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함경아 화가 - 폭력의 종언을 고하는 누언

이동권 2022. 9. 25. 22:02

함경아 작가


제6회 광주비엔날레 '미제국주의와 전쟁을 전시하기' 섹션에서 처음 함경아 작가의 작품을 봤다. 함 작가는 그때 바나나에 얽힌 추억들을 채집한 영상설치 작품 ‘허니 바나나(Honey Banana)’를 선보였다. 그는 필리핀, 독일, 슬로베니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촬영하고 인터뷰했던 영상들을 거대하게 쌓인 바나나 박스와 함께 전시했다. 이 작품은 사회 속에서 미술의 역할이 무엇이고 미술을 통해 어떤 얘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 선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제가 어렸을 때 바나나는 매우 비싼 과일이었는데 이제는 바나나가 썩어가고 있어요. 다국적 기업의 횡포 때문이지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제국주의, 신자유주의의 현실 속에서 겪는 인간의 상실감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귀한 과일이었던 바나나가 이렇게 변해버렸잖아요. 동유럽에서도 이런 현상은 벌어지고 있어요."

쌈지스페이스에서 함경아 작가를 만났다. 함 작가는 2007년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착복한 전직 대통령의 집에서 나온 폐기물을 수집해 거대한 층계 위에 진열했다. 이 설치작품은 러시아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작품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오데사의 계단’을 소재로 차용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부정부패로 얼룩진 당대의 권력이 우리 역사에 기억되고 기록되는 것에 대한 싸늘한 냉소를 퍼부었다.


함 작가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사소한 물건을 훔쳐 박물관에 전시한 작품으로 돈과 권력에 물든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작품은 어떤 개념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과 매체를 유추해내는 예술가의 ‘센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영국박물관에서 이집트 섹션을 봤어요. 정말 멋졌지만 ‘참 많이도 훔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 박물관은 식민주의적 사관에 의한 문화 강탈의 현장이었고, 그러한 우월감을 바탕으로 계속 부를 축적해가는 거대한 권력을 보여주었어요. 그래서 권력을 갖지 않은 개인이 그와 같은 방식을 모방하면 어떻게 될까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권력과 폭력의 문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핏 보면 전쟁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그의 작품은 권력과 폭력이 사람들에게 주는 상실감,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미화되고 있는지 낱낱이 까발렸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보편적으로 나눌 수 있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권력의 독설과 골수를 찌르는 준절함과 예리한 성찰이 스며있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시장 초입부터 눈을 뗄 수 없는 작품들이 가슴을 뛰게 했다. 서로 뒤엉킨 수천가닥의 색 선들이 조명에 반사되면서 미묘한 빛을 발산했다. 마치 하얗게 말아놓은 솜털구름에 오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그림이 아니라 ‘자수’였다. 보통 기계로 짠 자수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과장돼 보여 깊은 맛이 없어 보이는데 그의 작품은 달랐다. 모두 직접 손으로 짠 듯 고고한 느낌이 들었고 그림이라고 착각할만했다. 

 

그는 “북한에 보내 만든 자수”라면서 “북한 자수는 조선화 자수를 계승했기 때문에 남한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독자들 중에서는 ‘수공 비용이 저렴해서 북한에 맡겼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왜곡되고 억압된 분단의 현실을 깨고자 어렸을 때 보았던 ‘'삐라’의 형식을 빌려 북한에 제작을 맡겼고, 공간과 이데올로기적인 거리를 뛰어넘는 남북한 합작품을 만들어 민족의 소통을 이뤄냈다. 또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인터넷에서 수집된 이미지들이 수공예라는 아날로그적인 노동의 시간으로 전환되면서 함경아표의 예술로 재탄생되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작품 90% 이상이 공안당국에 의해 압수돼 다시 제작해야 했다. 전시돼 있는 병풍글씨는 전부 압수돼 남쪽에서 다시 만들었고, 다른 자수 작품과 미완성된 작품은 설명을 첨부해 함께 전시했다.

“삐라의 형태지만 선정적인 글이 아니라 뉴스예요.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전쟁과 테러리즘을 담은 내용이죠. 시인에게 부탁해서 뉴스를 고어체적인 시어로 바꿨어요. 이를 중국에 있는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보냈고요. 전투장면, 기관총을 쏘는 장면 등 이라크 어린이들이 전쟁과 테러를 그린 이미지도요. 북한 노동자들이 자수를 뜨면서 자연스럽게 뉴스를 읽었을 거예요.”

1층과 3층을 연결하는 2층 복도에는 여행용 트렁크들이 쌓여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공간에 짐을 쌓아놓은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작가와 대화를 한 뒤에야 비로소 ‘비행기 내 액체류반입금지령’을 풍자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작품은 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법과 시스템이 오히려 인권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비꼬는 설치작업이다. 그는 액체류반입금지령이 시행된 후 인천공항에 압수된 액체류를 기증받아 작품을 만들겠다는 기획안을 공항 측에 제출했지만 계속 거절당하고 있다.

다른 공간에는 AK소총, 권총 등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는 살상무기들이 도자기로 구워져 있었다. 섬세한 표면처리나 채색, 형태를 보면 제작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백자의 표면에는 한 폭의 동양화가 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에는 군함과 전투기들, 심지어 히틀러의 그림도 있었다. 꽃 대신 총기를 꽂아 놓은 꽃병도 있었고, 무기가 담긴 접시들이 밥상처럼 차려진 저녁 식탁도 있었다.

그는 단단하고 무거운 총기 이미지를 깨지기 쉽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도자기로 만들어놓았다. 아마도 깨지기 쉬운 평화, 명분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았다.

“무기들을 깨지기 쉬운 고백자로 만들었어요. 유리나 사기로 제작해도 되지만 폭력이나 전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도자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폭력이나 전쟁을 깨지기 쉬운 것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도자기를 선택했어요. 실제로 지구에서 평화로웠던 날들을 세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요. 이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전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함경아 작가의 작품은 미술계의 평판이나 예술성에 비해 콜렉터들의 호감을 사지 못한다고 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행위를 그러모은 작품들이 소장되기도 힘들고, 썩 예뻐 보이거나 관심을 끌만한 지향점도, 쉽고 재밌게 느낄만한 주제의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미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향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모의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반전, 평화, 인권 등 사회성 짙은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졸리는 그 이유에 대해 작품보다는 의미와 예술성을 따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함경아의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킬만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지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야말로 과도한 자본주의의 찌꺼기들을 걸러내는 투쟁이 승리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요즘 미술이 돈이 된다고 해서 투자개념으로만 생각하는 건 위험해요. 좋은 작품인지도 모르면서 이윤이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래서인지 요즘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모두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예술적으로 가치가 없는 그림도 팔릴 수 있는 작품으로, 상업적으로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잘못 휩쓸릴 수 있어 걱정이에요.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주체적인 판단도 없이 ‘팔렸다’에 흔들리기 쉽죠. 만약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비평은 살아남을 수 없어요. 미술은 황폐화될 거예요. 말도 되지 않는 작품들이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요. 우리 사회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 그럴 거예요. 대중문화는 발달해있는데 고급문화는 없어요. 이 두 가지가 조화롭게 가야 해요. 많이 향유하는 것도 좋지만 고급문화를 키우고 투자하는 것이 필요해요. 미술을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대중문화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