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47

개망나니 사색 언론 보도

이 책을 사신 분들께 매우 죄송하다. 숙고 없이 서두르듯 책을 펴낸 내 잘못이 크다. 인내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책 읽기가 어려울 정도다. 홈페이지에 전문을 올려놨으니 더 이상 책을 사지 말고 이곳에서 읽기 바란다. [민중의소리] 잘 살고 있는 건가? 삶을 돌아보는 바다여행… 책 ‘개망나니의 사색’ [새책] 잘 살고 있는 건가? 삶을 돌아보는 바다여행… 책 ‘개망나니의 사색’ www.vop.co.kr [하늘바람]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책] 개망나니의 사색 -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개망나니의 사색 작가 이동권 출판 민중의소리 발매 2015.08.28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얼른 구입해놓고 근 ... blog.naver.com

041. 겸허하고 진지하게 - 되돌아오는 바다에서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욕망으로 보인다. 뭍으로 가는 배에 올라 파도가 거세지는 바다를 바라봤다. 여행을 시작할 때 바다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삶은 일상을 편안하게 관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친절하거나 정다운 것도 아니야!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다가설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정숙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살았지만 뼈를 깎는 반성은 없었다. 어떤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다 지키지 못했다. 정녕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게 삶이란 말인가? 삶이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약속어음 같은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

040. 겸허하고 진지하게 - 서로 어울려 만든 하나

삶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연평도는 군사지역이면서 안보관광지였다. DMZ와 비슷했으며,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영령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비롯해 서정우 하사 전사지, 안보교육장, 연평종합운동장 피격장소, 대피소 등이 해전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었다.1) 연평도는 제각각 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로 보였다. 갖가지 형상과 이름을 가진 것들이 서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연평도를 만들어 냈다. 하다 못해 기형도의 시들마저 어우러지며 하나의 연평도를 촘촘하게 채웠다.2) 연평도는 매우 치열하고 뻣뻣한 삶의 터전이었다. 단순한 섬이나 관광지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 소박하나 광채가 있는 기념비들, 섬세하나 견고한 외관, 어두우나 강렬한 빛으로 반짝이는 색감은 평화를 바..

039. 겸허하고 진지하게 - 자신도 모르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마을을 빠져나와 연평도에 하나밖에 없는 주유소를 경유해 섬 중앙으로 들어갔다. 오지의 굴곡처럼 뻗어 있는 섬 길이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나는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처럼 그 길을 맘껏 쏘다녔다. 짓눌린 가슴의 매듭들이 하나둘씩 풀렸다. 나에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다로 떠났다. 바다와 교감하다 보면 좀 더 현명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답을 낼 수 있었다. 역시 바다는 삶의 혼탁을 씻어내고 마음공부가 되게 하는 벗이자 스승이다. 나는 사람도 자연과 닮아야 좋아했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정다움이 바다와 같이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오랫동안 겪어 봐야 됨됨이를 알 수 있듯이,..

038. 겸허하고 진지하게 - 민족을 팔아먹은 족속

뿌리를 잃으면 나라도 사라진다. 조그마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나타났다. 층계를 오르자 자그마한 사당이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숙연해졌다. 낡은 외형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장대한 기품과 은은한 색조는 고상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당은 연평도를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 주민들은 선량하고 진중한 눈빛과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로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깊은 존경심을 보였을 것이다. 충민사는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당한 조선이 청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와 협상하러 가는 중 협상단을 이끌던 임경업 장군이 들렀던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 임경업 장군은 식수와 부식을 구하려고 연평도에 머무르다가 바다에 조기가 많은 것보고 밀물 때 가시나무를 꺾어 바다에 꽂았다. 썰물 때가 되자 바닷..

037. 겸허하고 진지하게 - 젊음이 지나고 난 뒤에는

마음을 놓으면 모든 일이 수월하다. 구리동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파도는 눈보라가 요동치는 겨울들판처럼 요란하게 철썩거리고 있었다. 모가 난 돌멩이들을 둥글게 만들면서 평생을 살아왔을 파도를 생각하니 울컥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파도가 해왔던 것처럼 뭔가를 실컷 해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사랑마저도 평생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내 만족으로 끝나버리곤 했다. 내 결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고집처럼 내 사랑법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로 인해 서로에게 피로를 줬다. 단물이 빠져버리면 서로 상처를 남긴 채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사랑이 아니..

