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64

강경대 평전 언론보도

연합뉴스 - 20주기 故강경대 씨 평전 출간 20주기 故강경대 씨 평전 출간 | 연합뉴스 20주기 故강경대 씨 평전 출간 www.yna.co.kr 한겨레 신문 - “그들의 청년정신 잊지 말아요” “그들의 청년정신 잊지 말아요” ‘사랑 때문이다’ ‘강경대 평전’ 2권 80년대 주요사건·사후정국 ‘생생’ 기록 www.hani.co.kr 경향신문 - [주목 이 책] 강경대 평전 外 [주목 이 책]강경대 평전 外 ■ 강경대 평전(이동권 | 민중의소리) 20년 전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진 스무살 청년 강경대씨... www.khan.co.kr 민중의소리 - 경대의 이야기이자 1991년 5월의 이야기 경대의 이야기이자 1991년 5월의 이야기 - 민중의소리 www.vop.co.kr 부산일보 - [잠깐읽기] 강경대 ..

061. 시 - 님의 심장과 하나되어 (한상렬 목사)

살아서 살아서 투쟁하자고 더 이상 죽지 말아달라고 엎드려 간절히 호소하였건만 계속되는 죽음 앞에 그만 괴롭고 괴로운 세월이었습니다. 20년 전 1991년의 봄 강경대님이여 박승희님이여 김영균님이여 천세용님이여 박창수님이여 김기설님이여 윤용하님이여 김철수님이여 김귀정님이여 정상순님이여 이정순님이여. …… 한 분 한 분 소식이 터질 때마다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이야말로 이 목숨을 던져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처절하게 고통만 하던 부끄러운 시절이었습니다. “…너도 사람이가 창수가 아니라 노태우를 땅에 묻을 그 어기창 불쌈(혁명)의 대활(기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 박창수를 땅에 묻었으니 …임마 너도 사람의 새끼냐고……” 백기완 스승님이 박창수열사를 묻으..

060. 시 - 강민조(고 강경대 열사 아버지 )

창살빛에 경대 보이네 창살 하얀 집은 나의 집 따뜻한 보금자리 우리 가족 함께 웃던 지난 세월 아… 별님 아래 담 넘어 저 불빛 내 맘 설레어라 저 불빛 저 안 온 가족 오늘을 마무리하겠지 내 마음 살며시 질투 생겨 여보 나도 말 한 번 합시다 옛날엔 이 몸도 행복했소 우리 식구 주량 맥주 한 병 경대가 사와 저녁에 모인 우리 네 식구 부라보 선미 경대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집안 살림 잘 하고 아빠 돈 많이 벌어 좋은 일 많이 하고 부라보 경대 목소리 하나로 우리 가족 행복했소 우리 아들 너무 대견해 경대 엄만 마냥 내 아들 최고 엄마 엄마 난 아빠 아들 용… 용… 아빠하고 살라는 엄마 젖 만지며 엄마 만세다 그렇게나 효자동이 내 아들 싸늘한 몸 되어 망월동에 누웠소 엄마 아빠 가슴에 못박고 죽어도 뺄..

059. 강경대 기념관

2006년 11월 18일, 종로구 숭인동에 강경대 기념관이 개관했다. 강경대 기념관은 열사를 기억하고 그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공간으로, 이곳에는 강경대 열사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 및 보관돼 있으며 간담회, 영상제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기념관에서는 여러 단체들의 회의나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또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환영한다.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72-198 2층 전화 : 02)742-1701

058.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는 열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1년 당시의 자료 복원과 연구사업, 추모제와 국토순례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강경대 열사와 그 정신에 대해 알리고 있다. 열사가 산화해 간 이후 91년 5월 투쟁을 주제로 한 논문, 연극, 문집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발표됐다. 5월 투쟁을 기억하고 열사 정신을 이어가려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지만, 이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다. 따라서 추모사업회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91년 투쟁에 대한 기록들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바란다.

