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초창기 한국영화30선 30

이름 없는 별들 - 광주학생운동의 그날, 김강윤 감독 1959년작

하늘을 보려면 얼굴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앞만 응시하거나 발밑만 내려다보면 하늘을 볼 수 없다. 억압과 탄압보다 강한 것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짊어진 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용기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보고 있는 그 이상의 세상을 절대로 볼 수 없다. 삶은 원천적으로 우연이 없다. 외부의 영향에 수시로 바뀌는 것 같아도 모두 스스로 만든 삶이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절, 학생들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켰다. 3.1만세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진 대중 항일투쟁 ‘광주학생운동’이다. 영화 은 광주학생운동의 역사 중에서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가 11월 12일 대규모 시위운동을 조직하는 부분을 그린다. 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인 학생과 일본..

왕자 미륵 - 지도자의 덕목, 이태환 감독 1959년작

엄격한 자기 통제는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관리하지 않는 지도자는 어느 누구도 먹어 주지 않는다.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다. 누구나 얘기하는 용기와 결단력, 책임감, 계획성, 실천력 같은 미덕도 지도자에게 필요하겠다. 또 공정한 상벌과 정의로움도 요구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는 마음을 따뜻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굳세고 강인한 몸과 정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인정도 있고, 허물도 감싸고, 봉사할 줄도 알아야 지도자라 하겠다. 영화 은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살짝 알려 준다. 출생의 비밀과 로맨스에 치중한 나머지 미륵의 됨됨이를 제대로 부각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어지러운 혼란의 시대에 미륵이 어떻게 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 신상옥 감독 1959년작

낳은 정이 클까, 기른 정이 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른 정이 더 크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도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라는 말이 있다. 낳는 것보다 기르는 것이 힘들고, 더욱 많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에서도 아들은 낳아 준 엄마보다 매일 안아주고 키워 준 엄마의 품이 그리워 눈물을 흘린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국적을 불문하고 다뤄지는 영화의 주제다. ‘출생의 비밀’ 또한 TV 드라마의 흥행요소 중 하나다. 드라마 같은 일은 현실에서도 가끔씩 일어난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거나 재산 때문에 친자와 양자가 해괴망측한 법정 싸움을 벌인다. 얼마 전에는 기른 아들을 마치 친아들처럼 말하고 다닌다며 친부가 배우 차승원에게 소송을 거는 일도 있었다. 입..

여사장 -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전통 미풍, 한형모 감독 1959년 작

전쟁은 인류의 모든 죄악과 파멸을 연출한다.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승자에게는 막대한 부와 힘, 영광을 안겨 주겠지만 동란은 승자나 패자 할 것 없이 불안과 두려움, 상처를 남긴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민족상잔이라는 극명한 비극과 함께 인류애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파괴했고, 전후 평온해야 할 일상마저 생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전통적인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통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의 경계조차 허물었다. 한국인들은 죽음과 기아의 공포를 겪으면서 예의와 명분보다 물질과 실용을 중시하게 됐으며, 이러한 생존 본능은 기회주의의 만연을 낳았다. 전쟁은 비윤리적인 부패와 범법도 ..

유관순 - 조국 독립과 정의 실현의 의지, 윤봉춘 감독 1959년작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다. 하찮은 물건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도 화가 날 일이다. 하물며 땅과 주권, 민족의 정기까지 빼앗긴 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정의로운 사람에겐 더욱 참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한일합병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일진회 등 매국노들의 반역,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수치와 모욕을 넘어선 분심을 느끼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 지배를 영구 예속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했다. 또 국민에게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고, 식량이나 자원 등을 수탈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의 상징이자 구심점이 된 인물이..

돈 - 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빚은 비극, 김소동 감독 1958년작

돈을 쓰지 않고 모으는 것에만 급급한 사람들은 인간을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람보다 돈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돈이 귀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돈은 타인을 위해 써야 더욱 가치가 있다. 예술가들이 예나 지금이나 구두쇠나 수전노를 인색한 추물로 표현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돈이 인간을 지배하면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된다. 영화 은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냉정하게 그려낸다. 어렵고 힘든 현실을 핑계 삼아 헛된 탐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된다고 일러준다. 돈은 소금물과 같다. 짠물을 마시면 계속 갈증이 나듯이 돈에 대한 욕망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인간의 순수한 마음까지 송두리째 잡아먹어버린다. 돈에 대한 탐욕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악의 근원은 돈이 아니라 ..

