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83

⑨경남 진주, 사천서 벌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진주시 오미리 민간인학살사건 1950년 7월 말 어느 날 오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에서 미군의 폭격이 자행됐다. 진주 쪽에서 들려오는 폭격소리에 놀란 시목마을 주민들은 전장을 피해 피란길에 나섰다. 이때 주민들 머리 위로 미군 전투기 1대가 대평면 방향에서 날아왔다. 주민들은 미군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행렬을 지어 달구지길을 걸었다. 하지만 전투기는 시목마을(감나무골) 뒷산을 두어 번 선회한 뒤 돌아와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 몸을 숨겼다. 전투기는 주민들이 바위 뒤, 두렁 아래, 가옥 사이로 사라지자 급히 팔미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민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은 사건이었다. 딱 전쟁놀이였다. 이 사건으로 어린이 ..

⑧영동 매천리 민간인학살사건 - 우리 마을은 ‘불꽃밭’이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마을 입구에 조성된 작은 꽃밭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했다. 울타리 옆에는 올망졸망한 토마토들이 여기저기에서 불에 타는 듯 익어갔고, 가벼운 바람에도 가녀린 줄기를 흔들어대는 코스모스가 진분홍빛 꽃잎을 벌써부터 늘어뜨렸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온한 마을이다. 한때 이 마을은 한국전쟁 중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로 완전히 전소됐다. 마을(매끄네)에 있던 주민 60여 명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고, 마을 뒤편 ‘밴디골’에서도 주민 7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에 혹독한 강제노역에 동원돼 손톱이 빠지도록 일하면서도 마을을 지켜왔던 순박한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혹독한 시련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시어머니와 아들, 딸을 잃은 임복희 씨는 복숭아와 고구마..

⑦진주 반성면 새골 민간인학살사건 - 아예 입을 꼬매고 살았다

한 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낮게 드리운 집으로 들어갔다. 한 할머니가 하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올린 채 고추를 널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장소를 묻자,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불렀다. 아들도 족히 60세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한국전쟁 때 진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피란을 가도 죽은 목숨이어서 전쟁이려니 하고 숨죽이고 살았지요. 여기 마을 주민들도 미군한테 폭격을 당했다는 소리를 어르신들한테 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 길로 쭉 들어가서 기찻길을 건너면 새골이에요. 거기 가서 다른 어르신한테 물어보세요.” 구름이 낮게 떠 있는 기찻길 위에서 발길을 잠시 멈췄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작은 길은 뒷산을 향해 아스라하게 뚫려 ..

⑥영동 장척리 민간인학살사건 - 노인과 장애인을 무조건 쏴 죽였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 장척리. 고향의 빛깔과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빗방울에 움푹 팬 우사와 동네 가운데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척박한 땅을 뚫고 나온 봉숭아와 긴 자루를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뒤태까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이 가꾸고 의지하며 사는 마을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냉랭함이 휘감고 있었다. 장척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근 산의 골짜기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싸우던 격전지였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미군의 소개 명령이 떨어져 피란을 가야 했다. 인민군으로 오인되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짐을 꾸렸다. 하지만 노인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피란을 포기했다.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러..

⑤진주 약골 민간인학살사건 - 팥죽을 쏟아부은 것처럼 자갈밭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조심조심 걸었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기차가 달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철길 옆으로, 빗물을 받아내는 도랑과 시멘트로 붙여놓은 돌담이 촘촘하게 쌓여있어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면 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막막한 곳에 숨어 미군의 폭격에 몸부림치며 떨었을 피란민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오는지 귀를 쫑긋 세우며 어둠침침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조명장치가 없어 들어가면 갈수록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바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무성한 활엽수 숲을 헤치고 나가는 것 같았다. 성급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이따금씩 소리를 질러 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웅웅거리는 메아리뿐, 참으로 창백하고 여윈 공간이었다. 어둠..