057. 故 강경대 열사 사건일지

1991년 2월 27일 명지발전위원회 협상이 결렬됐다. 학생회는 학교 측의 등록금 일방고지에 대해 항의하고, 곧바로 등록을 연기하기로 결의했다. 1991년 3월 19일 학생들은 학교 측의 불성실한 협상태도에 분노하고 민주계단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총장실을 무기한 폐쇄하고, 총장실 집기를 본관 앞으로 들어내는 투쟁을 전개했다. 1991년 3월 22일 학생들은 총학생회 진군식을 갖고 권력 교체기를 앞둔 노태우 정권의 학원 탄압에 맞서 장기 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또 재단전입금을 확충해내고, 등록금 투쟁에서도 승리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행사 도중에 폭력적으로 교내를 침탈해 집회를 방해했다. 1991년 3월 25일 학생들은 민주적 등록금 책정과 언론탄압 분쇄를 위한 부총장실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056. 선미가 경대에게

경대야. 지금도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우리 착한 경대가 지금이라도 “누나! 누나!”하며 나를 부를 것 같은데……. 누나는 항상 믿고 있다. 경대는 나의 가슴에,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만 헤어져 있다고 믿자. 우리 착한 경대 이제 아프지 않지? 편안히 잠자고 있는 너의 모습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지만 백골단 형들을 용서해주라는 듯 전혀 아픈 기색 없는 너의 예쁜 얼굴에 누나는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하늘나라에 가면 백골단이 때리지 못하게 경대랑 나랑 꼭 손 붙잡고 다니자. 영균이 형이랑, 세용이 형이랑 하늘나라에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테지. 형들은 경대가 보고 싶어. 경대를 위해, 경대가 외로울까 봐 가셨을 거야. 하늘나라에도..

055. 8부 - 故 강경대 열사여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소위 진정한 의미의 ‘386세대’는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6월 항쟁을 통해 깨끗이 청산하고 출세의 길로 나선 사람이 많았다. 또한 부채의식이 없었던 92학번 이후, 진정한 의미의 ‘X세대 학생운동권’은 대중소비문화에 재빨리 흡수됐다. 반면 강경대 사건을 겪은 88학번부터 91학번까지 학생들은 5월 투쟁과 분신정국의 소용돌이에 깊게 빠졌다. 수많은 열사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에 내재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공안 통치로 일관했던 노 정권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강경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강경대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마음속에 쌓여 있는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고..

054. 5월 투쟁 이후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출범

5월 투쟁 이후 소수야당은 1991년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에서 패배했다. 민자당은 41% 득표에 566명을 당선시켜 65%의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재야인사를 영입한 평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은 22% 득표에 165명이, 3당합당을 거부한 민주당은 14% 득표에 21명만 당선됐다. 이후 신민주연합과 민주당은 통합을 선언했고, 호남을 근거에 둔 평민당과 3당합당을 거부한 영남 민주계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재야가 결합한 ‘민주당’이 출범하게 됐다.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후반기 정국 운영과 권력 재창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반대로 김영삼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는 일조해, 민자당 내부에서의 대권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민족민주운..

053. 여러 목소리들

1991년에는 독점자본이 부동산 투기와 금융 투기로 물가와 집값 상승을 불러와 인플레이션이 심화됐다. 따라서 대중은 생존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인식하고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투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강경대의 죽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노동자들은 한 자릿수 임금인상, 무노동무임금과 업무중단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등에 저항하며 들고 일어섰다. 빈민들은 치솟는 물가와 집값, 노점단속과 강제철거 등에 분노하며 투쟁대열에 동참했고, 농민들은 수입개방 정책과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고, 풍년이 들어도 비료 값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투쟁대열에 결합했다. 특히 경대의 죽음 이후에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대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와 노태우 정권..

052. 강기훈과 정원식

민자당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차기 권력 계승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야당은 노재봉 내각사퇴, 내각제 개헌, 공안통치 등을 연결고리로 해서 민자당 온건파와 협공해 강경파를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경대의 죽음은 민자당 온건파와 야당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암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노재봉 내각 사퇴와 내각제 개헌 무산을 목표로 움직였다. 5월 14일, 강경대의 민주국민장이 원천봉쇄로 무산됐지만 18일 제2차 국민대회, 노동계 총파업, 전대협 동맹휴업 등 각계각층에서 투쟁이 전개되고, 야당도 19일 옥외집회를 추진하자 민자당 강경파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5월 22일 노재봉 국무총리는 자진사퇴하고 정원식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4개 부처 장관이 경질되고 내각이..

