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686

카를로스 아모랄레스 - 수만 마리의 검은 나비로 연출하는 초현실적 분위기

매년 봄, 전라남도 함평에서 나비축제가 펼쳐질 때마다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검은 나비로 전시장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Carlos Amorales)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의 작품 ‘Black Cloud’는 종이로 만든 다양한 크기의 나비 2만5천 마리로 전시장 벽과 천장에 설치한다. 작품 설치에는 14명으로 구성된 팀이 5일 동안 쉬지 않고 작업한다. 그 결과물은 대단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나비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쌓여 있어서 놀랍고, 나비들이 쌓임으로써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초현실적이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는 멕시코 현대 문화와 이슈들을 소재로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음악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

장숙 - 죽음의 무게를 보여주는 ‘늙은 여자의 뒷모습’

종로 3가 한복판. 머리를 산발한 채 길거리에 엎드려 누워 있는 맨발의 늙은 여자를 봤다. 한 겹 두 겹 덧칠하듯이 얼굴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검버섯과 축 늘어지다 못해 겹겹이 엉겨 붙은 목주름,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금이 간 발바닥이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그대로 투영했다.  사람들은 늙은 여자가 불쌍했을까?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그녀 앞에 붕어빵을 놓아두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불같이 분노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발끈 화를 내며 붕어빵을 그 사람에게 던졌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는 노숙자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고 절규하는 듯했다. 장숙 작가의 ‘늙은 여자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늙은 여성의 몸을 사유하듯이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운명의 끝..

이영 - 다종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상호 연결된 인드라망

동심원은 다채로운 색채가 변주하고, 올록볼록한 형태미를 발산한다. 원형이 반짝이고, 원형 구조가 어우러지고 확장하면서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다양한 원형의 색채와 조형, 찬란한 빛의 음영과 볼륨으로 색다른 공명을 전한다. 고도로 세련된 도안적 구성은 강렬한 생동감과 밀도 높은 침성(묵직하게 가라앉는 성질)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허공에 겹쳐 놓은 것 같은 수많은 원형 이미지를 창조하고, 조화롭게 병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실험을 했을까? 이영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생물과 사물이 존재하고,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살면서 진화하고 윤회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불교 철학에서는 이를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인드라망은 에 나오는 말로,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에..

장 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 지금도 사랑받는 꼬마 니콜라와 좀머 씨

장 자크 상페는 삽화가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호소하며 호두나무 지팡이를 쥐고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던 좀머 씨의 모습을 그린 만화가다. 끝내 호수 속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보다 그의 그림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외로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마지막 절규는 잔잔한 그림 하나로 충분히 전달됐다. 장 자크 상페는 1932년 프랑스 페삭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르네 고시니와 함께 만들어낸 동화 ‘꼬마 니콜라’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꼬마 니콜라’ 시리즈는 1959년 첫 발표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스테디 설러이자 어린이를 위한..

이생강 - 듣는 이들의 마음 사로잡는 피리소리와 대금산조, 퉁소가락

대금, 단소, 태평소는 알아도 피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적다. 피리는 잘 알려진 악기 같지만 실제로 본 사람도, 연주하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도 드물다. 피리는 소리 자체가 요괴스럽다. 여릿하게 불면 정신을 나긋하게 만든다. 힘을 아주 빼고 불면 구슬프고, 힘 있게 내불면 가슴이 대차게 두드리며, 흥을 실으면 애간장을 녹인다. 죽향 이생강 선생의 피리소리는 듣는 이를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한밤중에 바람 소리처럼 평화롭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처럼 청아하다. 피리의 미세한 음 처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기교 때문이다. 이생강 선생은 곧고 청아한 ‘대금’ 연주로 잘 알려진 명인이다. 하지만 피리, 쌍피리, 단소, 소금, 퉁소, 태평소 등 모든 관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타고난 예인이자 전설적인 연..

단두대가 만들어낸 희대의 예술, 밀랍인형

인도인 사업가 스리니바스 무르티는 2018년 자신의 집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내 마다비의 밀랍인형을 설치해 전 세계에 화제가 됐다. 사람들은 인도 전통의상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아내 마다비의 밀랍인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보다 더욱 감정선이 살아있는 얼굴과 정교한 머리카락, 피부 주름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압권이었다. 2021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에 설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부부의 밀랍인형은 실제와 너무 닮지 않아 철거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의 밀랍인형은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사업비 4,400만원을 들여 제작했다. 하지만 기념관 담당 직원이 가짜 계약서를 쓰고 밀랍인형 제작업체가 아니라 실리콘 제작업체에 작품 제작을 의뢰하는 비위를 저질렀다. 실리콘은 ..