035.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망향의 한

우리 민족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통일이다. 선착장에서 도보로 30분을 걷자 조기역사관과 관광전망대가 나왔다. 이곳은 안개가 가득 쌓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기역사관에는 조기 어선의 모형 동상을 비롯해 우리나라 제일의 조기어장으로 널리 알려졌던 그때 그 시절의 연평도 사료가 전시돼 있었다.1) 나는 이곳에서 머나먼 바다를 쳐다봤다.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떠올릴 틈도 없이 바다는 광활한 안개를 쏟아 내며 빽빽이 하늘을 메웠다. 이곳은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바다다. 여기서 10km만 가면 북한 땅이다. 황해도 개머리해안이 멀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이면 관망이 가능하다. 이곳은 북녘으로 노을이 지는 모습이 아름다워 실향민을 눈물짓게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동북..

034.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이정표 없는 체제

선량한 사람이라도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 이른 아침 태풍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로는 바닷물로 가득 찼다. 사방은 안개로 자욱했다. 공기는 묵직했고, 팔다리에는 찬 기운이 맴돌았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섬은 낭떠러지와 같았다. 파도가 높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는 날에 돌아다니면 위험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에게 구리동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할머니는 신작로를 쭉 따라가면 나온다고만 말할 뿐 한 번도 해수욕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처럼 낯설게 말했다. 여행객들이 지겹거나 뭍에서 온 사람에 대한 경계심 같았다. 아니었다. 할머니는 하늘을 점점 집어삼키고 있는 먹구름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분단에 상실된 청춘의 초상이 느껴졌다. 그..

033.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사소한 것의 소중함

찬찬히 뜯어보면 사소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전망대에 올라 먹구름으로 점점 얼룩져 가는 하늘을 보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수신가능 표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태풍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 며칠 동안 배가 뜨지 않을까 싶어 손바닥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긴장한 탓이었다. 바다에 내리쬐던 햇볕이 점점 수그러들었다. 바람은 몸이 휘청할 정도로 세차게 불었다. 이리저리 몰아치며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앙상한 가로등들도 단조로운 황무지의 개미집처럼 쓸쓸함을 연출했다. 궂은 날씨를 탓하지 않았다. 시시각으로 변하는 연평도의 하루를 온몸으로 즐겼다. 나는 내 죽음이 아주 작은 자연의 일부로 치부돼도 노여움은 없었다. 마음은 가난하고 도량은 부족했지만 사는 동안 온 마음을 다해서 뜨겁게 하루하루를 태우면 ..

032.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부재한 사람들

부재는 곧 불필요로 정리된다. 새마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연평도를 소개하는 오래된 책에 해수욕장이라고 적혀 있던 곳이었다. 요즘 나오는 책에서는 해수욕장이라는 명칭이 사라졌다. 새마을 해수욕장은 물이라면 환장하는 어린아이조차 들어가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곳에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조약돌이 듬성듬성 깔렸고, 물이 빠진 곳에는 개펄이 형성돼 있었다. 개펄은 간조 때 조개나 낙지를 잡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고, 여기저기에 양식을 했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새마을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는 4층 높이의 전망대가 있었다. 이곳에 서면 ㄷ(디귿)자 모양의 선착장에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과 연평도 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에는 1960년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해수욕장 이름이 새..

031.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각박한 인간사

전쟁처럼 무서운 것이 환경재앙이다. 하늘이 연한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쫙 펴고 날던 갈매기들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우뚝 솟아오른 바위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부둣가에 나온 남자들은 몰아치는 폭풍을 걱정하면서 어선에 올라 굵은 밧줄을 동여맸다. 둔중한 군용 트럭이 길 양옆으로 물을 차내며 쏜살같이 달렸다.1) 검푸른 파도가 군데군데 도로를 삼키고 있었다. 연평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군인이었다. 북한군과의 교전 때문인지 섬 대부분은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군용 트럭과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로 연평도는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군사지역에 민간인이 거주한다는 느낌이었다. 군사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사진 촬영도 허락받아야 했다. 트래킹을 즐기..