051. 5적 김지하, 박홍, 김동길, 김수환, 조선일보

노태우 정권이 분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중과 달랐다. 이미 ‘민주화가 이뤄진 상황에서 분신은 민주화 투쟁에 대한 열망이 아니기 때문에 열사로 호칭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또 분신은 ‘민주세력들이 꿈꿔온 이데올로기에 발붙이기 어렵고, 국민의 공감을 받기 힘들게 되자 벌어진 충동에 지나지 않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이런 해석을 지지해 준 것은 당시 5적이라 불리던 김지하, 박홍, 김동길, 김수환, 조선일보였다.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기고했다. 그의 글은 다른 이들의 글보다 더욱 부정적이었고, 파장 또한 컸다. 그는 70년대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

050. 분신정국

5월 투쟁은 첫 시작부터 6월 항쟁과 비교됐다. 87년 민주세력은 집권에 실패했지만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면서 정권 재창출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민주세력은 노태우 정권에 맞선 민주화를 진척시키기 위한 방법은 제2의 6월 항쟁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강경대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동일시 됐다. 국가의 폭력이 구조화된 이 땅에서 ‘열사’는 직접적으로 대중투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강경대의 죽음 이후 계속된 분신은 노태우 정권의 숨통을 조이는 화약고 역할을 했다.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승희는 ..

049. 5월 투쟁의 기폭제, 강경대

강경대가 죽기 전까지 정국 운영의 향배를 결정할 최대 분수령은 1991년 5월 24일 ‘광역의회선거’였다. 노태우 정권과 자본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눈에 가장 거스르는 세력으로 노동자들을 지목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정권에 유리한 정서의 흐름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혹독한 폭력과 탄압을 가하면서 공장의 열기가 거리 정치투쟁으로 분출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동시에 노 정권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국민의 이목을 선거에 집중시켰다. 국민에게는 6·29선언의 의미를 포장하면서 여당의 이미지를 부각했고, 경제난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렸다. 그리고 임시국회에서는 야당과 국가보안법 문제를 타협적으로 풀어가는 척하며 광역선거에..

048. 서울시경 제1기동대 1중대 박석진 일경 양심선언

저는 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교 1학년생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단지, 이 사회에 내 주위가 어떤 모습인가를 인식하려고 노력했던 학생이었습니다. 작년 6월 입대를 하고 두 달 만에 전경이 되었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자주 보아왔고 근거도 없이 적대감을 가져왔던 전경이 된 것이었습니다. 서울시경 직할 제1기동대 본대의 대원으로서 많은 진압에 참가하면서 한 때는 대학생이었고, 현재는 전경이라는 이중성으로 많이도 괴로웠습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을 미워할 수도 없었고 더욱이 학생들을 욕하는 선임과 내 졸병들도 전 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젊은이이고 함께 고생하는 동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047. 전경의 양심선언

전경(전투경찰)은 노태우 정권의 두 얼굴이었다. 이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권위주의 체제를 청산하겠다고 다짐했던 노태우 정권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기만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경의 첫 양심선언은 1987년 7월 양승균에게서 나왔다. 뒤를 이어 수많은 전경들이 양심선언에 동참했으며, 강경대가 죽은 199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경들은 수배와 구속이 되는 것은 물론 미래의 삶에 장애가 될 만한 일이었지만 방독면 속에서 흘려야 했던 눈물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양심선언을 선택했다. 이들이 양심선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경들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참기 힘들었다. 생존권을 외치는 시각장애인을 구타하고, 노점상의 손수레를 뒤엎고, 친구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선후배들과 적이 ..

046. 죽음의 원인

노태우 정권의 잔인한 공안 통치는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노 정권은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를 통해 법집행을 소홀하게 대하는 공직자를 엄벌하고, 소신껏 일하다가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하겠다며 폭력을 부추겼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학원에서 벌어지는 위법행위와 무질서를 바로잡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경찰의 폭력이 정당한 공권력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노 정권은 1989년 10월 4일,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국민대회가 열린 날,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경은 ‘대 범죄전쟁 선포에 따른 실천계획’이라는 후속조처를 발표하고 폭력의 수위를 한 차원 높일 것을 일선경찰에 지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경찰서가 기습을 당하면..