소지(所志)를 아시나요?

조선 시대에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관청에 ‘소지(所志)’를 올렸다. 관청에서는 ‘소지’를 보고 판결을 내렸는데 이를 ‘제음’ 또는 ‘제사’라고 한다. 관청은 소지를 올릴 때 자신의 신분과 관청의 등급에 따라 적합한 문서 양식을 선택해 사용하도록 했고, 소지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각 상황별로 적합한 문서 양식을 제시한 지침서 『유서필지(儒胥必知)』가 19세기 초에 등장했다. 소지의 내용에는 소송, 민원, 진정, 납세, 충·효·열에 대한 포상, 입안 등이 있었으며, 소송은 묘지와 관련된 다툼, 즉 산송(山訟)에 관한 진정서가 가장 많았다. 소지는 현존하는 고문서 중에서 토지 문서 다음으로 양이 많다.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문제라서 해당..

만 레이(Man Ray) -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그린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사진작가가 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다. 그 당시 경매가가 어마어마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만 레이의 작품 '르 비올롱 댕그르(Le Violon d' Ingres)'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2022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천240만달러(약 159억2천780만원)에 최종 낙찰됐다. '르 비올롱 댕그르'는 나체 여성의 사진 위에 바이올린 에프홀을 그려 넣고 다시 사진을 찍어 인화한 작품이다. 사진 속 여성은 만 레이의 애인이자 모델, 화가 등으로 활동했던 알리스프랭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을 오마주했다. 만 레이는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사진을 그린다는 개..

홍효 - 강렬한 꽃의 생명력으로 투영한 나

정형화된 스타일이 파괴된 이미지에서 까닭 모를 희열이 진득이 밀려온다.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가라앉지 않은 색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활짝 핀 꽃들이 전위적으로 어우러지며 찬란한 생의 의욕을 고취한다. 홍효 작가는 자유분방한 색채와 붓터치로 형상화한 꽃의 강렬한 생명력에 희망이나 행복 같은 감정들을 투영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지 않게 변형하고 휘갈기면서 강조한 이미지로 대상의 실제성을 더욱 부각한다. 인간의 희망이나 행복도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홍효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 감동은 배가 된다. 홍효 작가의 ‘문득’전은 4월 16일부터 28일까지 갤러리 더플럭스 더플로우에서 열린다. 전시장 전경 작품 사진

북풍 말고 정책으로, 국민 모두가 흑금성이자 성숙한 유권자

1997년 대선 때였다. 안기부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북풍공작을 벌였다. 북한의 대남도발을 역이용한 선거전략을 펼쳤고 김대중 후보의 북한자금 수수, 국민회의의 연방제 수용과 80억 원 지원 제의 같은 갖가지 허위 사실까지 유포하며 빨갱이 논쟁을 유발했다. 정당은 자기 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끌어가려고 프레임을 띄운다.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틀을 정해서 국민들이 그 틀을 따라 시각을 정립하고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주길 원한다. 정당이 제시하는 프레임은 흔히 수구, 보수, 중도, 진보라고 하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하고, 매우 첨예하게 격돌한다. 선거 때가 되면 정당 간에 공방을 벌이는 사안이 많아지고, 끊임없이 네거티브 비방 전략이 펼쳐지면서 프레임의 스펙트럼이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가..

공성훈 - 인간사 통찰하는 풍경화

공성훈 작가는 자연과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풍경화로 그려내면서 인간사를 통찰했다. 인간사는 모두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일부분이고, 모두 인과 법칙에 따라 아랑곳없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공 작가는 전반기에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설치 같은 실험적인 작업에 전념했다. 이후 1998년을 기점으로 회화 작업에 집중해 도시와 자연을 밀도 높은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는 2021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18년 19회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다. 공성훈 작가의 ‘바다와 남자’전이 4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선광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의 고향인 인천이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공 작가의 작품은 그가 직접 현장에 보고 체험한 기록을 ..

이흥덕 작가 - 미술 고유의 역할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표현하는 것

수척해진 마음을 어루만지며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아옹다옹 다투며 공멸해 가는 인간 군상을 목격한 까닭이다. 몇 번이나 농담을 늘어놓으며 헐벗은 마음을 중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왼쪽으로 눈동자를 돌린 한 소녀의 ‘잔상’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나려고 종일토록 걸어 다녀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으스스한 소리로 되돌아오는 산울림처럼.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터널을 지나 넓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하지만 쉽사리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비스듬하게 뻗은 도로 사이에 펼쳐진 배추밭 가로줄 이랑이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산야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자..