모정 -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은혜, 양주남 감독 1958년작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동시에 여러 여자와 부부관계를 맺는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으나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일부다처제는 남자가 밖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많은 자손을 거느려 가문의 세와 노동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이용됐다. 우리나라의 일부다처제는 서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과는 성격이 달랐다.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사는 여성들은 자신과 자식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재력 있는 남편을 합법적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자가 직접 부인 선택했다.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첩을 들여 자식을 낳게 하거나 친인척의 자식을 양자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은 정실 혹은 조강지처로 불렸지만 두 번째 부인부터는 ‘첩’이 돼 아내..

화심 -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것, 신경균 감독 1958년작

짝사랑은 비극일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왜소해진다. 더 예쁘고, 더 잘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이간질시켜 사랑하는 사람을 독차지하려고도 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동이 아니다. 싸워서 얻어내는 사랑도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이 계속될 것 같아 사랑을 더욱 갈망하고,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을 진심으로 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용기와 의지가 뒷받침돼야 유지된다. 사랑은 오롯이 이타적인 마음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과 특별한 인연..

지옥화 - 신식민지 아프레걸의 몰락, 신상옥 감독 1958년작

생각이 필요하다. 함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숙고의 시간을 가진 이의 삶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어지러운 사회라며 한탄만 해서도 곤란하다. 험난한 이 세상이 어떤 이에게는 위대한 배움의 원천이자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도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대상이자 자신의 양심을 놓아버리는 계기도 된다. 영화 는 저항할 수 없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소유한 기지촌 여성을 중심으로 전후 신식민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그려낸다. 전쟁은 한 여성을 매몰찬 세상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쾌락에 도취된 채 아무런 비판 없이 휩쓸려 살았다. 그녀는 끝내 미군에 몸을 파는 삶을 선택했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했다. 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직후 멜로물에 자주 등장하..

종각 - 조선 최고 종쟁이가 되기까지, 양주남 감독 1958년작

경지에 쉽게 오를 방법은 없다. 주의 깊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예술은 답하지 않는다. 가끔 천성적인 소질을 탓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예술은 재주보다 노력의 영향이 크다. 재주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노력해봤는지 따져볼 일이다. 아주 유명한 예술가도 처음에는 다 미숙했다. 뜻도 높이 세워야 한다. 뜻이 높지 않으면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마음가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술은 무엇보다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 힘겹고 고단한 인생이지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다. 영화 은 조선 최고의 종을 만드는 사람을 꿈꾸는 예술가의 이야기다. 그의 꿈은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과의 약속에서 시작됐다. 보통 약속은 말과 행동을 지키는 것..

어느 여대생의 고백 - 모질고 모진 여자의 일생, 신상옥 감독 1958작

어려운 처지에도 냉철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은 훌륭하다. 어떤 역경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신념을 지켜내는 것은 위대하다.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운명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운명의 교묘한 장난에 삶이 농락당할 수 있다. 과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았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랬다.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사회였다. 남자가 일가를 꾸렸고, 재산도 가장만 소유했으며, 대대로 큰아들에게 재산 승계 권리가 있었다. 이러한 남성우월주의는 사회 전반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남존여비라는 말이 용어화되고 관행이 될 정도로 남성의 지위나 권리는 여성보다 우위였으며 이념적, 도적적인 잣대는 여성에게 강하게 적용됐다. 또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 중심의 윤리관을 강제로 교..

그대와 영원히 - 양심을 져버린 사랑의 결말, 유현목 감독 1958년작

사랑은 어떻게든 자기를 희생하게 된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굉장히 평화롭고 행복하다. 우연이나 억지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 무엇도 진정한 사랑을 막을 수 없다. 사랑은 삶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거나 험난한 사건사고 때문에 쉽게 꺾이는 것이 아니다. 가끔 사랑은 심하게 뒤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평온하며 정도를 따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충동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양심을 희생시켜 얻는 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일 뿐이다. 그러나 양심의 만족보다 쾌락과 광영을 충족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있다. 사랑도 거기에 붙쫓아져서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랑은 어느새 힘을 잃고 만다. 영화 는 지고지순한 마음만으로는 사랑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이 우리가 살아..