④아산 둔포 민간인 학살사건 - 사전경고 없이 피란민 학살했다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더없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마을이었다. 녹음이 무르익어가는 산줄기는 마을을 휘감으며 펼쳐졌고, 수확의 기쁨을 기다리는 넓은 들녘은 농부를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노성교 다리 밑으로는 냇물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흘렀다. 마음만 먹으면 두 걸음에 건널 수 있을 만큼 폭이 작은 하천이었다. 나지막하게 뻗은 강둑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잎과 샛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후덥지근하지 않은 날씨라면 매끄러운 통나무를 깔고 앉아 풀피리를 불고 싶을 정도였다. 마냥 평안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된 피란민들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피해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현재 수백여 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

③미군의 민간인학살은 국제법상 미국 책임 - 사죄와 배상이 유일한 해결책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를 단죄하자는 목소리가 ‘반미’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기가 무섭다. 역사 속에 감춰진 한국전쟁의 ‘끔찍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조차 한국 정부에 의해 가로막힐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정부가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가 죽어간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하는 가슴을 가졌다면 결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정부는 오랫동안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기’시 했고 미국 편에 서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을 부인해 왔다. 미군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복종적이었다. 아직까지도 미국은 ‘거짓’, ‘반쯤의 진실’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진실을 은폐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도, 피해보상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직 ‘글’과 ‘말..

②월미도 민간인학살사건 - 미군 기지 세우려고 민간인 죽였다

월미공원 입구에는 공사판에서 주워온 문짝들과 베니어합판을 붙여 만든 허름한 판잣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군데군데 낡고 삭은 플래카드 여러 개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미군의 무자비한 학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월미도 원주민들과 이들의 후손들이 투쟁하는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들은 미군에 이어 한국 정부가 몰수해 버린 고향을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에 가지 못했다. 2001년에는 인천시가 월미도를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해 버렸다.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1가에는 우묵하게 솟아오는 언덕배기 밑으로 ‘월미공원’이 조성돼 있다. 따사로운 햇살이 늘어지는 긴 대로 끝에 서서 이 공원을 바라보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터..

①권평근·이석우 피살사건 -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은 인산인해였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였다.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 이후에도 계속 인천 지역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일본경찰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인천항 전역에 통제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천시민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환호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을 조선의 해방군으로 알았던 까닭이다. 바다 멀리서 미군 전투기 편대가 폭음을 내며 날아왔다. 금방이라도 공습을 하려는 것처럼 인천항 상공을 빠르게 선회했다. 마치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을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미 군함이 나타났다. 인천항에 제일 먼저 입항한 부대는 미 제24군단 7사단. 일본경찰의 호의를 받으면서 상륙한 이들은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삼성식물환경연구소 태현숙 박사, 친환경 잔디 그린에버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나뉜 밭에 파릇파릇한 잔디가 호방하게 펼쳐져 있었다. 각기 다른 품종의 잔디를 식재해 연구하고 실험하는 잔디 시험포지였다. 잔디밭의 상태는 각양각색이었다. 잔디밭에서는 어떤 시기에 잔디를 심어야 가장 적정한지, 잔디를 떠낼 때 어느 정도 깊이로 떠내야 하는지, 잔디를 깎을 때 얼마만큼 잘라야 하는지, 실험한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포지에는 여러 품종의 잔디도 동일한 조건에서 키워지고 있었다. 이곳은 잔디밭 특유의 청량한 기분을 느끼게 했지만 전체적으로 질은 떨어져 보였다. 관리도 전혀 하지 않아 잡초가 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잔디 고유의 특성을 보기 위해 영양제나 제초제를 치지 않아서였다. 시험포지에서 자라는 수많은 잔디 중에서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잔디가 있었다..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윤창환 장성군 산림소득담당, 객토사업으로 품질 좋은 잔디 생산

