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유진 화가 - 묵묵하게 떠나는 내 안으로 여행

이동권 2022. 9. 25. 22:47

이유진 화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도 시선이 끌렸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준엄한 필연성이 이유진 작가의 작품 속에 내포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심심하고 무료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장 안을 들먹거릴 만큼 대담하게 뿜어져 나오는 고적한 기세는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유명해지고 싶고, 나름대로 거창한 계획 같은 것을 세우고 좇아가기 바빴는데, 이제는 담담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을 생활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죠. 제가 걸어가는 길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것’, ‘힘들고 어려워도 계속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소속된 곳도 없고, 가정까지 갖게 되면서 이제는 제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요. 그런데도 ‘묵묵히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저의 ‘길’입니다.”

이유진 작가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장중했다. ‘정방형’ 모양들이 주는 ‘균형감’과 ‘먹’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중량감’은 수면 위에서 흔들리는 장막처럼 무겁고 두꺼웠다. 

“좀 어둡죠. 하나의 ‘색면’을 추구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먹을 쓰는 사람은 어쩔 수 없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형태를 넣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제 성향이 그렇더라고요. 작가의 내면에서 나오는 게 색깔이잖아요.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단색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요. 어둡고, 작품이 단순해서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고, 젊은 작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지만요.”

금속 작품의 모서리에 빛이 부딪쳐 색조가 변해갈 때는 정해진 것 없이 불규칙하게 돌아가는 ‘인생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투명한 습기가 내린 어두운 산길을 홀로 걷는 동안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는 사색의 나래였다. 산뜻하고 유쾌한 그림들이 주는 청량감은 발산되지 않았지만 진실한 내면과 마주 서게 만드는 힘은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혼란한 감정을 다스린 뒤 찾아오는 평온함을 마음껏 누리게 했다.

“모두 지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피곤하고 힘들 때 저만 접으면 된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 때마다 속으로 지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만 힘든 게 아니고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 힘들잖아요. 누구든 자기 일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고, 모두 극적일 수 있지만 하루하루 담담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지쳐도 가야 되고,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고요.”

이유진 작가가 추구하는 회화는 ‘색면회화’다. 예술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방법에서 선적인 것보다는 면적인 것이 강하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중요시한다. 색면회화는 1940년대 추상표현주의를 주도했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개념에 색채를 결합시킨 화풍이다.

‘이유진표 색면회화’의 정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The day and the night’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하나의 색을 다섯 가지 이상의 색으로 구현하면서 한지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냈다. 그는 또 작품 ‘알려지지 않는 여정’에서 사각형 모양의 금속을 각각 다르게 부식시켜 하나하나 붙였다. 한지와 전혀 다른 차가운 물성으로 똑같은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 작품의 테마는 ‘길’입니다. 이 길은 제 삶, 작품을 하는 밤과 낮, 일상을 뜻하죠. 그런 날 중에서 어떤 날은 어둡고, 어떤 날은 밝겠죠.”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주고,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그도 비닐 같은 가벼운 물성의 재료로 일회적인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인생사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누가 쥐고 있을까. 이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해답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담담하게 일러준다. 그의 사각형 캔버스들이 하나하나 연결되다 보면 언젠가 인생도 완성될 것이다.

그는 ‘작업’보다는 ‘작가’라는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묵묵하게 자신의 책무에 충실히 임하는 것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는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