느티나무 있는 언덕 - 운명에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최훈 감독 1958년작

인간이면 누구나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두려움에 잠시 물러서기도 하고, 어떻게든지 이겨내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분위기에 적응하며 상황을 주시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딱히 옳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다. 단지 어떤 고난에도 좌초되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말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초극이자 저항이며, 인간만이 지닌 불굴의 의지다. 영화 의 주인공은 고아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고,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상경해 재혼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아이는 날마다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에 올라 엄마를 기다린다. 아이는 혼자라는 절망감도 크지만 “니 애미가 서방질해서 도망갔다”고 놀리는 친구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어른의 질투심에 극도의 상처를 받는다. 하지..

자유결혼 - 사랑의 최고 가치는 이타심, 이병일 감독 1958년작

인간은 사랑에 쉽게 빠진다. ‘사랑이 별 거냐’며 애써 부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 중에서 이타심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내릴 때도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피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요즘 결혼하는 부부들 중 이타심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과열 경쟁에 노출되고, 주위를 돌아보는 부모를 보지 못하며 성장한 까닭이다. 이런 친구들이 결혼하면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다. 그런다고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단란하고 여유롭게 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외롭고 힘겨운 일이 닥칠 때는 다르다. 혼자 버둥거리고 해결하려다 꼬꾸라지는 경우..

촌색씨 - 자만 오만 거만이라는 쾌락, 박영환 감독 1958년작

말이 필요 없다. 어떤 운명이라도 헤쳐나가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노력하고, 배우고, 기다려도 평화가 찾아오질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무섭게 어둠이 내리고, 굶주림과 비웃음이 번지고, 최악의 불행이 엄습할 때는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마디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떠했겠나. 그래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영화 의 주인공은 평범함 시골 처녀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이 여인은 시댁 식구들의 구박에 매일 시달린다. “아니 너는 손에 가시가 돋쳤냐. 아이고 귀신도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안 데려가고. 저리 비키지 못해.” 나이 어린 아들도 할머니, 고모가 가르친 대로 엄마에게 손가락..

순애보 -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한형모 감독 1957년작

감정이 절제된 유머가 최고의 웃음을 주듯이 사랑도 주의 깊은 언행에서 가치를 발한다. 약혼식 날 다른 여인의 사사로운 간청을 이기지 못해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비록 살인누명을 쓴다고 해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망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최대 적은 자신이며, 가장 극복해야 할 대상도 자신인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영화 는 고개를 자연스레 끄덕이면서 보게 된다. 는 인격이 고결한 남자의 태도 때문에 엉뚱하게 흐른다. 기독교적인 휴머니즘과 통속적인 소재도 그 당시 일반적인 경향에 맞지 않으며, 이 영화의 흥미까지 떨어뜨린다. 특히 깎아지는 절벽 위에서 ‘나 잡아봐라’를 외치며 도망가는 장면과 교수형을 당하는 꿈을 ..

단종애사 - 운명에 굴복한 삶, 전창근 감독 1956년작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 운명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 운명의 흐름은 주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단종의 운명은 어떻게 봐야 할까? 영화 에서 그려진 단종은 아무런 의지 없이 타인에 끌려간 삶을 살았다.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 때문에 어린 나이의 단종이 얼마나 적막하고 고달팠을까 생각하니 가슴부터 찡하다. 그러나 숨 막히는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궁궐에서 단종이 조금만 더 나약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영화 에서 단종은 시종일관 수척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왕으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한다. 왕으로서의 체통이나 강건한 모습은 도통 찾아볼 수 없다. 귀하고 위대한 사람일수록 자기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에..

시집가는 날 - 욕심이 부른 봉변, 이병일 감독 1956년작

욕심이 생기면 조그마한 이익에 어두워져 지조를 내팽개친다.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았던 대단한 위인들의 절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인격을 지켜야 할 때가 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졸렬한 선택을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경우가 생긴다. 영화 은 양심과 염치를 허영과 맞바꾼 양반의 이야기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현대인에게 쓴웃음을 짓게 할 만한 영화다. 배금주의에 물들어 ‘똥폼’을 잡고, 내실보다 권위만을 내세우는 우리 사회의 속물근성을 1950년대 제작된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결혼 상대를 사랑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타인에게 뽐내는 대상으로 여긴 결과를 코믹하게 풀어낸다. 양반가는 헛된 욕심을 ..

