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53

칼로 새긴 장준하(2019년 세종도서) 언론보도

칼로 새긴 장준하는 이동환 작가가 134장의 판화로 새긴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책으로 엮기 위해 쓴 창작소설이다. 이 책은 판화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은 단지 판화에 대한 부연일 뿐이다. 민중의소리 소설과 판화로 엮은 장준하 선생 일대기 ‘칼로 새긴 장준하’ 출간 소설과 판화로 엮은 장준하 선생 일대기 ‘칼로 새긴 장준하’ 출간 장준하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 보안사(현 기무사)에 칼끝을 대다 vop.co.kr 연합뉴스 [신간] 흐르는 편지·여기에 없도록 하자 [신간] 흐르는 편지·여기에 없도록 하자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 흐르는 편지 =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www.yna.co.kr [전시] 장준하 선생 일대기 엮은 이동환 화가 목판화전 ‘칼로 새긴 장준하’ 장준하 ..

048. 죽음의 그림자 - 충격적인 증언, 독립운동가의 후예

개구리들이 울음주머니를 뽈룩대며 요란하게 울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은 보랏빛으로 번졌고, 저수지 방죽에 묶인 염소는 어슬렁대며 주둥이를 아물거렸다. 김유진 기자는 강동일 형사와 임일수를 번잡한 도심을 피해 교외로 불렀다. 세 사람은 나란히 풀밭에 앉아 먼 하늘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별다른 인연도, 진심을 꺼내놓고 얘기해 본 적도 없었다. 불언을 깨뜨린 건 강 형사였다. 그는 임일수에게 왜 거짓 자수를 하면서 자신을 찾았는지 물었다. 임일수는 바로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두 사람을 엮어 장준하 선생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임일수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부친의 항일 행적을 밝히지 않았다. 부친은 남한 단독정부수립..

047. 장준하 일대기 34 - 장준하, 의문사하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 민주화운동 그리고 투옥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국 사회의 모든 민주주의를 정지시켰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장기집권을 위한 틀을 구축하려고 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제로 바뀌었고, 의회의 권한은 제한됐다. 정치활동도 금지됐으며 언로도 막혔다. 박정희와 장준하의 정면승부가 시작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유신에 맞서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등 재야 민주세력과 연합해 대항했다.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유신헌법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 100만인서명이 열흘 만에 30만 명을 넘어서자 놀란 박정희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개헌서명운동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 박정희의 강압적인 행태는 문인..

046. 장준하 일대기 33 - 민주화, 통일 운동에 나서다

한국 사회 이끈 희대의 정론지 - 함석헌 목사와 장준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수많은 죽음이 그를 덮쳤다. 존경하는 김구 주석을 잃은 데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는 인민군의 총격에 숨졌고, 아우는 실종됐다. 그 모든 원인은 민족의 분열과 척결하지 못한 친일파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을 떨쳐내고 글로 시대적 과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1952년 정부 기관지 성격인 발행에 참여했다. 그러나 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한 만큼 순수하고 아카데믹한 교양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듬해 장준하는 혈혈단신으로 을 인수해 를 창간했다. 는 창간호부터 전국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며 큰 호응을 얻었다. 2호는 ‘부산정치파동’ 때문에 정치를 주요 의제로 꺼냈다. 부산정치파동은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이 독재..

045. 장준하 일대기 32 -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다

조국의 부재와 일제의 과잉 - 수수 이삭의 몸부림 장준하는 하루 일정을 마친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미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 화단에 심어놓은 소나무들은 계절을 잊고 날카로운 바늘잎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노목 가지에 앉은 까마귀는 외로웠는지 인기척을 느끼고 서럽게 까악까악 울어댔다. 그는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독방을 썼다. 그것도 민가의 허름한 이부자리가 아니라 서울에서 이름 꽤나 있는 호텔방이었다. 장준하는 숙소에 들어오자 피곤한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허리띠조차 풀지 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과 마주했다. 2년 넘게 50여 명과 합숙하며 칼잠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전장에 끌려간 비분을 억누르며, 조국의 부재와 일제의 과잉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 잠을 청하며 조국 ..

