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미군의 민간인학살사건 9

⑨경남 진주, 사천서 벌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진주시 오미리 민간인학살사건 1950년 7월 말 어느 날 오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에서 미군의 폭격이 자행됐다. 진주 쪽에서 들려오는 폭격소리에 놀란 시목마을 주민들은 전장을 피해 피란길에 나섰다. 이때 주민들 머리 위로 미군 전투기 1대가 대평면 방향에서 날아왔다. 주민들은 미군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행렬을 지어 달구지길을 걸었다. 하지만 전투기는 시목마을(감나무골) 뒷산을 두어 번 선회한 뒤 돌아와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 몸을 숨겼다. 전투기는 주민들이 바위 뒤, 두렁 아래, 가옥 사이로 사라지자 급히 팔미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민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은 사건이었다. 딱 전쟁놀이였다. 이 사건으로 어린이 ..

⑧영동 매천리 민간인학살사건 - 우리 마을은 ‘불꽃밭’이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마을 입구에 조성된 작은 꽃밭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했다. 울타리 옆에는 올망졸망한 토마토들이 여기저기에서 불에 타는 듯 익어갔고, 가벼운 바람에도 가녀린 줄기를 흔들어대는 코스모스가 진분홍빛 꽃잎을 벌써부터 늘어뜨렸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한때 이 마을은 한국전쟁 중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로 완전히 전소됐다. 마을(매끄네)에 있던 주민 60여 명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고, 마을 뒤편 ‘밴디골’에서도 주민 7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에 혹독한 강제노역에 동원돼 손톱이 빠지도록 일하면서도 마을을 지켜왔던 순박한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혹독한 시련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시어머니와 아들, 딸을 잃은 임복희 씨는 복숭아와 고구마..

⑦진주 반성면 새골 민간인학살사건 - 아예 입을 꼬매고 살았다

한 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낮게 드리운 집으로 들어갔다. 한 할머니가 하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올린 채 고추를 널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장소를 묻자,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불렀다. 아들도 족히 60세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한국전쟁 때 진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피란을 가도 죽은 목숨이어서 전쟁이려니 하고 숨죽이고 살았지요. 여기 마을 주민들도 미군한테 폭격을 당했다는 소리를 어르신들한테 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 길로 쭉 들어가서 기찻길을 건너면 새골이에요. 거기 가서 다른 어르신한테 물어보세요.” 구름이 낮게 떠 있는 기찻길 위에서 발길을 잠시 멈췄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작은 길은 뒷산을 향해 아스라하게 뚫려 ..

⑥영동 장척리 민간인학살사건 - 노인과 장애인을 무조건 쏴 죽였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 장척리. 고향의 빛깔과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빗방울에 움푹 팬 우사와 동네 가운데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척박한 땅을 뚫고 나온 봉숭아와 긴 자루를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뒤태까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이 가꾸고 의지하며 사는 마을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냉랭함이 휘감고 있었다. 장척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근 산의 골짜기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싸우던 격전지였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미군의 소개 명령이 떨어져 피란을 가야 했다. 인민군으로 오인되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짐을 꾸렸다. 하지만 노인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피란을 포기했다.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러..

⑤진주 약골 민간인학살사건 - 팥죽을 쏟아부은 것처럼 자갈밭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조심조심 걸었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기차가 달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철길 옆으로, 빗물을 받아내는 도랑과 시멘트로 붙여놓은 돌담이 촘촘하게 쌓여있어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면 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막막한 곳에 숨어 미군의 폭격에 몸부림치며 떨었을 피란민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오는지 귀를 쫑긋 세우며 어둠침침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조명장치가 없어 들어가면 갈수록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무성한 활엽수 숲을 헤치고 나가는 것 같았다. 성급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이따금씩 소리를 질러 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웅웅거리는 메아리뿐, 참으로 창백하고 여윈 공간이었다. 어둠..

④아산 둔포 민간인 학살사건 - 사전경고 없이 피란민 학살했다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더없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마을이었다. 녹음이 무르익어가는 산줄기는 마을을 휘감으며 펼쳐졌고, 수확의 기쁨을 기다리는 넓은 들녘은 농부를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노성교 다리 밑으로는 냇물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흘렀다. 마음만 먹으면 두 걸음에 건널 수 있을 만큼 폭이 작은 하천이었다. 나지막하게 뻗은 강둑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잎과 샛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후덥지근하지 않은 날씨라면 매끄러운 통나무를 깔고 앉아 풀피리를 불고 싶을 정도였다. 마냥 평안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된 피란민들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피해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현재 수백여 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

③미군의 민간인학살은 국제법상 미국 책임 - 사죄와 배상이 유일한 해결책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를 단죄하자는 목소리가 ‘반미’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기가 무섭다. 역사 속에 감춰진 한국전쟁의 ‘끔찍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조차 한국 정부에 의해 가로막힐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정부가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가 죽어간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하는 가슴을 가졌다면 결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정부는 오랫동안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기’시 했고 미국 편에 서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을 부인해 왔다. 미군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복종적이었다. 아직까지도 미국은 ‘거짓’, ‘반쯤의 진실’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진실을 은폐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도, 피해보상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직 ‘글’과 ‘말..

②월미도 민간인학살사건 - 미군 기지 세우려고 민간인 죽였다

월미공원 입구에는 공사판에서 주워온 문짝들과 베니어합판을 붙여 만든 허름한 판잣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군데군데 낡고 삭은 플래카드 여러 개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미군의 무자비한 학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월미도 원주민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투쟁하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들은 미군에 이어 한국 정부가 몰수해 버린 고향을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에 가지 못했다. 2001년에는 인천시가 월미도를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해 버렸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1가에는 우묵하게 솟아오는 언덕배기 밑으로 ‘월미공원’이 조성돼 있다. 따사로운 햇살이 늘어지는 긴 대로 끝에 서서 이 공원을 바라보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터..

①권평근·이석우 피살사건 -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은 인산인해였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였다.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 이후에도 계속 인천 지역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일본경찰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인천항 전역에 통제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천시민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환호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을 조선의 해방군으로 알았던 까닭이다. 바다 멀리서 미군 전투기 편대가 폭음을 내며 날아왔다. 금방이라도 공습을 하려는 것처럼 인천항 상공을 빠르게 선회했다. 마치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을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미 군함이 나타났다. 인천항에 제일 먼저 입항한 부대는 미 제24군단 7사단. 일본경찰의 호의를 받으면서 상륙한 이들은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