자유부인 - 절제하지 못한 성욕이 부른 파멸, 한형모 감독 1956년작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젊은 혈기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지만 책임이 따르는 것을 알게 되면 대개 자유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어리석어서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어긋난 행동을 할 뿐이다. 영화 은 성욕을 참지 못한 대학교수의 부인의 이야기다. 안락한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기력을 핑계로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여인의 파멸을 그려낸다. 진정한 자유는 지성적이고, 훈련된 사랑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유혹에 이끌려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남편과 아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쾌락만 좇다 정작 소중한 사람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현대인에게도 경종이 되는 이야기다. 누구나 감성의 만족과 욕망의 충족을 기대한다. 권세와 부귀명화, 환락..

서울의 휴일 - 말의 가치와 소중함, 이용민 감독 1956년작

말은 중요하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인간관계를 갈라놓는다. 잔인한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삶까지 파괴한다. ‘혀 아래 도끼가 있다’는 속담도 그래서 생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입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영화 은 말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세 가족의 휴일과 서울 풍경을 재밌게 그려내지만 가장 큰 중심축에는 말의 가치를 논한다. 농담처럼 꺼낸 몇 마디 말은 오해를 낳았고 불신을 쌓았다. 이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기류는 한 미친 여성이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대변된다. 영화는 운이 좋게 오해가 풀려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또한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결말이다. 여러 가지 사건과 곡해로 망쳐버린 하루지만 서로를 걱정하는 말은..

청춘쌍곡선 - 돈 없는 것보다 더 큰 가난, 한형모 감독 1956년작

이제와 돌이켜보니 추억이다. 인생의 참뜻을 알려준다고 해도 다시는 겪고 싶은 않은 일이 가난이다. 1950년대 민중은 배를 쫄쫄 곯았다. 입치레를 제대로 못해 죽어가는 아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다. 영화 은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민중의 삶을 유쾌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동바동 몸부림을 쳤지만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정을 나눴다. 이 영화는 그 마음을 달달하게 포착한다. 이 영화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유행했던 코믹극 ‘스크루볼 코미디’를 변형한 작품이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빈부나 신분의 격차가 큰 남녀가 애증 관계로 얽히다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스토리로 구성된 영화다. 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은 계..

막난이비사 - 운명보다 견고한 양심과 정의, 김성민 감독 1955년작

신분이 높다고 인격이 높지 않다. 많이 배웠다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권력 찬탈을 위해 암투를 벌였다. 실권을 쥐기 위해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고, 세도가에 달라붙어 과거의 은인을 저버리는 일도 흔했다. 조선 시대에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았던 망나니가 있었다. 비록 망나니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태어난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고, 인간다움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짐승이다. 조선 시대는 신분 제도라는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묶여 살던 때다. 그런 시대에도 사람의 양심과 정의는 운명보다 견고했다. 어떠한 고초에도 자신을 등지지 않고, 세상이 조롱하고 비웃어도..

미망인 - 전쟁이 남긴 아프레걸의 욕망, 박남옥 감독 1955년작

전쟁은 인간을 파괴한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말살한다. 전쟁은 위대한 영웅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 붉은 피가 자리한다. 1950년 이 땅에서 벌어진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은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을 그린다. 미망인은 남편이 죽고 나자 먹고사는 일이 막막하다. 아직 젊음도 창창해 성적 욕구 또한 강하다. 미망인은 서서히 변화한다. 깨끗하고 순수했던 그녀는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열락에 매달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그동안 정숙하고 순결하며 순종적이고 헌신적으로 묘사됐던 전통적인 여성상과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정서나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저 없이 ..

양산도 - 지배계급의 부도덕과 가학성, 김기영 감독 1955년작

욕망의 끝은 파멸이다. 자신의 희구만을 채우는 욕망은 불행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바라던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탐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사람의 욕망은 내버려 두면 한도 끝도 없고, 작은 충격조차 견딜 수 없이 추락한 뒤에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개조하는 것뿐이다. 욕망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욕망의 양상이 어떠하냐는 게 중요하다. 심성이 그릇될 때는 욕망에 조정을 당하지만 심성이 올바를 때는 욕망을 조정할 수 있다. 영화 는 절제하지 못한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준다.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도령의 야만적인 만행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들의 부도덕함과 가학성을 여과 없이 까발리면서 조선 시대 민중의 참..