왜 한강에 가셨어요? 세상과 단절 선택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새벽 1시. 폐 한쪽을 들어낸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숨 가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불빛이 전혀 없는 밤하늘처럼 짙고 검은 먼지가 내려앉은 한강대교 위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걱정해야 했다. ‘혹시’가 부른 불안감이었다. 셔츠 위에 까만 조끼를 입고, 까만 모자를 손에 든 한 중년 남자가 교각 이음새 부근에 앉아 '깡'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는 간간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지만 시종일관 시선은 강물에 고정돼 있었다. 술 취한 젊은이들의 고함 소리에도, 연인들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에도,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배기통 소음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은 강 끝을 응시할 때 매우 애달프게 보였다. 뭔가 커다란 고통에 직면한 듯싶었..

부모님 생각하며 듣는 노래

부모님의 말씀처럼 세상은 시끄럽고 불만에 가득 차 잔인합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예측할 수 없고,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하고 창백한 곳입니다. 온통 내일이란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자식은 두렵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뜻을 깊이 받들어 올바르고 당당하게 헤쳐 나아가겠습니다.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숨을 쉬고, 가슴속에 남긴 모든 것들을 선명한 빛으로 떠올리겠습니다. 굳센 팔로 세상을 포옹하고, 어둠 속에서도 맑고 온화한 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이 되겠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듣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부모님. 부모님이 생각나는 노래 - 1부 김영임 - 부모은중경(부모님의 은혜) 억조창생 만민시주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

문근성 고르예술단 예술감독 -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사람

원시적인 소리였다. 경쟁과 질투가 가르쳐주는 세속적인 지혜와는 다르게 근원적인 야만성을 품은 울림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시의 공포감이 아니라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자연의 생명력과 같은 전율이었다. 강렬한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슴을 조여 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려는 듯 때론 규칙적으로, 때론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허공을 갈랐다. 시간과 공간을 끊어내며 심장을 들어 올렸다 내려놓았다. 나는 연습실 한편에서 몸을 쑥 내밀고 북을 치는 광경을 지켜보다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하지만 문근성 고르예술단 예술감독은 별 얘기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떠한 얘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열정과 노력이 보이느냐..

방효성 작가 - 사유하는 몸으로서의 행위예술가

방효성 작가는 행위예술가다. 그 연장선상에서 회화와 설치미술을 병행하며, 매체의 다양성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작품에 일관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오브제를 해석하고 형상화한 언어들과 우발적이고 독창적인 행위예술로 풀어내는 미적 욕구는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이며 독특하면서 따뜻하다. 2005년에 방효성 작가를 만났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최근 쉐마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소식도 들었고,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2023)’라는 퍼포먼스도 사진으로 봤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왕성한 활동으로 노장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방효성 작가는 197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해 80년대 초반까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다. 이 시절의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시적 표현들은 ‘드로잉..

포천 - 토박이 싱어송라이터 이지상이 들려주는 ‘포천’ 이야기

싱어송라이터 이지상이 경기도 포천의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기록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 『포천』이다.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롭다. 도시 여행 정보 그 이상의 감흥과 권태로운 일상에서 모처럼 벗어나는 유를 선사한다. 재지와 달관을 촘촘히 땋은 단문과 시적 언어, 풍부한 사료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책임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수이나 시인이고, 교육자이나 철학가의 면모를 풍긴다. 공간의 감미로움을 씹고, 서정의 애달픔을 변주하고, 지성의 창날을 번뜩이는 내면의 심상과 진실성이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던 흔적들이 글에서 묻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책은 저자의 안목과 성찰, 미의식이 담긴 결과물이자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이 그대로..