객토는 일반적으로 토질을 개량하기 위해 양질의 흙을 파다가 논밭에 옮기는 일을 말한다. 객토를 하면 땅이 젊어져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잔디 농사에서 객토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잔디는 흙과 함께 떠내 ‘뗏장’으로 판매되는 작물이다. 해가 갈수록 지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계속 잔디농사를 지으려면 흙을 채워줘야 한다. 지력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흙을 충당하는 것이 잔디농사에서 말하는 객토다. 장성군에서 처음으로 객토사업 지원에 나섰다. 장성에서 잔디 농사가 시작된 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은 농가에서 자비로 객토비용을 충당해 왔다. 장성군에서 객토사업을 총 지위하는 윤창환 산림소득담당자를 만나 올해 진행되는 잔디농가 지원 사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질문 장성군에서 처음으로 객토사업 지원을..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문국일 매안초등학교 행정실장, 안전과 정서함양에 좋은 천연잔디운동장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매안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학생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알고 보니 전교생이 너무 많아 학년별로 나눠 열리는 운동회였다. 이날은 5학년 학생들의 운동회였다. 매안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잘 다듬어진 천연잔디가 곱게 펼쳐져 있었다. 잔디는 뛰어다니는 학생들의 발바닥을 소리 없이 부드럽게 폭신폭신 안아줬다. 학생들이 넘어져도 다칠 위험은 적어 보였다. 따뜻한 볕이 떨어지는 잔디 운동장은 그야말로 생기로웠다. 학생들이 자연 속에서 감각을 깨우고 정서를 기르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멀리서 파릇파릇한 잔디를 밟으며 뛰노는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문국일 매안초등학교 행정실장이었다. 문 실장의 얼굴에서는 그리움 같은 것이 가득 묻어났다. 잔디밭에 ..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정응기 잔디 재배 농민, 잔디 중 제일 좋은 품종, 그린에버

잔디를 재배하는 방법은 다른 작물과 다르지 않다. 생육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제초와 병충해 예방에 힘쓰며, 적시에 잔디를 깎아주면 된다. 그런데도 잔디가 판매되지 않으면 품종을 바꿔야 한다. 우수한 잔디 품종을 선별해 심는 것이 잔디 농가의 수익을 높이는 비결이다. 보기 좋고 관리하기 편한 잔디를 싫어할 소비자는 없다. 장성에서 35년간 잔디를 재배하는 정응기 씨는 2015년에 삼성에서 개발한 신품종 그린에버를 심었다. 한국잔디협회에서 개발한 두 가지 신품종을 심었다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까닭이다. 게다가 삼성이 잔디를 모두 구매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품종이 좋건, 말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삼성에서 잔디 농가와 계약재배를 하는 조건으로 신품종 잔디 그린에버를 제공했다. 지자체에서는 안정적..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권태영 공학박사, 경량형 녹화시장의 주인공 ‘모듈형잔디’

잔디가 옥상녹화의 부속이라고요? 잔디 소비 확대를 위한 품종 개량과 기술 개발, 판로 개척이 필요한 시점이다. 골프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여러 해 걸친 건설경기 악화로 잔디 소비량은 급감했다. 그중에서도 기술 개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정된 자원의 효용과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데다 잔디 산업의 미래 경쟁력까지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잔디 활용도를 높이는 신기술이 완성 단계에 와있다. 권태영 박사가 이끄는 친환경농업연구전문기업 (주)생태공간이 개발한 ‘모듈형잔디’다. 모듈형잔디가 완성되면 잔디 상업화에도 기여가 크겠지만 전체 옥상녹화 사업의 판도를 바꿀 가능성도 농후하다. 권 박사를 만나 ‘모듈형잔디’에 대해 들어보았다. 질문 모듈형잔디를 소개해 달라. 답변 옥상녹화든 실내조경이든 어디에서..

장성잔디협회 - 천연잔디 운동장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 학교에 인조잔디 운동장이 조성됐다. 학교들은 관리비용과 사용성 면에서 인조잔디가 우수하다고 판단해 너나 할 것 없이 인조잔디를 깔았다. 하지만 교체 시기가 되자 예산문제를 이유로 잔디조성 사업을 망설이고 있다. 예산이 문제라면 조성비용이 저렴한 천연잔디를 깔면 되지만 천연잔디 운동장 조성에는 더 큰 우려를 나타냈다. 천연잔디 운동장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잔디 재배 농민들은 “천연잔디 운동장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면서 “천연잔디가 인조잔디보다 비용도 싸고 건강에 좋은데 편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천연잔디는 인조잔디보다 조성비용이 적게 든다. 한국잔디를 이용하면 절반가격으로, 비싼 서양잔디를 깔아도 인조잔디보다는 싸다”며 “인조잔디는 수명이 다하면 교체해야 하..