045. 정치투쟁으로 점화된 대중투쟁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군부독재가 무너지면서 오랫동안 지하에서 억눌려 있던 기층 민중이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또 예술계, 학계 등 각계각층이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면서 대중적 운동역량이 크게 확대됐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과 사사건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대중투쟁은 정치투쟁으로 전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정치투쟁의 선봉에 선 것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노동자들은 KBS투쟁을 필두로 현대중공업노동자들의 골리앗 크레인 농성, 울산 전역에서 벌어진 거리 시위, 전국 51개 노동조합의 투쟁, 10만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거리 시위 등 노동자 정치총파업 투쟁을 연이어 전개했고,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인천지역노조협의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등 ..

044. 공안정국과 3당합당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공안정국20)을 조성했다. 당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은 1988년에 이어 1989년 들어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결성됐고, 산하의 조국통일위원회에서는 북한에 범민족대회를 제의해 통일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아울러 기층 민중들의 투쟁도 가열하게 진행됐다. 여의도 농민시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상경투쟁 등 다양한 부문의 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공안정국의 시발점으로는 1988년 8월 6일 벌어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 테러사건21)과 1989년 3월에 있었던 김용갑 총무처장관 사퇴 사건22)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안정국 조성에 빌미를 준 것은 문익환 ..

043. 여소야대, 의회정치의 부활

1988년 13대 총선에서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자랑하던 민정당이 참패하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했다. 선거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지역 분할 구도 속에서 선거가 치러지고 민주화를 염원했던 1987년 6월 항쟁의 여파가 이어진 결과였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주도권을 뺏진 대통령은 정국 운영에서 수세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5공 비리, 광주항쟁, 부정선거 등 감추고 싶은 일들을 은폐하기 어려웠다. 예상대로 의회는 각종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노 정권을 압박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5공 비리 특위’와 ‘광주 특위’였다. 5공 비리 특위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친인척, 5공 실세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

042. 7부 -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강경대 열사여. 육신은 비록 한 줌 거름으로 사라졌지만 우리의 가슴에는 영원히 고귀한 존재로 남아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은 어떻게든 고통이 따르는 법.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열사와 함께 한다는 강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아름답고 소중하다. 열사여. 황야에서 바람이 일거든 휘파람을 불고, 바다에서 햇빛이 부서지거든 춤을 추라. 해방 세상, 그 길을 함께 찾아 나서자. 노태우 정권은 광폭한 공안탄압을 자행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순탄한 장기집권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반정권 세력들을 무참히 짓밟을 필요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이 그 희생양이 됐고, 환경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은 냉혹하고 철저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

041.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태우 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탄압의 결과로 강경대는 스무 살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했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대는 잊혔다. 한때 열심히 싸웠지만 다시 관성에 젖어버렸고, 경대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도 희미해져 갔다. 어쩌면 세상사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경대가 죽어갈 때도 도서관에 앉아 책을 봤던 사람들, 사랑타령 하던 사람들, 신나게 놀러 다니던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경대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민중을 위한 세상도, 자주, 민주, 통일의 세상도 아직 오지 않았기에 무덤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또한 경대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뜨거운 해방의 불씨를 곳곳에..

040. 선미의 외출

선미는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불안해하고,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후에는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상담하고 봉사 활동에 매진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생각하며 살았던 부모님의 생활에서 배운 그대로였다. 선미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딸로서의 역할보다 동아리, 학생회, 농활 등에 자신을 쏟아부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만약 경대가 죽지 않았다면 선미는 아마도 심리학자가 아니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일을 하는 예술인이 됐을 것이다. 선미는 인간문화재 선생님들도 칭찬할 정도로 꽹과리를 잘 쳤다. 장단을 들으면 곧바로 칠 수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음악 지식도 해박했다. 특히 전통문화에 깃든 신명을 좋아했다. 사물놀이를 하면 신이 났고, 이것만큼 즐거움을..

039. 경민회관

어머니는 1993년 2월 광주시 우산동에 대지 125평을 사서 조립식 2층 건물을 지었다. 1층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은 50여 명이 잘 수 있는 방을 마련했다.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은 아니었다. 아들의 뜻을 기리는 마음이었다. 경대가 망월동에 묻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함께 싸워줬던 광주 시민들이 고마웠고, 또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경대가 광주 망월동에 묻힌 것도 사연이 있다. 사람들은 경대의 묘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석 모란공원을 권했다. 망월동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모란공원에 있는 박종철 열사 옆에 가묘 20평을 준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광주 망월동을 고집했다. 찾아가기 쉽고, 자주 갈 수 있는 곳을 원했다면 모란공원을 선택했겠지만 ..