030.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가난에 대한 소고

진짜 가난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다. 도시의 번화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선착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두 눈을 두리번거렸다. 이들의 표정에는 가슴속에 외로움이 넓게 젖어 있는 듯 웃음기가 없었다. 나는 인적이 닿지 않았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바다였다. 나는 복잡한 도시를 걸을 때면 폐 한쪽을 들어낸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훑어봐도 어떠한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 젊은 연인들의 고함소리,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배기통 소음,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끙끙거리는 아주머니들의 한숨만이 이곳이 삭막한 도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어쩔 때는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걸어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부딪친 것도 ..

029.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조각난 마음

사람들의 노고를 쉽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뿌연 안개가 걷히자 연평도가 눈앞에 보였다. 연평도는 어느 작은 도시의 터미널처럼 분주했다. 여객선을 기다리는 군인과 경찰, 여행객과 섬 주민들이 서로 엉켜 모여 있었다. 나는 선착장을 보면서 오랫동안 침묵에 잠겼다. 고적한 섬에서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에서 보시락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정적과 만나고 싶었다. 착각이었다. 연평도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던 기대가 단숨에 증발됐다. 나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를 내보이고, 뭔가 재밌는 일도 꾸며 봤지만 삶은 정겹지만은 않았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만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나에게 삶의 희열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자기 ..

028.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언제나 아름답게 살고자 했다. 늙음을 모르는 젊음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쾌락을 모르는 절제가, 이별을 모르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삶도 타인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다는 엄마로 비유되곤 했다. 포용의 대명사요 넓은 마음의 표상이다. 나는 바다처럼 살고 싶다.

027. 다시 바다에서 - 동그라미를 지향하는 사회

인간의 품위는 이해와 배려에서 발견된다. 도착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다 위에서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 갑판에 나왔다.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여자가 입은 원피스가 바람에 날려 자꾸 눈길이 갔다. 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땡땡이 무늬가 도드라진 복고풍 원피스였다.1) 동그라미는 원만하고 편안한 느낌을 줬다. 더럽거나 추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또 전쟁이나 불안, 죄악이나 질병, 혼란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밝고 희망차며 즐거운 상태를 연상시켰다. 동그라미는 개인, 가정, 국가, 세계의 안녕처럼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는 고통과 절망, 번뇌와 허무로 고통받는 인..

026. 다시 바다에서 - 혼자 여행 온 그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대화는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며 나누는 문답이다. 몇몇 사람들만 남은 선실의 풍경은 휑했다. 마치 활력을 잃은 도시 같았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몇몇을 빼고는 모두 주민들뿐이었다. 한쪽에서는 말이 오갔고, 한쪽에서는 무덤덤했다. 과장되거나 축소된 것 없이 진솔하고 진실한 삶의 풍경이었다. 여행객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모자를 꾹 눌러쓴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고뇌가 스며들었다. 겉으로만 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슬픔으로 잠식된 얼굴이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낚시꾼도 혼자였다. 속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일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면 인간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성과 지성이 마비된 짐승이었다.1) 현명한 사..

025. 다시 바다에서 - 불안이 찾아와도

수많은 불행이 겹쳐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희망이다. 선실에는 영민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 남자가 여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점을 봐주는 듯했다. 남자의 말투는 총명함을 타고난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배안에서 점을 보는 모습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게도 했다. 점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은 물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제멋대로 흘렀다. 바위 밑에서 흐르다 웅덩이를 만났고, 그 웅덩이에서 넘쳐 어디론가 또 퍼져 갔다. 때론 우거진 숲 속에서 소리 내 흐르다 물안개를 일으키며 증발했고, 때론 눈 속에 스며들어 그대로 얼었고, 때론 좁은 계곡에 사는 늙은 소나무의 잔뿌리도 적셨고, 때론 맥주의 흰 거품처럼 부풀어 올라 하얗게 말라붙었고,..

