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밥줄이야기

012. 조선족 식당아줌마 - 말투는 달라도 같은 동포예요

이동권 2021. 4. 7. 10:04

외국인이라고 차별받는 사람들

 

사랑해라는 말을 같이 쓰는
우리 동포들이 조국을 찾아와도
진정으로 껴안아줄 사람이 없네.

 

 

“아저씨.” 식당에서 억센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 여자가 창밖으로 몸을 젖혀 한 사내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큰일이 난 사람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계속 “아저씨.”를 외쳤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그가 식당에서 뭔가를 먹고 계산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약간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틀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운 하늘처럼 푸르무레한 냉기에 잠겨있다. 그는 여자와 몇 마디를 나눈 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흔들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뛰어나와 사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돈을 받아 들고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 책에 얼굴이 나가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애써 사진을 거절했다.

식당에서 만난 조선족 아줌마


정연숙 씨는 2002년 흑룡강에서 왔다. 한국에 시댁 삼촌이 살고 있어 비교적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친정 부모와 함께 산다. 하지만 친정부모의 체류기간은 단 1년뿐이다. 현행법상 시부모는 모시고 살 수 있지만, 친정부모는 위법이다. 친정부 모가 계속 한국에 있으려면 취업을 해서 체류자격을 외국노동자로 변경해야 한다.  


정 씨의 남편은 병따개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홀로 거주하는 조선족보다 상대적으로 외로움은 덜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딸은 중국에 있는 오빠가 키우고 있다.


정연숙 씨는 “자식들이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더욱 힘든 것은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이라고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씨는 또 “중병에 걸려도 의료보험이 안 되다 보니 병원에도 못 가고, 약값도 만만치 않다.”면서 ‘자신은 동포가 아니라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정 씨는 양장 기술자였다. 처음엔 친척방문 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배운 기술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식당에서 일한다. 옷 만드는 스타일도 다른 데다 보수도 좋지 않다는 것. 더 큰 문제는 먼지와 소음,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녀는 “공장의 근무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다.”면서 “힘들어도 식당에서 일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딩동.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정 씨는 급하게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나와 대화 중이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부엌 가까운 곳에 서서 주방만을 계속 응시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녀는 음식이 나오기가 급하게 손님 테이블에 음식을 놓기 시작했다. 너무 바쁘게 돌아다녀 식탁 뾰족한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것만 같다. 나는 한참동안 멀뚱멀뚱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술에 취해가는 밤의 도시는 조선족(재한조선인)들의 돈벌이 무대이다. 이들은 보통 간병인, 가정부, 공사판 노동자로 일하지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주점이나 음식점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은 한국인들이 꺼려하는 19개 업종에만 취업할 수 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위험하고 힘든 일이 전부다. 


한바탕 바쁜 일이 끝난 뒤 정 씨는 “할 말이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긴 하지만 문화 자체가 중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서 “넓은 마음으로 동포를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라가 작다고 마음이 좁지 않을 텐데, 한국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성내고 소심하다는 것.


정 씨와 같은 식당에서 일하는 이춘희 씨는 중국 심양에서 온 조선족이다. 아버지와 동생, 아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살고 있다. 7년 전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남동생도 중국으로 돌아가 이젠 꼼짝없이 혼자 산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이 씨에게 다짜고짜 배가 고프다고 조른다. 한눈에 보아도 노숙인이 분명했다. 이 씨는 밥 한 그릇을 비닐봉지에 넣어준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려는 그에게 “반찬 없이 어떻게 먹어.”라면서 몇 가지 음식을 함께 챙긴다. 배고픈 사정은 배고픈 사람이 안다더니 맞나 보다.


이 씨는 한국에 와서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자다가도 문득 가족이 생각나면 ‘돈이 뭔지’하는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다.”고 눈을 끔벅거리다. 그래도 이 씨는 “좋은 사장님을 만나 다행스럽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월급 한 푼 받지 못하고 중국으로 강제출국당한 사연이 남 얘기가 아닌 까닭이다. 이 씨는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보고 싶어 더욱 속이 탄다. 오늘도 그녀는 만 원짜리 전화카드 한 장을 들고 전화방에 들를 것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마세요


박정숙 씨는 2004년 연길에서 왔다. 대구 지역을 떠돌다 1년 전 서울에 올라와 식당에서 일한다.


“아줌마 중국 어디에서 왔어요?”


취기가 좀 가신 손님이 박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구에서 왔어요.”


“말투가 아닌데. 조선족 아니에요. 대구 어딘데요?”


박 씨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 때 일했던 곳의 동 이름 몇 군데를 둘러댄다. 그러나 손님은 “아니구만.”이라고 받아친다. 그녀는 손님에게 눈을 찔끔 감고 얼굴을 돌려버린다. 