044. 장준하 일대기 31 -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다

해방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 4당수 회담 4당수가 김구 주석과 국내정치를 논의하기 위해 경교장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장준하는 오랜 시간 동안 회담 내용을 기록하면서 팔이 뻑적지근했다. 붓을 쥔 손아귀도 저렸다. 김구 주석은 회담이 끝난 뒤 장준하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장준하는 회담장에 앉아 4당수 회담을 복기했다. 회담에서 특별한 얘기나 치열한 공방은 없었다. 김 주석은 정치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장준하는 일찍 잠을 청했다. 잠을 자고 나면 머릿속이 맑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이 맡은 일은 회담을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회담 내용이 형식적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1910년 8월 22일..

043. 장준하 일대기 30 - 해방 후 조선은 혼돈 그 자체였다

미군정의 푸대접 - 조국의 첫 밤 임시정부는 신문기자들을 모아놓고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조항은 연합국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호하고, 국제사회에 주권자로서의 발언권을 행사하며, 독립국가와 민주정부를 원칙으로 신헌장을 발표하고, 조국 독립을 방해한 자와 친일파 세력을 숙청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골자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장준하는 미군이 임시정부를 대하는 태도가 적잖게 신경 쓰였다. 임시정부 요인이 국무위원이 아니라 망명투사 혹은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는 건 그들이 원하는 것이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임시정부를 제멋대로 규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임시정부의 한계도 여실했다. 김구 주석은 기자들에게 육성 ..

042. 장준하 일대기 29 - 미군정이 비밀작전을 펼치다

무질서와 폐단 - 광복군 모자 한 개 8월 24일 미국사절단에게 새로운 지시가 하달됐다. 한국 입국을 취소하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장준하는 낙담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건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약하나마 조력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송기에 올랐다. 이범석 장군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시안에 돌아온 즉시 미군 웨드마이어 장군을 만났다. 국제 정세가 돌아가는 것과 관계없이 한국에 들어가 해방 후 찾아올지 모를 극심한 사회혼란과 무질서를 안정화시키겠다고 고집했다. 웨드마이어 장군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버티는 이 장군의 뚝심에 밀려 결국 두 손을 번쩍 들었다...

041. 장준하 일대기 28 - 항복한 일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험악한 기세 싸움 - 착검을 한 일본군 “무슨 일로 왔소?” 수송기는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며 유구히 흐르는 한강을 저공으로 선회하다 여의도에 착륙했다. 미군사절단과 장준하 일행은 기관총을 손에 쥐지 않고 어깨에 엇비슷이 멘 채 수송기에서 내렸다. 포츠담선언을 이행하겠다고 해도 바로 당장 무기를 놓고 순순히 항복할 저들이 아니었다. 천황에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들은 항복 대신 통탄의 눈물을 흘리며 자결을 선택하거나 총을 겨눌 수 있었다. 유난히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한강이 출렁출렁 물살을 일으키자 덥고 습한 강바람이 비행장으로 불어왔다. 햇볕은 시멘트 바닥을 녹일 정도로 내리쬈고, 바닥은 뜨겁게 달궈진 구들장 같았다. 장준하 일행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발그레한 목덜미에는 땀이 흘러..

040. 장준하 일대기 27 - 인천 앞바다를 보며 감회에 젖다

일본 군국주의의 침몰 - 한국의 한 아들로 1945년 8월 10일 OSS훈련을 지휘하는 도너번 소장이 제2지대를 방문했다. 장준하는 드디어 한국침투공작에 투입될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통신장비를 비롯해 식량과 무기를 챙겼다.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신분증과 일본 국민복, 신발 같은 것도 별도로 준비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너번 소장을 비롯해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 등 미군과 광복군 간부들이 모여 앉아 심각하게 회의만 진행할 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전통은 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OSS대원들에게 명령이 당도했다. 하달된 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연합국에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039. 장준하 일대기 26 - 목숨을 최후의 보루로 삼다

