는 애틋한 원망이 서렸고,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났다는 예감이 들었다.


선배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슬퍼 보여 나도 따라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선배는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명지대생이 백골단한테 맞아 죽었어.” 


모두들 넋이 나갔다. 이 무자비한 정권에서, 언젠가는 벌어질만한 일이 기어코 터졌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아. 이 잔인한 세상이여.”


“개 같은 노태우 새끼.”


기어코 벌어진 것인가. 강경대의 죽음 뒤로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얼굴이 겹쳤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광주에서 태어난 나는 도청 앞에 집이 있어 많은 시위를 목도했다. 재미삼아 친구들과 어울려 시위에도 참가했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다 백골단에게 쫓겨도 봤다. 어른들을 따라 눈에 랩을 붙이고, 코밑에 치약을 바르고, 그렇게 하면 최루탄 가스가 주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도망치다 광주천에 몸도 던졌다. 그런 위험 속에서 엷은 흥분을 느끼며 소년 시절 추억의 한 부분을 기꺼이 채웠다. 


어쩜, 어린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는……, 길에서 마주친 태극기에 덮인 수많은 사람들……. 기억하면 할수록 강경대의 죽음은 악몽이 돼 나를 짓눌렀다.


이날 나는 강경대를 보내면서 어른들의 세상을 어렴풋이 동경했던 어린 티를 벗어냈다. 꿈꾸듯 잠겨 있는 안개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땅,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나는 북을 들고 거리로 나가 데모를 할 때마다 그것을 ‘환희’라고 부르게 됐다. 


강경대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평전’에 대한 얘기가 귀에 흘러 들어왔다. 내 마음의 고향, 그 아래에 살고 있던 벗을 만난 기분이었다.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을 할 때마다 늘 삶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도록 가슴에 남아 고상한 빛으로 이끌어 주던 벗. 그래서 내가 꼭 그의 얘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한때 정말 공부란 게 하고 싶어 명지대학교에 몸을 담았던 나에게 있어서 그의 평전을 쓴다는 것은 ‘동문’으로서의 운명적인 조우이기도 했다.


무작정 평전을 쓰겠다고 덤볐지만, 그동안 강경대를 가까이에서 겪었던 사람들이나 오랫동안 기억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핀잔을 들을 것만 같아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시대의 임무처럼 내게 주어진 일이기에, 수많은 독자들을 위해서 부족하나마 잔재주를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유행에 동조하거나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책이 아니라 삶에 위로와 위안을 주며 늘 곁에 두고 싶고, 선물하고 싶을 만한 책을 써내는 일 말이다.

故 강경대 열사 20주기, 2011년 초봄의 문턱에서
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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