박 씨가 스스로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의 편견도 있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얘기하면 ‘불법’은 아니다. ‘미등록’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을 가지고 우리 사회는 ‘불법’ 취급을 한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우리 사회는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안산조선족교회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큰 사위가 한국 국적을 신청해 놓고 일하러 나갔다가 단속에 걸려 수갑을 차고 지하 감옥에 끌려갔다.”면서 “직원들은 면회도, 전화도 허락하지 않고, 보호소에 있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다.”고 분노했다. 결국 그는 벌금 100만 원을 내고 나서야 보호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현행법에서 한국 국적을 신청한 사람은 일을 못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단 한 푼의 지원금도 주지 않는다. 어디에서든지 돈을 구해 ‘참고 버텨라’는 식이다. 


생계가 어려워 일하러 나갔다 잘못 걸리면 벌금이 100만 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미등록(불법체류) 상태에서는 단속에 걸리면 강제로 출국을 당한다. 체불된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중국으로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호소의 비인권적인 행태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3년에 연길에서 온 이향춘 씨의 사정도 딱하다. 이 씨의 부친은 10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주저하지 않고 한국행을 택했다. 더군다나 가족들 교육문제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씨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손아귀의 힘이 빠져 수화기를 계속 놓쳤다.”면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했다. 


이 씨는 중국에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크다. 


“얼른 돈 벌어서 중국에 들어가려고요. 가족들이 보고 싶어 밤마다 눈물을 흘려요. 성격이 명랑하고 밝은 편이라 잘 견뎌요. 일은 힘들고 외롭지만 가족들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이 씨의 가슴에 맺힌 설움이 오죽할까 싶어 입맛이 써진다. 조선족이라면 눈을 아래로 뜨고 쳐다보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속사정을 알고나 있을까. 조선족도 우리와 같은 인격체이며,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


연길에서 살았던 정천희 씨는 넉넉한 마음씨와 환한 미소로 손님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밥도, 반찬도 잘 챙겨주고 먼저 안부를 묻는 성격이다. 정 씨는 4년 전 친구 소개로 중국에서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20여 일을 정씨의 집에 머무르면서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씨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을 벌어야 했다. 여섯 가족의 생활비와 함께 대학에 다니는 동생들 뒷바라지도 큰 딸인 자신의 몫이었다. 때문에 정 씨는 한국에 가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남편 될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정 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정 씨는 “남편이 돈도 좀 있고 괜찮게 산다고 하니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서 “결혼 당시 기대가 정말 컸다.”고 회고했다. 정 씨는 정식으로 혼인 수속을 밟았고 결혼비자를 얻어 이듬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녀는 배신감과 두려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남편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단칸방에서 근근이 일하며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정 씨가 오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며 선처를 구했다. 정 씨는 다시 중국으로 갈 수도 없고 한 번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집에서 놀던 남편은 계속해서 정 씨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혼하면 넌 중국에 가야 된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냈다. 


정 씨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남자를 냉정하게 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정 씨를 위협하는 것도 모자라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매 맞는 것보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면서 “따로 살면서도 꼬박꼬박 남편에게 돈을 부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눈물마저도 메말라 버린 듯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하다. 정 씨는 한국에 온 지 3년이 지나 남편과 이혼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면,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대볶음집을 찾았다. 흑룡강에서 왔다는 조선족 여인의 얼굴이 시무룩하다. 잠깐 얘기해도 괜찮겠느냐고 묻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내가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라면서 “무슨 일 때문이냐?”고 거든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며느리는 한국말을 잘 못한다.”며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말했다.


그녀는 23세 때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왔다. 지금은 시댁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시어머니는 “둘이 좋아서 사는데 말릴 일 없다.”면서 “며느리도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인의 미소는 왠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나는 찜찜한 마음으로 식당에서 나왔다. 
안산조선족교회에서 일하는 오세열 목사를 만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오 목사는 성직자이기 전에 조선족들의 각종 민원을 상담해주는 친구 같은 사람이다.


“나만 행복하다고 마음이 좋겠습니까. 시댁에서 일하면 중국에 있는 집에 돈을 부칠 수 없으니 걱정이 많았을 겁니다. 사랑해서 살지만 중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잠을 설치는 동포들이 많아요.” 


조선족과 한국인의 국제결혼에는 문제가 많다. 조선족들은 한국 국적을 얻기 전까지 온갖 수모를 참아야 한다.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려고 해도 제약이 많다. 이를 견디지 못하면 이혼을 선택하게 된다. 한국 국적을 얻게 되면 이혼은 더욱 잦아진다. 오 목사는 ‘이혼 때문에 조선족의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어찌 보면 문제는 돈’이라고 말했다. 


“조선족 여자들은 죽도록 일해 남편한테 바칩니다. 이혼하면 중국에 가야 하니까 안 들어줄 수 없어요. 반대로 결혼한 사람이 한국에 온 뒤 남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제결혼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죠,”


오 목사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한 동포1세 할머니는 “남편의 상습적인 폭행으로 경찰서에 가도 ‘그냥 살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은 중국에게 평등의식을 배워야 한다.”고 거들었다.