삭발 후 꺼내 든 일기장과 잡지 - 나의 분신, 나의 유산 장준하가 한국침투공작에서 맡은 지역은 서울이었다. 그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조직을 책임지고, 유격대를 이끌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가면 무조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개인의 감정을 모두 없애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결사항전해야 했다. 꺾이지 않은 결기와 필사적 용기로 조국 강토에 광복의 씨를 뿌려야 후대에 해방이라는 결실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는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침투작전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고, 길바닥에 피를 쏟아내더라도 출정의 깃발을 들고 자랑스럽게 전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준하는 최종 명령을 기다리며 침투공작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이발소에 들려 머리털을 박박 밀었다. 마음을 ..

038. 장준하 일대기 25 - 한국침투공작을 결심하다

광복군 제2지대 - 동북 방향으로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에 충칭을 떠났다. 죽음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향해 걸었던 시간과 충칭에서 보낸 3개월의 시간이 교차하면서 일행의 얼굴에는 만감이 서렸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충칭으로 오려했는지 난감한 빛이 역력했지만 이제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만은 밝았다. 그러나 중앙군관학교 동지들과 뜻하지 않은 석별의 시간이 기다렸다. 일행 중 30여 명은 한미합동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시안으로 향했지만 10여 명은 남아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일하기로 했다. 또 예닐곱 명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조직에 대한 회의감이 심해 일단 충칭에 남아 다음 경로를 모색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김구와 착잡한 심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이범석 장군..

037. 장준하 일대기 24 - 다시 시안으로 떠나다

요원한 조국 독립의 길 -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준하 일행이 환영회와 강의를 거절하자 다른 방법으로 자당 포섭공작이 시작됐다. 한두 명씩 술집으로 꾀어내 맛있는 음식과 술을 사 먹이거나 시시때때로 찾아와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면서 일행들을 들쑤셨다. 미인계나 이간책처럼 간교하고 비열한 방법을 동원한 정당도 있었다. 강직한 성격의 일행에게 전혀 먹히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포섭공작은 점점 집요해졌다. 장준하는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정당을 이익을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일제를 몰아내고 주권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독립운동가가 돼주길 바랐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요인들이 자숙하는 자세로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조국 독립의 길도 요원해 보였다. 장준하는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

036. 장준하 일대기 23 - 눈물바다가 되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사진 - 우리 임시정부 각료분들 김구 주석은 장준하 일행에게 임시정부 각료들을 소개했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선배 투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검소한 옷차림이었다. 단순한 중국식 외투에 평범한 바지를 입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깨끗했고 칼날 같이 바지 주름도 잡았다. 김 주석의 소개를 받은 사람들은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최동오, 신익희, 엄항섭, 차이석, 조완구, 황학수, 유림, 유동열 등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일행을 향해 짧게 머리를 숙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동지에 대한 예의를 엄격하게 지키는 인사였다. 임정 요인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대부분 청년의 눈빛처럼 맑았으나 겉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 주름은 자글자글했고, 입가는 깊게 팼다. 장준하는 ..

035. 장준하 일대기 22 - 임시정부 청사 앞마당에 서다

사흘 동안의 여유 - 배를 타고 장준하 일행은 이른 아침, 바둥으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장강 선착장에 도착했다. 바둥은 충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는 항구도시였다. 선착장에서 바둥까지 강물을 따라 걸어가면 이틀이 걸렸다. 배를 타고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절이 소요됐다. 장준하는 배를 타기로 했다. 일행 가운데 주막에서 투전을 하거나 술, 담배 때문에 과용한 몇몇은 걸어가기로 했다. 장준하는 일행과 잠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불편했다. 고작 돈 때문에 짐을 떠넘기듯 여러 명을 남겨 놓고 배를 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감수해야 했다. 다수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 내려는 것이 더욱 마땅치 않았다. 그는 육로를 따라 걷는 일행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