장성잔디협회 - 천연잔디 운동장 관리 요령

천연잔디 운동장을 조성한 뒤에는 물이나 비료 주기, 잔디 깎기, 잡초나 병충해 방제 작업 등을 해줘야 처음과 같은 운동장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원활한 천연잔디 관리를 위해서는 비 온 후 운동장 사용을 억제하는 것이 좋으며, 조기축구회에서 매일 잔디구장을 사용하면 잔디성장과 관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용 횟수를 조절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관리로도 회복이 불가능할 때는 잔디 재배 농가나 시공업체를 문의해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관수 = 물은 시공 후에는 10~15일 동안 매일 주고, 흙에 물이 충분히 적셔질 정도로 흠뻑 줘야 한다. 한지형 잔디는 1주일에 1회 정도 물을 주며, 난지형 잔디는 특별하게 가물지 않으면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1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1회 ..

장성잔디협회 - 잔디산업 미래...유통체계 개선, 판로개척, 홍보 마케팅에 달렸다

잔디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포화된 골프장과 침체된 건설경기로 생산액이 급감했다. 잔디 소비를 확대하기 위한 아이템 수립이 필요한 시점을 넘어섰다. 잔디 재배 농가와 유통, 시설업체 관계자들은 유통체계 개선과 판로 개척, 홍보 마케팅에 답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잔디 유통시책을 수립하고, 잔디 활용도를 높이는 사업을 개척하며, 잔디 대중화를 위한 홍보가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장기적으로 잔디 산업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잔디 유통문제는 하루 이틀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잔디를 심고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했다. 폐단을 막기 위해 조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모든 잔디가 조합을 통해 유통되지 않았다. 판매상들이 재배 농가와 직거래를 하면서 덤핑과 도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장성명품잔디 이용무 대..

장성잔디협회 - 아름답고 풍요로운 미래를 위한 선택, 옥상정원

산책로 옆에는 작은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여기저기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절정의 초록을 구가했고, 바닥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운치를 더했다. 자연이 선사했던 기쁨을 똑같이 느끼게 하는 옥상정원이었다. 회색빛 옥상은 차갑고 황량한 도시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콘크리트의 냉혹한 재질감은 경제성장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각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서를 메마르게 했다. 이런 옥상에 잔디를 깔고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옥상을 꽃과 녹음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조성해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옥상정원에서 인간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옥상정원의 화룡점정, 잔디 이대목동병원 본관 3층에는 옥상정원이 마련됐다. 잿빛 시멘트 공간이 영육이 괴로..

장성잔디협회 - 천연잔디 운동장 조성한 장성삼서중학교를 가다

장성에는 잔디의 주생산지답게 운동장에 장성중지가 깔린 학교가 있다. 장성삼서중학교다. 삼서중학교에 들어선 첫 느낌은 학교가 아니라 공원이었다. 공을 차며 뛰어놀고 싶을 기분이 저절로 생길 만큼 상쾌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삼서중학교 운동장은 장성은 물론 광주나 함평 등 인근 지역 축구동호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한나절 동안 머물며 공부하고 운동하는 학교의 환경은 학생들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산뜻하고 안락한 곳과 먼지 날리고 불편한 곳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3년 동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삼서중학교는 생기가 넘쳤고, 선량하고 씩씩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삼서중학교의 사계절 풍광은 잔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삼서중학교는 봄이 되면 벚꽃과 소나무가 초록으로 변하기 ..

장성잔디협회 -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학교 운동장의 미래를 보다

인간에 알맞게 설계된 시설과 동선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각종 편의시설과 넉넉한 주차장은 인상적이었다. 일본이나 미국의 최신 구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특히 눈에 띄는 곳은 외야석이었다. 다른 경기장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빽빽하게 들어찼고, 바닥은 콘크리트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환경 친화적이었다. 빈틈없이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고, 잔디의 푸른빛은 청량한 하늘빛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경기장에 다녀온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주변 편의시설과 외야관람석을 칭찬했다. 이들은 “외야석에 돗자리를 깔고 앉을 수 있도록 잔디가 촘촘하게 깔려 있어서 좋았다”면서 “관람석에 잔디 깔린 곳은 생각지도 못한 배려였고, 마음이 너무도 편해서 몇 시간 교외로 나가 쉬다 온..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이용무 장성명품잔디 대표이사 “스포츠경기장에는 서양품종”