운명의 손 - 분단조국의 아픔과 사랑, 한형모 감독 1954년작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은 끝없이 용서하고, 없던 용기까지 내도록 만들며,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사랑 때문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영화 에서 여 주인공 마가렛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소명마저 망각한다. 그녀는 북조선을 위해 남조선의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였지만, 한 남자를 만난 뒤 모든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사랑을 보여준다. 마가렛의 사랑은 무엇보다 우선했다. 사랑으로 이뤄진 그녀의 모든 행위는 선악을 초월했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지켜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사랑은 전쟁 중 조국을 배반한 행위였다. 그녀의 사랑을 미친 짓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마가렛은 용감했다.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

마음의 고향 - 마음이 이끄는 삶 그대로, 윤용규 감독 1949년작

사람마다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무욕의 마음으로 청빈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살던지 별반 다르지 않다며 이리저리 방랑하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자신의 나약함으로 돌려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사람도 있다. 뭐든 관계없다. 삶의 방향성을 외부의 영향으로 돌리지만 않으면 된다.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연속되는 것이 삶이지만 어떻게 살겠다는 신념만 확실하다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면 됐고,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의 주인공 도성도 모든 억압을 끊어내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12살 동자승인 도성은 자신을 버린 어미를 찾고 싶은 순수한 소망을 가슴 ..

자유만세 - 독립운동가들의 투지와 신념, 최인규 감독 1946년작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산다. 하지만 누구나 신념대로 살지 못한다. 용기와 의지가 뒤따르지 않아서다. 머릿속에만 가득 찬 신념은 헛말과 상처만 부른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신념을 지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이뤄낼 때 가치가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그러했다. 안중근, 윤봉길, 안창호 같은 독립 운동가들이 생각나는 영화다. 오직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 살고 죽었던 이들의 용기와 의지가 영화 에서 감지된다. 누구나 목숨을 부지하며 태평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투쟁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 때문이겠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모여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반도의 봄 - 일제 말기 조선 영화계의 현실, 이병일 감독 1941년작

사랑은 어떻게 배우게 될까? 사랑은 부모나 형제, 친구나 선생 같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체화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직접 사랑을 해야만 배울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도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은 오로지 타인을 위한 것에서만 빛을 발한다. 영화 은 조선시대 영화 제작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사랑의 의미 또한 진중하게 묻는다. 영화 속 사랑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로맨스지만 서로 지켜주고 존중하는 사랑 앞에 일방적인 한 여성의 짝사랑은 논외로 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선택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이해와 방향성이라는 얘기다. 은 일제가 식민지 말기 조선 민중을 선동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친일영화다. 그래서인지..

어화 - 가난하고 척박한 조선민중의 삶, 안철영 감독 1938년작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절망할 수 있는 것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끝없는 가난 앞에서 희망은 무력하다. 가난은 절망보다 더욱 비참한 현실로 삶을 이끈다. 1930년대 말, 일제와 부자, 지주들의 착취가 최고에 달했을 때 우리 민중이 그랬다. 민중은 무엇보다 희망을 먼저 빼앗겼고, 스스로 개나 소, 돼지 같은 삶을 인정토록 강요받았다. 영화 는 여 주인공 인순의 삶으로 당시 민중의 아픔을 은유했다. 인순은 평생 가난에 쫓기며 육체를 유린당했고, 끝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렸다. 한때 인순에게는 짐승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서울에 가서 돈을 벌어 빚도 갚고, 공부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앞뒤가 모두 막혀 숨조차 쉴 수 없는 짐승 우리일 뿐이었다. 이 영화의 ..

미몽 - 문예봉 조택원과의 조우, 양주남 감독 1936년작

돈에 휘둘리며 사는 사람은 마음을 올바르게 쓸 수 없다. 제아무리 어질고 똑똑한 사람도 돈의 굴레에 갇히면 후덕과 총명을 잃고 만다. 또 사사로운 것까지 탐욕을 부리다 보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영화 은 돈과 사랑에 집착하는 여성의 참혹한 말로를 통해 현시대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묻는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재물과 요행에 대한 유혹은 어느 시대든 똑같았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 말기도 마찬가지였다. 은 1936년 작품이다. 80년 전의 작품이라고 해서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 주인공 애순은 욕망 덩어리였고, 욕망은 애순을 소중한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다. 애순 역할은 당대 북한 최고인민배우였던 문예봉이 맡았다.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