034. 장준하 일대기 21 - 죽음을 딛고 파촉령을 넘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 야곱의 돌베개 칠흑 같은 어둠이 천지를 삼켰다. 장준하는 추위와 함께 찾아온 공복감과 현기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힘차게 김준엽과 밀착해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서로 몸을 비비면서 온기를 전했다. 이 고갯길에 비석도 없고, 연고자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밤이 깊어갈수록 고향과 아내 생각에 깊이 사로잡혔다. 부모님의 얼굴도 떠올랐고, 동무들의 이름도 선명해져 목이 메었다. 어릴 때 뛰놀던 동산부터 대자로 누워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대청마루까지 하나하나 떠올라 울컥 울음이 쏟아지려고 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사람이 흔히 하는 회상이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면 조국 독립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033. 장준하 일대기 20 - 삶의 마지막을 부여잡다

강행군 - 아~ 파촉령Ⅱ 고원지대 침엽수들은 삭풍에 단련돼 웬만한 추위도 잘 견뎠고, 보통 나무보다 두 배는 더 단단했다. 소나무, 전나무, 잎갈나무, 가문비나무들이 납작한 바늘잎을 늘어뜨려 눈을 머금었다. 장준하 일행은 경사가 가파른 길은 나무를 잡고 의지하며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무 가지 위에 쌓인 눈들이 모두 얼어 미끄러웠고, 줄기마다 뾰족한 가시가 돋쳐 손바닥이 긁혔다. 장준하는 일행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바랐다. 충칭에 가던 길을 멈추게 되거나 조국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파른 고갯길에 접어들 때부터 김준엽과 함께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다. 새로 산 신발이 제 몫을 해서 그런지 크게 미끄럽지 않았다. 일행들은 파촉령 고개에..

032. 장준하 일대기 19 - 노잣돈을 챙겨 파촉령에 오르다

드러난 적개심 - 일군의 공습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하는 희망을 안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장준하는 거대한 군사기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숲을 베고 공장을 세운게 마땅치 않았다. 인간과 자연은 대립적이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고 거기에 동화돼 살면 됐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려고만 했고, 명분 없이 일으킨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기 위해 자연을 무참히 훼손했다. 일행의 휴식은 돌연한 폭격기들의 등장으로 깨졌다. 자정 무렵이었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서 요란한 폭음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일본군 폭격기가 군사기지에 줄폭탄을 떨어뜨렸다. 군사기지는 붉은 화염에 휩싸이며 무너져 내렸고, 하늘 위로 검붉은 연기가 솟구치며 밤공기를 태웠다. 군용 통신시..

031. 장준하 일대기 18 - 일탈을 끝내고 초심으로 돌아가다

일탈 - 흔들리는 기강 장준하 일행은 보급품을 기다리기 위해 난양에 머물렀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도 만만치 않았지만 충칭으로 가는 여정도 무난하지 않았다. 일행은 개개인에게 독립투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을 맡기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용납할 수 없는 일탈이 벌어졌다. 식욕과 성욕 때문이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루 두 끼 먹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취사를 담당했던 장준하는 아침이 되면 끼니 걱정 때문에 눈앞이 암담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보급품이 도착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식량을 조달해서 동지들의 배를 채워야 했다. 우선 식사량부터 줄였다. 수중에 돈이 많지 않아 밀가루와 채소만 구입해 죽을 끓였다. 모두들 배가 고팠지만 함께여서 참을 만했다. 목숨을 건 고난의 행군을 같이해..

030. 장준하 일대기 17 -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다

도적의 마음까지 움직인 진심 - 천명인가 보오 장준하는 대장을 만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장정에 나선 일행들을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눈가는 눈물로 촉촉하게 젖었고, 목소리는 메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는 투사를 믿을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나았다. 대장은 장준하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장준하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애원해도 어림없다는 듯 강경했다. 장준하의 통사정은 서너 번이나 이어졌다. 그는 파수병에게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찰떡같이 매달렸고, 대장을 만난 뒤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게 해달라고 동정심에 호소했다. 그때마다 대장은 딴전을 피우며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얼마지 않아 장준하의 진심은 통했다. 장..