잔디 상태에 불만을 터뜨리는 선수들이 많았다. 축구 지도자들도 잔디 때문에 보다 안전하고 수준 높은 경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심지어는 경기장의 상태에 따라 전략도 바꾸게 된다, 잔디 상태가 좋지 않으면 선수들의 경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팬들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앓는 소리를 해왔다. 잔디 상태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기에 이렇게 민감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선수나 관람객 모두 인조잔디나 맨땅보다 천연잔디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축구의 경우는 더욱 극명하다. 축구 선수들은 질 좋은 천연잔디가 깔린 경기장에서 공차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정도다. 장성명품잔디 이용무 대표이사는 그 이유에 대해 “천연잔디가 선수들의 피로도와 부상위험도를 낮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천연잔디구장은 부상의 우려가..

장성잔디협회 - 한국 천연잔디의 요람, 장성에 가다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잔디밭을 천천히 걸었다. 잔디의 푹신한 촉감이 발아래에서 느껴졌다. 구르고 싶을 정도로 고운 잔디였다. 아우라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기품이 곳곳에서 흘러내렸다. 멀리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잔디를 뒤흔들었다. 육중한 농기계는 연신 왕래하며 잔디를 뿌리 끝까지 짓눌렀다. 그럼에도 잔디는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서서 제 모양을 유지했다. 가까이에서 잔디를 보니 옆으로 뻗어나간 줄기가 길고, 많았다. 여러 사람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처럼 짱짱했다. 모진 비바람과 압력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의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어떤 환경서도 강한 적응력과 생명력 장성은 국내 최고 품질의 잔디를 생산한다. 여러 대를 이어 내려온 잔디 재배 노하우도 보유하고 ..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잔디재배농가 김희수 씨 “좋은 잔디? 관리도 중요”

잔디밭으로 개간한 논에서 40×60cm 크기로 잔디가 떼어지고 있었다. 잔디는 윤이 나고 우거져 푸르렀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잔디에는 이슬이 맺혀 은구슬처럼 반짝였다. 잔디를 한 움큼 쥐어보니 단단하고 포근했다. 잔디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좋은 잔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잔디였다. ‘간지’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농민이 잔디를 땅에서 떼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장성 구산마을에서 잔디밭 3만 평을 재배하는 김희수 씨다. 김 씨가 떠낸 잔디는 어느새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잘려 한쪽에 쌓였다. 바닥정리가 잘 돼있어 잔디는 반듯하고 가지런했다. 그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한해 길러낸 뗏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잔디 뗏장을 봐라. 두께가 2~3..

장성잔디협회 - [인터뷰] 장성잔디의 산증인 김홍필 옹 “농가가 열심히 해서 이렇게 컸다”

소보록한 잔디가 깔린 전원주택은 현대인의 로망이다.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식사를 하거나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길 꿈꾼다. 과거에는 돈 많은 부자들이나 누리는 특권이었다. 그 당시 잔디는 값비싼 야생 고려잔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잔디가 본격적으로 재배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저렴한 비용으로, 조금만 신경을 쓰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 됐다. 그 토대에는 김홍필 옹의 공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김 옹은 그 공을 잔디재배농가에게 돌린다. "장성이 우리나라 잔디의 최대 생산지다. 장성을 비롯해 인근지역까지 합치면 전국 잔디의 대부분이 장성이 나온다. 내가 기술 제공은 했지만 농가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장성중지는 이렇게 못 컸다. 지금도 열심히 잘 가꿔서 ..

[친일미술] 작가 소개에 친일 얘기는 왜 쏙 빼는 걸까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보지 않은 한국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1만 원짜리 지폐 속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정이 그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을지문덕, 태종 무열왕 영정도 운보의 손끝에서 나왔다. 김기창 화백은 대검을 끼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황군을 묘사한 '적진육박'이라는 그림으로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면서 특전을 누린 친일 미술가였다. '총후병사' 같은 그림은 황국신민의 영광을 식민지 국민들에게 고취시키는 그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는 3.1 문화상, 은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으며, 그림의 가격도 매우 비싸 보통 사람들은 구경조차 쉽게 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명성만큼이나 김기창 화백 전시가 자주 열린다. 전시 소개를 보면, 그의 친일..

