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누구도 말하지 않은 바다이야기

이동권 2021. 4. 4. 22:03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쓸쓸함이 어리면 바다로 갔다. 무한히 뻗은 길을 따라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파도가 바람을 물어다 주는 바닷가, 운무가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 이른 새벽에 바다로 나가는 어부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바다는 지독한 사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생명력 넘치는 치유를 선사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벗이었고, 끝없는 정화의 노래를 들려줬던 바다와의 대화이자 기행이며 헌사다.


늦은 밤 빌딩 숲을 거닐다 밤하늘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삶은 무엇인지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나아가 나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해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잦은 폭주와 적막한 고독이 이어졌고, 근심은 나날이 커졌다. 도시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별한 우정을 만들 기회가 필요했다. 많은 곳을 다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걸었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떠났다. 언제나 내 관심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 해답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즐겁게 웃는 와중에도 고심과 갈등은 내재돼 있었고, 시시때때로 온갖 사념에 사로잡혔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을 떠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잠을 설쳤다. 반짝이는 별들의 만보(한가롭게 슬슬 걷는 걸음)를 관찰하고서야 겨우 잠에 들었고, 뜬눈으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다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골아떨어졌다. 


애타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대상이 바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밀가루 반죽처럼 매끄러운 바다, 조가비가 반짝거리는 모래밭,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는 밤배,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나는 갈매기, 자잘한 홍합이 다닥다닥 붙은 갯바위, 거세게 방파제와 포옹하는 파도 그리고 외딴곳에서 홀로 반짝이는 등대는 나를 낯설어하지 않고 온전히 반겨 줬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떠났다. 그 마음은 어쩌면 사랑보다도 진중하고 숭고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순수한 마음 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할 수 없어 애정과 믿음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젊은 날의 여행은 이제 끝났다. 내 영혼의 순수함은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수평선 너머, 갈매기만이 갈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창창한 열정도 사라졌고, 나는 그저 텅 비고 비워진 마음으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이해와 관용의 마음으로 벗들의 삶과 고통, 오랫동안 추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은 신념에 적합한 칭찬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을 수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신은 왜 떠나는가? 돈과 시간을 투자해 나선 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얻고 오는가?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 위해서? 맛난 음식이 먹고 싶어서? 아니면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무작정 떠나 낯섦을 경험하는 것도 좋다.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것도 좋다. 그런데 그다음은 무엇인가? 자신을 살펴보지 못한 여행은 행복으로 포장된다. 마음에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자랑처럼 버킷리스트에 X를 체크하며 자기만족으로 끝나고 만다. 그것을 원하는가? 


고통은 외면적인 현상에만 치중해 본질을 보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겉모습은 존재의 가치를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가식과 허영의 산물이었다. 본질을 사색하면 풀리지 않는 고민은 없었다. 설사 그것이 혹독한 성찰을 요구한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을 이유를 갖게 했다. 여행 또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어차피 죽어야 할 숙명 위에 놓인 인간의 여정 중 하나다. 삶에는 연습이 없다. 사랑하는 것도, 한없이 성숙해지는 것도 모두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놓여 있다. 그럼 여행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야기가 필요하다. 최소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배움은 느껴야 여행은 의미가 있다. 특별한 음식과 멋진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여행의 요소는 충족되지 않는다. 알아보고 사색하고 느껴야 여행은 다시 떠나는 이유가 된다. 가끔씩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뜰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곤란하다. 단순히 휴식과 유흥을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나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여행이라고 착각한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어디에서든 삶은 계속되고,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다시 살벌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바다와 나눴던 이야기를 엮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바다살이가 나에게 들려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옮겼다. 대화의 주제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가리지 않았다. 이 책에서 바다 냄새가 나고 파도 소리가 들린다면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 곳곳에서 만났던 풍경과 상상 속에서 만났던 바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행 이미지는 크로키로 고스란히 담았다. 그림 도구는 여행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인펜을 사용했다. 굵직한 선과 우스꽝스러운 형태, 수정이 불가능한 사인펜 그림은 낯선 곳에서 맛보는 거친 감회와 흡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먹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 냄새를 기억하면서 고매한 자연 풍광을 즐기길 바란다. 아울러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내성과 자각의 시간도 갖길 바란다. 우리가 성직자가 아닌 이상 일생을 성찰에 투자할 필요는 없다. 여행의 일부면 족하다. 현실은 각축장이다. 너나 나나 모두 서로 잘살기 위해 물고 뜯는 전쟁터다. 그런 환경에서 갖는 성찰은 협소하며, 항상 쫓길 수밖에 없다. 멋진 곳이 아니라도 좋다. 유명한 곳이 아니라도 괜찮다. 삶의 터전에서 잠시 떠나 사색의 시간을 가져 보자.


내가 찾아간 바다는 연평도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목숨이 냉전 이데올로기의 상징이자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던 바다에서 자연이 주는 가르침과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되새겨 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여행 에세이지만 다소 무겁고 진중하며 과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는 바다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바다로 떠나는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나로서는 무척 뿌듯하고 힘이 나겠다. 특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청춘들이 이 책을 읽으면 더욱 좋겠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실제 내가 했던 방황과 내가 매달렸던 고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의 세계관은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헤세의 소설은 극단적인 성찰과 학문의 몰두를 강조하는 괴테의 정신주의가 아니어서 좋았고, 무위와 선의 실천을 강조하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주의가 아니어서 편했으며, 실의와 절망에 빠진 현실로 피로를 느끼게 했던 셰익스피어의 허무주의가 아니어서 기뻤다. 기회가 된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유리알 유희>를 비롯해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 등을 읽어 보길 권한다. 다만 헤세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근거해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우선시했지만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삶을 고민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일차적으로 여겼다. 

어느 바닷가에서
이동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