한국인과 조선족 커플의 결혼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혼율이 절반에 이를 정도이다. 이유가 있는 이혼이겠지만, 쓰리고 아픈 상처를 남긴다. 국제결혼을 하는 가정의 52%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2세 양육도 어렵다. 둘이 벌어야 중국에 돈도 보낼 수 있고, 생계도 유지된다. 결국 이들은 아이들을 중국에 보낼 수밖에 없다.


한국 법무부는 동포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취업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방문취업제’를 시행했다. 중국이나 구 소련지역에서 거주하는 동포들이 자유롭게 입국해 3년 동안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방문취업제’는 한국어 시험에서 기본 점수를 획득한 동포를 무작위로 추첨해 선택한다. 동포들에게 한국어 시험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조선족 사이에서 ‘방문취업제’ 주의보가 내려졌다고 오세열 목사는 말한다. 


“요즘 한국어 취득 시험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요. 시험에 합격하면 한국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학교를 세워 시험을 보게 해요. 결국 이 제도도 돈 있고 학력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죠.”


러시아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더욱 문제다. 이곳은 학력도 낮고 생활도 매우 어렵다. 또 지역이 매우 넓어 시험을 보러 가는 것조차 어럽다. 한국어 시험은 공관의 면접으로 치러진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다 한국에 오면 적응이 힘들어요. 중국은 사회가 보장해주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거든요. 동포 1세들은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2세들은 살만해요. 성실하게 일해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있고요”

 

안산 조선족교회에 모인 조선족 동포1세, 2세와 오세열 목사(제일 오른쪽))

외국인 취급 받는 조선족


한국 사람들은 동포에게도 외국인 취급을 한다. 조선족에게 사고가 나도 도움을 주지 않으며, 살인사건이나 강도사건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의심을 한다. 그래서 동포들은 ‘귀한동포연합회’를 만들었다. 수시로 벌어지는 인권침해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거리청소나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의 말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뇌수술을 받았는데 입원비만 8백5십만 원이 나왔어요. 하지만 버스회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조선족의 잘못으로 몰아갔어요. 가족들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오 목사님을 만나 병원비는 받을 수 있었어요.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회사의 관대한 처우만 바란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에요.” 


한국의 조선족 커뮤니티에는 ‘조선족의 친구들’과 ‘귀한동포연합회’가 있다. ‘귀한동포연합회’는 구로, 영등포, 안산지회까지 조직했다. 인권 도우미를 자처하고 있는 교회도 ‘커뮤니티’ 혹은 ‘사랑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족의 한국 생활을 돕기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 목사에게 물었다. 


“우선 기술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어요. 국적을 취득한 사람만 기회가 있죠. 정부에서 개방을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해도 한국인과 조선족은 월급부터 달라요. 한국 국적이 있다고 해도 차별은 여전하죠. 체불임금도 큰 문제입니다. 한국 물정을 모른다고 교포들만 찾아서 고용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희는 2달 월급을 안주면 그냥 나오라고 해요. 많은 돈을 받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교포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에요. 경찰들은 2천만 원 이상 체불되어야 처벌할 수 있다고 나 몰라라 하고요. 자녀교육도 문제입니다. 자녀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교육이나 특별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족 중에서 기분 좋은 소식들을 전한 이들도  많다. 중국에서 학교 선생님이었던 한 조선족은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고, 전기배선업체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된 사례도 있다.
조선족들은 하나 같이 희망한다.


“한국사회가 열려있지 않지만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올 것이라고 믿어요. 그런 바람이 있으니까 오늘의 힘겨움도 애써 견디고 있고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얼마나 되나요?

중국 각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약 2백만 명에 달합니다. 지역은 주로 동북지방에 집중돼 있습니다. 길림성 약 120만 명,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약 80만 명, 흑룡강성 약 45만 명, 요녕성 약 25만 명, 내몽골 자치구 약 2천 명의 조선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톈진 등 대도시에도 조선족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누구입니까?

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은 옛 고구려, 발해의 영토이자 일제시대 간도지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터전입니다. 조선족은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근접해 있던 북한과 감정적으로 더욱 가까웠고, 국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건국되자 중국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어는 중국어와 한글을 씁니다. 

 

한국에 들어온 조선족은 얼마나 되나요?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 50만 명 정도 됩니다. 조선족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돈을 벌러 고국에 왔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조선족들이 오다 보니 중국 내 조선족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가족 해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론에서는 조선족 범죄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 숫자가 늘어날수록 범죄도 당연히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꼭 조선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조선족 범죄를 줄이는 방법은 조선족을 같은 동포로 따듯하게 맞아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정을 붙이고 살겠습니까. 한국에 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