‘문화가 있는 날’을 평일 아닌 주말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가까이에 있다. 점심 먹고 산책 겸 둘러보기 좋은 장소다. 호젓하고 넓은 마당과 시원시원한 건물들, 상쾌한 날씨를 한가롭게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관람료마저 무료라 웬만하면 이날은 꼭 찾으려고 노력한다. 평일 ‘문화가 있는 날’을 찾아 먹는 즐거움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에 거주하는 자의 특권이다. 평일에, 그것도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각자 생업에 있고,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문화가 있는 날’ 미술관 무료 관람은 그림의 떡이다. 여전히 미술관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술관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류인 -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한 조각가

故 류인 조각가는 근현대 조각의 구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표현기법을 과감히 모색한 조각가다. 조각의 볼륨과 무게 그리고 재료적 물성을 이용해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했지만 과감한 인체 생략과 왜곡, 극적 강조 같은 형상성을 도입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류인 조각가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아버지 류경채와 희곡작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자의식과 흙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80년대 당시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한국 화단에 정밀하고 힘찬 인체 구상조각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구상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형상적 요소가 접목된 새로운 구상조각을 선보였고, 최초로 조각과 설치미술을 결합한..

미술의 다양성 보장은 갤러리 순기능을 되살리는 것부터가 시작

매일매일 작가나 갤러리로부터 수십 통의 메일이 온다. 회화, 조각, 공예, 사진, 팝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 소식을 알리는 메일이다. 작품들은 대단히 아름답고, 멋지며, 기발한데 다소 회화에 ‘쏠림현상’이 심하다. 조각이나 판화 등 소외 장르의 전시 소식은 매우 뜸하다. 전시되는 작품의 주제는 비슷비슷하다. 작가의 소소한 일상이나 자연, 정물 등을 담아낸 풍경화가 많다. 우리 사회의 현상을 포착하거나 정치, 역사, 남북, 빈곤, 환경 등 여러 분야의 고민거리를 던지는 작품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러한 점도 일종의 ‘쏠림현상’이다. 갤러리는 유명한 작가나 보기 좋은 회화 작품, 팔릴 만한 회화 작품을 전시하는데 치중한다. 돈 때문이다. 갤러리가 전시를 열려면 보통 홍보비와 부대비용으로 한 전시 당 약..

이념을 떠나 다시 평가받아 마땅한 이름 ‘정율성’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음악가 ‘정율성’을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 태생으로 1930년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중국공산당에 몸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였던 연안을 찾아가 ‘팔로군 행진곡’, ‘연안송’ 등 많은 곡을 남겼고, 신중국 성립 이후엔 건국에 공헌한 100명의 영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은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율성이 중국 건국에 기여했으니 그는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가 중국 군가뿐만 아니라 북한 군가를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절 중국공산당에 참여했으니 매우 당..

거친 물살을 타고 짜릿한 스릴 만끽하는 내린천 래프팅

아주 사소한 욕구마저 꺾어버리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물소리 우렁찬 계곡에 앉아 시원한 수박을 먹는 것도 좋고, 금빛 모래 반짝이는 백사장에 누워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서로 몸 부대끼면서 자연을 만끽하는 레저스포츠도 그만이다.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치는 여름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윗옷을 훌떡 벗고 즐기는 목물이 간절해진다. 그럴 때는 콸콸거리며 쏟아지는 강물에 몸을 맡겨 보자. 고무보트를 타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맛이 제법이다. 거기에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물결로 넘실대는 숲, 올올하게 솟아 있는 기암괴석이 배경으로 어우러지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행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

간단한 산행과 함께 즐기는 여름가을 계곡 여행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기분도 찝찔하다. 찜통더위는 추석이 되기 전까지 이어진다. 더운 날에는 계곡을 따라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이 제법이다.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향연이 한창인 숲을 바라보면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무더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버린다. 세차게 흘러내리며 부서지는 계곡물, 총천연색 빛을 발산하는 폭포,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청량한 바람,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갈해 주는 차가운 약수가 일품인 계곡 여행지 여섯 곳을 소개한다. 설악산 - 십이선녀탕과 구만동계곡, 천불동계곡, 미천골계곡, 공수전계곡 내설악에 있는 십이선녀탕은 탕수동계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려한 풍광과 변화무쌍한 자태를 뽐내는 설악산의 진면..

의미작용 달리하는 병치의 미학, 황기훈 ‘마크 어브 플라워’ 전

황기훈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항상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 키득거렸던 적도 있었다. 황 작가의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그와 아는 사이여서 일게다. 얘기도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으니 작품이 더 잘 보이고, 의미도 색다르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인다. 황 작가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봐오면서 작가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새삼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해 나가고,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콜렉터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건 대중과의 ‘교류’다. 대중과의 교류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만나 대화하는 일부터 하면 된다. 전시 기획자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언어화 과정보..