029. 장준하 일대기 16 - 길고도 험난한 길을 앞만 보고 달리다

전쟁 앞에 짐승이 된 인간들 - 낙오하면 죽는다 평한선 철도가 열렸다. 주민의 고통과 죽음을 강요해 얻은 찰나의 평화였다. 사령관의 얼굴에서는 수치심이나 굴욕은 읽을 수 없었다. 군인들도 명령대로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처럼 굳었다.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책무는 버린 지 오래된 눈빛이었다. 그러나 일부 군인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는 따를 수 없었다. 장준하는 공산당이 중일전쟁을 틈타 대륙 곳곳에 세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현장에서 똑똑히 보고 느꼈다. 민심을 잃은 정부를 지지할 국민은 없었다.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인간이기 전에 짐승이기를 원했다. 정복자는 피정복자를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로 취급했고..

028. 장준하 일대기 15 - 탐욕과 횡포에 치를 떨다

고생스럽지 않은 길 - 눈 쌓인 협곡을 돌아 장준하 일행은 벌판을 지나 골짜기에 접어들자 얼굴을 쳐들고 걸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거친 눈보라가 얼굴을 쳐 갈겨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눈보라가 진눈깨비로 바뀔 때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와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행은 독한 백주 한 모금이 그리웠다. 독주를 마시면 긴장이 풀리며 발걸음이 가벼울 듯싶었다. 백주는 보리나 옥수수를 증류한 술로 도수가 40도가 넘었다. 숙성을 오래 시키기 때문에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강해 추울 때 마시면 제격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장준하는 따뜻한 쌀밥과 장국이 생각났다. 협곡을 돌아나가는 길은 무척 험했다. 돌멩이와 진흙이..

027. 장준하 일대기 14 - 중앙군관학교를 마치고 임시정부로 향하다

민족을 배신한 연극인 - 연극의 막이 올랐다 전야제의 막이 올랐다. 연극은 노능서의 농익은 연기로 단숨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관은 변사로 참여해 중국어로 상황이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연극은 중국군과 동지들의 환호와 박수로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장준하는 열화와 같은 성원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에 나선 연극인들을 봐왔던 터였다. 일본은 한일합병 후 친일 동화주의에 입각해 한국을 직접통치체제로 지배했다. 한국의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관습, 언어에 이르는 모든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철저한 일본화, 일본인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출, 증산 등의 경제적 수탈을 높였고,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시키..

026. 장준하 일대기 13 - 동지애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

중국군과의 차별 - 총 없는 군대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은 린촨 중앙군관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군사훈련부대였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장제스가 군관학교 내 한국인을 위한 훈련부대를 승인한 뒤 이곳에도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이 개설됐다. 하지만 군사훈련은 형편없었다. 중국군의 훈련과 달리 한국군에게는 목총 한 자루 지급되지 않았다. 고막을 터트릴 듯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총이나 박격포 소리는 중국군이 훈련할 때 나는 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육도 형식적이고 질이 낮았다. 교련은 아주 간단한 제식훈련만 가르쳤다. 소학교 다닐 때 이미 배웠던 발맞추는 보법이나 구령에 맞춰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강의도 배울 게 없는 정신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정규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훈..

025. 장준하 일대기 12 - 내면의 갈등을 겪다

무분별한 탐욕 - 부패는 악화돼 갔다 장준하는 을 발간하면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 정신적인 유산을 남긴 것 같아 한없이 기뻤다. 자기만족에 급급하는 건 허영의 소산이었지만 타인의 만족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건 진정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중에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그를 괴롭혔던 건 다름 아닌 식량이었다. 마음이 궁한 것은 동지들과 함께 로 채워나가면 됐지만 영양실조를 느낄 만큼 고통스러운 배고픔은 오직 풍족한 음식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팔팔한 청춘들은 항상 기진맥진했다. 멀건 채소 국물과 밀가루빵을 아침과 저녁에 먹었다.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플 정도로 양이 적었다. 점심은 거르며 교육을 받았다. 제반 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 세..