⑤와카마츠 코지 - [리뷰] 더렵혀진 백의, 1967년작

핏빛 성찬으로 인도하는 민중혁명 수척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간호사들을 죽이는 한 남자. 그는 피를 보고, 피가 묻어난 자리를 보고, 낭자한 피의 흔적을 본다. 여자들의 얼굴이 차츰차츰 새파래지는 것을 보면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며 미칠 듯이 통곡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그는 바다의 희망을 노래하며 또 방아쇠를 당긴다.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핏빛 성찬'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혁명'. 피와 진땀, 소름과 격정 없이는 혁명도 이룰 수 없음을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깨끗하고 고상함으로 위장한 간호사들(국가권력)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혁명의 길에는 메마른 이야기조차 소모적인 법. 또 이 과정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코지 감독은 바삭바삭하고..

④와카마츠 코지 - [리뷰] 벽속의 비사, 1965년작

혁명가의 기만과 성장 제일주의에의 종말 아파트 벽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수험생. 그에게 있어 창문 너머로 몰래 엿보는 세상은 애정 어린 기쁨이자 음란한 취미생활이다. 협착한 세계관에서 나오는 증오와 혹독함이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재단하기 위해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필요로 하는 대상. 수험생은 이 영화에서 선악을 판가름하고 형벌을 가하는 주체로 나선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수험생이 망원경으로 투시하면서 들려주는 일본은 기발하고 참신하면서도 로망 포르노식의 표현법을 제대로 살린다. 이 영화는 이 학생의 '병적인 관음증'으로 기만적인 혁명가의 일상과 성장 제일주의가 판치는 일본 사회의 무력함을 고발한다. 주제의식을 극도로 부각하는 이런 연출기법은 시퍼런 칼을 들고 설치거나 핏발을 세우고 말싸움을..

③와카마츠 코지 - [리뷰] 가라 가라, 두번째 처녀, 1969년작

돌아선 혁명가와 국가권력의 자화상 오해를 무릅쓰고 한 소녀의 죽음에 전적으로 수긍해야 함을 느낀다. 그토록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했던 소녀.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택한 죽음. 길가에 쓰러진 꽃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 없이 힘이 빠진다. 돼지처럼 서로의 육체를 탐했던 9인의 남녀를 죽인 소년의 날카로운 칼끝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옥상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전주곡은 차라리 탐스럽고 영롱하다. 소년이 보여주는 '자아의 과잉'은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키워가는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하면서 스스로 생명을 처단하는 기계가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독약이 된다. 소년은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마음을 대변한 것 같다. 스스로 '혁명가'라는 '자아의..

②와카마츠 코지 - [인터뷰]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예술은 자심과 매우 가까운 벗이다. 벗이 괴로울 때는 얼굴만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예술은 작가의 심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서로 다른 생활을 하고, 서로 다른 보금자리에 있다 해도 자기 의지와 어긋나지 않게 벗은 행동한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을 만나기 전, 마음속에서 몽실몽실 피어났던 근심도 이러한 이유였다. '로망 포르노'에 심취한 그의 예술세계처럼 거침 없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큰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추측은 예상을 빗나갔다. 표정에는 공손함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고, 주름살에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명랑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끔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는 매우 어리숙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며, 배꼽을 잡고 웃다가도 가만히 생각에 잠길 때에는 ..

①와카마츠 코지 - 그는 누구인가?

와카마츠 코지(Wakamatsu Koji) 감독은 1963년 영화계에 입문해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일본이 1960년대와 70년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영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정치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한 시대를 아우르는 독특한 영상미학을 구축했으며 저항과 진보, 개혁과 혁명의 대명사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코지 감독은 성을 통해 권력 시스템을 파괴하는 '로망 포르노' 장르를 개척했다. 파시즘, 사디즘, 마조히즘, 폭력 등으로 일본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해부했으며, 도발적이고 노골적인 영상으로 우경화에 매몰된 정치권에 극렬히 저항했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고 마니아가 됐다. 그는 일본 독립영화의 정신적인 지주로 불리고 있으며, 해외 영화계에서도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