이동환 ‘고래 뱃속’전 - 인간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육은 대부분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유의 시발점에는 근본이 있고, 그 결과의 산물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미(美)에 관해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영육은 조금 더 오묘하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 투영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조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부정해 버리거나 내적인 염원을 심화해 이데아의 세계까지 담아낸다. 이동환 작가가 형상화한 '고래 뱃속'도 예술가만의 남다른 사유에서 시작됐다. 족히 육칠십 년은 산다는 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어린 개체로 추정되는 젊은 고래가 배에 가스가 가득 차 죽어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웬만큼 먹어도 가스가 차지 않는다. 사냥 자체가 어려워 배불리 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냥에 성공해도 죽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다.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해양생물학자..

미술가들이 만든 '장난감이랑 놀자'전 - 떠올리게 하는 장난감

장난감을 떠올리면 제자리에 서서 왈왈 짖는 강아지나 자동차로 변신하는 로봇, 요란한 소리를 내는 플라스틱 실로폰이나 고무줄로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게 생각난다. 모두 공장에서 생산한 장난감이다. 블록, 소꿉놀이 같은 놀이용품도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장난감이었다. 갤러리담에서 본 장난감은 달랐다. 손에 쥐고 놀기보다 보고 즐기며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른들의 장난감이었다. 도자기처럼 깨질 위험도 있고, 괴기스러운 캐릭터도 있고, 벽에 거는 액자 형식도 있어서 아이들 앞에 놓으면 울어버릴지 모른다. 담갤러리 윈도에는 이수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도자기로 만든 중세 시대 검투사 인형이다. 이 인형들은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투사와 해골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황기훈 작가는 여러 가지..

이동환 '칼로 새긴 장준하'전 - 목판화의 힘 느끼게 하는 흑백의 강렬함

사자의 무덤을 찾고, 역사와 마주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나 애도의 의미보다는 반성적 자기 성찰을 위한 행위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고, 내면적 자각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동환 화가가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134장의 판화로 새긴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쁜 현실에 쫓기면서도 3년 동안 장 선생의 삶에 집중했던 동기는 숨김없는 고백과 반성의 시간을 통해 생활의 중심을 잡고,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데 작은 밀알이라도 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미술관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게 아카데미적이거나 요란스럽게 포장된 전시는 부담스러웠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받았다. 이동화 화가의 목판화전은 달랐..

문경식 정광훈추모사업회장 - 운동가는 그래야 해

정광훈. 고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두툼하게 열린 가슴’이다. 피 터지는 시위 현장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후배들의 긴장을 풀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도대체 저분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늘 궁금했었다. 문경식 추모사업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넉넉하고 낙관적인 분이다. 안된다고 타박하지 않았고, 실망하는 법도 없었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도 ‘쉬운 일이면 우리에게 오겠냐. 어려우니까 온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기를 북돋아줬다. 기술이 좋은 분이셨다. 1970년대 티브이가 보급될 당시 못 고칠 가전제품이 없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 돈을 엄청 벌었지만 농민운동한다고 다 접었다. 보통사람들처럼 돈을 벌었으면 큰 부자가 됐을 것..

최대선 화가 -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다 미술가가 되다

원색적인 팝아트에 익숙해져서일까? 순간적으로 매료시키는 구상 미술에만 현혹돼 왔을까? 전시장에 가득 찬 고요한 열정이 어색하지만 흥미롭게 마음을 뒤흔든다. 분명한 것은 위대한 화가의 미술만 주류를 구성하는 것도,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적 해석의 틀로만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도 우매한 감상법이다. 정확한 데생력과 색채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미술도 있지만 마음속에 색다른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미술도 존재한다. 최대선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그는 유다른 표현력과 예사롭지 않은 인내심으로 작품에 묵직한 기품을 담아낸다. 자신만의 독특한 비구상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통찰하려고 애쓴다. 그가 비구상 작품을 시작한 이유도 오랜 연습과 통찰의 과정 중에 발현됐다. ‘..

지형범 영재로드맵컨설팅 대표 -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정말 비정상일까?

‘영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진 않았다. 목표를 성취하는 데 아이큐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역사에서 위대한 발명과 발견은 대부분 영재의 천재성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이뤄졌던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영재든, 영재가 아니든 누구나 사회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으며, 영재가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그에 알맞은 교육과 사회적 환경이 요구된다. 지형범 영재로드맵컨설팅 대표도 상위 2%의 지능을 가진 아이들이 모두 뛰어난 성과를 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능이 높아도 스스로 계발하지 않거나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남다른 두각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명문대학에 다니거나 의대, 치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멘사 회원 중에 10~15% 정도다. 비율로 보면 8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