024. 다시 바다에서 - 여행의 즐거움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배는 연평도를 향해 달렸다.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쳤다. 태풍의 전조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이런 날에는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따라 걷는 맛이 제법이었다.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향연으로 넘실대는 숲이 배경이면 더 좋았다. 그런 곳에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무더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더운 날에는 바다도 좋지만 산행도 괜찮았다. 산은 신록이 돋아나는 봄이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 백설로 뒤덮이는 겨울에도 좋지만 자연이 성장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여름에도 만족스럽다. 천지를 환하게 밝히는 야생화, 무지개 빛을 뿜어내는 폭포,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는 청량한 바람, 타들어 가는 갈증을 해갈해..

023. 다시 바다에서 - 피할 수 없는 길

선과 악은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두 번째 섬이 가까워지자 선실에 있던 사람의 절반쯤이 갑판에 나왔다. 그 절반의 절반은 낚시 가방을 둘러 맨 조인( 釣人)들이었다. 갈매기들은 섬보다 먼저 이들을 맞았다. 삼삼오오 모여 날면서 짧은 울음소리를 내며 배 주위를 배회했다. 시원한 바람도 길안내를 하겠다며 멀찌감치 앞장섰다. 여행을 한가한 이들의 전유물이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종종 봤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속에 여지를 두면 생각은 바뀐다. 초록빛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 없고, 신선한 바람이 피부에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꼭 먼 곳에, 돈 들여가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이나 알래스카의 거대한 빙하,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나 이탈리아 피렌체미술관에서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서 적은 ..

022. 다시 바다에서 - 신음하는 청춘들

경쟁을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모두 불행하다. 섬 주민들은 갑판에 서 있지 않고 곧바로 선실에 들어갔다. 이들에게 배는 특별할 것 없는 교통수단이었고, 바다는 매일매일 마주치는 삶의 공간이었다. 갑판에 뱃짐을 부리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섬 주민 같았다. 남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숙소가 정해져 있냐?"면서 "그렇지 않으면 자기 민박집에 오라."고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적당한 인사로 남자를 안심시키고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섬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바닷바람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던 여행객들이 하나둘씩 선실로 들어갔다. 청춘의 향기가 넘쳐나는 스무 살 갓 넘긴 대학생들만이 나와 함께 갑판에서 바다 냄새를 만끽했다. 아무런 근심 없는 표정으로 왁자하게 떠..

021. 다시 바다에서 -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는

음악은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선물이다. 따사로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잠잠했으나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한바탕 요란을 떨며 비가 쏟아부을 것 같은 하늘이었다. 전신에 왠지 모를 스산함이 엄습했다. 하늘과 바다가 꿈틀거리며 용을 쓰는 시간이 머지않았다. 태풍이 심하면 비닐하우스가 빠지직 찢어지고, 나무들이 지끈하며 부러지고, 과일이 후드둑하며 떨어지고, 농작물이 툴러덩하며 쓰러지고, 어선이 털거덩하며 뒤집힌다. 산사태와 물난리로 수백 명의 수재민이 발생할 수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만 힘들게 하는 태풍이다.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에게 여객선 직원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태풍이 오니 여행 일정을 잘 챙기세요." 기품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고..

019. 모래밭을 거닐며 - 진심이 갖는 힘

운명은 내 안에 있다. 비조봉 정상에는 정결하고 소담스럽게 지은 팔각정이 있었다. 팔각정은 오래돼 보이지 않았지만 속세의 화려함과 찬란한 쾌락을 거절하고 자연과 벗하면서 맑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했던 옛 도인들의 행보가 느껴졌다. 이곳에 올라 곡차를 마시는 그들을 상상해 보니 한층 더 애정이 깃들었다. 정상에서는 선착장과 해수욕장, 해송산책로,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정다운 시선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탁 트였고, 작은 풀잎 하나 저 수평선까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산은 영원히 푸르지만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내가 가야 할 길을 향해 달려가면 됐다. 멀리서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붉..