038. 부질없는 원망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경대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구속되고, 집에는 어머니와 딸, 둘만 남았다. 덕수궁 옆 서부지원에서 경대를 죽인 백골단들의 마지막 재판이 열리던 8월 6일에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무너졌다. 법원에서 유족들에게마저 방청권을 주지 않은 데다 ‘방청안내문’ 어디에도 ‘강경대’라는 이름조차 공지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선미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방청권을 달라고 항의했지만 법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재판은 피해자 측의 증인도, 방청객도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선미는 식음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력, 면역력이 약해지고 몸에 진이 다 빠지면서 결핵이 찾아왔다. 원래부터 건강한 체질이 아닌데다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통에 병이 들었..

037. 감옥살이

감옥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원래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몸에 결석증이 생겼고, 발에는 동상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경대를 죽인 백골단들과 함께 같은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돼 괴로움이 심했다. 면회나 운동을 나가는 길에 이들과 마주치는 것은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심정을 아내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경대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전경들과 같이 있어요. 현 정권의 야수들이 별의별 고통을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저들이 하는 짓이 너무나 야비하고 수치스러워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그래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어요. 이 땅에서 독재를 완전히 몰아내서 민중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고, 7천만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설 때까지 ..

036. 법정소란죄

아버지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은 엄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 범죄자의 죄를 파헤치고, 판사는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내리는 줄 알았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었고, 어떤 경우에도 검사나 판사의 의견을 존중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 법의 잣대가 때론 ‘엉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법정소란죄’로 기소됐다. 7월 4일 경대를 죽인 전경들에 대한 첫 공판이 벌어진 날이었다. 검사, 변호사 할 것 없이 모두 똘똘 뭉쳐 재판을 일사천리로 끝내려고 했다. 이 사건에 가담한 전경 5명에 대한 신문도 어물쩍 끝내버렸고, 이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고로 서둘러 결론지으려 했다. 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고 명령을 내렸던..

035. 잔인한 계절

어머니는 경대를 잃은 지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대문을 열자마자 슬픈 목소리로 경대를 불렀다. 단 한 번도 경대가 집에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딘가에서 활짝 웃으며 나타나 꼭 안아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경대는 온데간데없고 뜻밖의 상황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걸이, 팔찌 할 것 없이 돈이 된다 싶은 것은 모두 도둑을 맞았다. 그 당시에는 흔하게 사용하지 않았던 신용카드도 사라졌다. 카드를 쓰는 게 낯설어서 장롱 서랍에 넣어 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명세서를 보고서야 카드를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신용카드 대금을 내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딱히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경대가 죽은 뒤 신용카드를 사용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

034. 회유와 협박

경대가 죽은 다음날부터 영안실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아버지의 동창생이라고 찾아왔다. 민자당에 있는 높은 사람이라며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다름 아닌 노태우 정권의 끄나풀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어, 자네하고 동창이야. 그런데 말이야. 경대는 갔지만 자네라도 살아야 될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은 5억짜린데, 경대는 20억을 줄 테니 장례를 치르고 합의함세.” 아버지는 모르는 척했다. 뺨이라도 때려야 분이 풀리겠지만, 그럴만한 경황이 없었다. 아버지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경대 엄마 알면 큰일나니까 저리 가시오.” 아버지는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팔아서 자기 살 길을 찾으려는 비정한 부모가 이 세..

033. 6부 - 상처받은 영혼

비천하고 모순된 것들로 넘쳐나고, 추하고 노쇠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 한없이 피로가 몰아친다. 거칠고 야비한 폭력과 욕망에 지쳐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러나 바닥에 주저앉아 포기할 수만은 없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더라도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시키는 힘은 헌신하는 사람의 영혼에서 발견되는 것. 강경대가 잠든 그곳에 혁명이 있고, 참다운 삶이 있다. 경대가 죽은 뒤 갖가지 회유와 협박이 끊이질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진심 어린 사과나 조치 없이 하루빨리 장례를 치러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만 했다. 심지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작은 연민조차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경대의 죽음을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분노만 더욱 키울 뿐이었다. 경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