024. 장준하 일대기 11 - <등불>을 발간하다

막사에 울려 퍼진 혁명가 - 동지들…장하오 중앙군관학교의 전신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초대 교장은 장제스가 역임했다. 장제스는 이곳에서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전력을 쏟았다. 군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소규모 군대를 이끄는 자격을 주었고, 명예나 급여 면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만큼 엄격한 기강과 규율을 강조했다. 특히 혁명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했다. 육군군관학교는 조선인을 피압박민족으로 후원하고, 입학을 독려했다. 김구 주석이 1933년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장 장제스를 만나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요청한 뒤였다. 의열단 간부였던 김원봉을 비롯해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이곳에서 공부한 뒤 졸업 후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적 기초를 닦았다...

023. 장준하 일대기 10 - 열렬한 환대에 눈물이 쏟아지다

수모를 참아 내며 - 패악질, 멸시와 굶주림 장준하 일행은 안내원이 하는 대로 똑같이 철로를 건넜다. 그가 할 때는 무척 쉬워 보였지만 막상 따라 해 보니 가슴이 짓눌려 숨 쉬기가 곤란했고 허벅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철로 건너기는 호를 넘는 것보다 식은 죽 먹기였다. 수풀이 웃자란 들판과 자잘한 자갈이 깔린 돌무더기를 포복으로 기어가다 철로에서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 맞은편 돌무더기로 곤두박질치면 끝났다. 철도를 건너자 또다시 호 두 개가 나타났다. 장준하 일행은 조금 전 건넜던 방식 그대로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호를 넘었다. 일행은 모두 탈 없이 호를 넘자 서로 얼싸안으며 자축하고 다시 장정에 나섰다. 갈 길이 바빴다. 다음 안내원이 10리 밖 호숫가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022. 장준하 일대기 09 - 갖가지 험난한 역경과 마주하다

일본군 초소를 지나 - 전신의 피가 말라가는 듯 장준하 일행을 돕기 위해 중국인 세 명이 붙었다. 장터로 가는 날 이들이 일행 앞뒤에 서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안내원의 인복 덕분이었다. 안내원은 마을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일본군이나 팔로군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나서서 까다로운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해 왔다. 일행은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중국인 농부 옷을 입고 구럭 망태를 걸머졌다. 똥자루를 어깨에 메거나 갖가지 보따리도 쥐었다. 일행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일이 없도록 다섯 명 사이에는 중국인들이 섞였다. 만약 한 명이 잡히더라도 네 명은 살아서 충칭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동지를 위한 일이었고, 조국을 위한 일이었다. 일행은 장꾼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시간에 철도를 건너기로 했다. 그 ..

021. 장준하 일대기 08 - 6천리 대장정을 떠나다

동족상잔의 피바람 - 두 개의 중국군, 중앙군과 팔로군 전투는 의외로 싱거웠다. 적의 소굴을 박살 내기 위해 벌이는 전투가 아니었다. 용기백배해 목숨을 불사르는 치열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퉁탕퉁탕 총소리만 났을 뿐이지 치명적인 타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적들을 쫓아내려는 티가 팍팍 났다. 전투가 어이없이 진행되는 이유가 있었다.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일본군과 중국군의 교전이 아니었다. 중국군이 중앙군과 팔로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사령부에 떨어진 수류탄도 팔로군의 소행이었다. 국민당은 1921년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공산당과 제1차 국공합작을 단행했다. 제2차 국공합작은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제2..

020. 장준하 일대기 07 - 민족의 운명을 가슴에 아로새기다

친일파 처단의 꿈 - 새로운 결심 당장은 일본군의 간교에 농락당하지 않았다. 사령관이 부대에 일본군 탈영병은 없다고 가짓부리를 떨어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장준하 일행은 또다시 포로 맞교환 같은 잔인한 얘기들이 나올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사령관이 일본군으로부터 타국의 아들을 지켜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장준하는 되레 잘됐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다가 죽더라고 사생결단으로 길을 나서서 임시정부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김준엽은 허겁지겁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령부의 진지 이동이 곧 시작되니 준비하라고 일렀다. 장준하 일행은 전날 지급받은 새 군복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별빛도,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일행은 중국군과 함께 어둠 속을 가르며 걸었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