018. 모래밭을 거닐며 - 완성을 위해서는

일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성사시키는 어렵다. 산길을 걸었다. 눈앞에 부서지는 사유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청풍이 안내하는 등산로 위로 하얀 깃털 구름이 흘렀다. 정갈하게 수 놓인 새색시 치마폭처럼 깨끗하고, 아무렇게나 휘갈긴 붓놀림처럼 강렬한 구름이었다. 눈도 마음도, 발걸음도 황홀했다. 나는 봄이 되면 식물들이 맹렬하게 싹을 틔우고, 여름이 되면 형형색색의 꽃을 함빡 피우고, 가을이 되면 알찬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이 되면 숨을 고르며 찬 서리를 견디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고 싶었다. 도시는 자연의 섭리로 움직이지 않았다. 밤은 대낮처럼 환했고, 공원에는 쥐와 바퀴벌레만 기어 다녔다. 작은 새들이 고독한 밤의 적막을 깨우는 것조차 경험할 수 없는 곳이었다. 뿌연 매연에 ..

017. 모래밭을 거닐며 - 친구와 이웃

힘겨운 삶에서도 웃음이 난다면 좋은 친구를 둔 탓이다. 섬을 관통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젊은 남자가 조깅하고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잘 정비된 등산로가 나왔다. 일석이조였다. 바다와 함께 산이 나란히 있으니 꼭 친구 같았다. 나는 친구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었다. 서로의 결점을 알았고 이해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따뜻하고 친근하게 말하고 행동했다. 함께 뭉치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충고나 조언을 빌미 삼아 친구를 쉽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친하다는 이유로 불쾌한 얘기도 종종 건넸다. 물론 조언하지 않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거기에는 타고난 성품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의미가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친한 척하는 친구와 진짜 친구를 판..

016. 모래밭을 거닐며 - 국화 같은 삶을 꿈꾸며

자신을 역할을 할 줄 안다면 사랑은 매우 쉬운 것이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짐은 챙기지 않았다. 산책을 마치고 일찍 민박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완벽한 착오였다. 섬은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길목마다 들어서 정원을 방불케 했다. 길 따라 핀 붉은 야생화는 놀랍도록 이채로웠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국화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나는 시원하고 달디 단 국화 향기를 상상했다. 혼탁해진 가슴이 뻥 뚫리고 코끝이 후련해졌다. 국화는 맑은 눈을 가진, 나이 든 사람을 닮았다. 깊은 숲 속 옹달샘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깨끗한 물처럼 인고와 지혜 같은 것이 국화에서 느껴졌다. 국화는 어떤 욕망에도 초연하고 경건한 기운으로 가득 차 보였다. 장례식장에서 장식용 꽃으로 국화를 사용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015. 모래밭을 거닐며 - 반딧불처럼

삶의 지혜를 선물하는 것은 고난과 역경이다. 10시가 넘으니 사방은 쥐 죽은 듯 괴괴했다. 솔바람 소리만 쏴쏴 들려왔다. 도시였다면 막바지 주객들로 유흥가가 붐빌 시간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고 싶었다. 하지만 모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방충망이 설치된 창가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미는 것뿐이었다. 도시의 밤은 고단했다. 밤마다 옅은 경련에 시달렸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바람소리도 잠을 방해했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을 소리도 밤이 되면 한꺼번에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여도, 일어났다 다시 누워도 소용이 없었다. 주위에는 가까운 친구도 없었고,..

014. 모래밭을 거닐며 - 책 읽는 습관을 들이면

책 읽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 민박집을 잡았다. 작은 방에는 13인치 TV가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채널은 지상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화질이 선명하지 않았다. 옆방에는 한 쌍의 연인이 휴가를 온 것 같았다. 벌써 며칠째 묵은 건지 문 앞에는 갖가지 음식과 식기, 세면도구가 잘 정리돼 있었다. 나는 휴가를 무작정 노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맡겨진 임무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심신을 다스리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면 아주 중요한 일정마저 완전히 잊고 떠났다. 방황과 불면으로 인도했던 일들도 모두 잊고, 일에 대한 열정이나 책임감 같은 것도 내려놓고, 감정을 추슬러 떠났다. 혼자 떠나는 휴가도 고집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해도 관계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