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113

카를로스 아모랄레스 - 수만 마리의 검은 나비로 연출하는 초현실적 분위기

매년 봄, 전라남도 함평에서 나비축제가 펼쳐질 때마다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검은 나비로 전시장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Carlos Amorales)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의 작품 ‘Black Cloud’는 종이로 만든 다양한 크기의 나비 2만5천 마리로 전시장 벽과 천장에 설치한다. 작품 설치에는 14명으로 구성된 팀이 5일 동안 쉬지 않고 작업한다. 그 결과물은 대단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나비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쌓여 있어서 놀랍고, 나비들이 쌓임으로써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초현실적이다.   카를로스 아모랄레스는 멕시코 현대 문화와 이슈들을 소재로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음악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

장숙 - 죽음의 무게를 보여주는 ‘늙은 여자의 뒷모습’

종로 3가 한복판. 머리를 산발한 채 길거리에 엎드려 누워 있는 맨발의 늙은 여자를 봤다. 한 겹 두 겹 덧칠하듯이 얼굴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검버섯과 축 늘어지다 못해 겹겹이 엉겨 붙은 목주름,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금이 간 발바닥이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그대로 투영했다.  사람들은 늙은 여자가 불쌍했을까?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그녀 앞에 붕어빵을 놓아두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불같이 분노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발끈 화를 내며 붕어빵을 그 사람에게 던졌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는 노숙자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고 절규하는 듯했다. 장숙 작가의 ‘늙은 여자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늙은 여성의 몸을 사유하듯이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운명의 끝..

이영 - 다종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상호 연결된 인드라망

동심원은 다채로운 색채가 변주하고, 올록볼록한 형태미를 발산한다. 원형이 반짝이고, 원형 구조가 어우러지고 확장하면서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다양한 원형의 색채와 조형, 찬란한 빛의 음영과 볼륨으로 색다른 공명을 전한다. 고도로 세련된 도안적 구성은 강렬한 생동감과 밀도 높은 침성(묵직하게 가라앉는 성질)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허공에 겹쳐 놓은 것 같은 수많은 원형 이미지를 창조하고, 조화롭게 병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실험을 했을까? 이영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생물과 사물이 존재하고,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살면서 진화하고 윤회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불교 철학에서는 이를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인드라망은 에 나오는 말로,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에..

장 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 - 지금도 사랑받는 꼬마 니콜라와 좀머 씨

장 자크 상페는 삽화가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호소하며 호두나무 지팡이를 쥐고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던 좀머 씨의 모습을 그린 만화가다. 끝내 호수 속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보다 그의 그림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외로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마지막 절규는 잔잔한 그림 하나로 충분히 전달됐다. 장 자크 상페는 1932년 프랑스 페삭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르네 고시니와 함께 만들어낸 동화 ‘꼬마 니콜라’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꼬마 니콜라’ 시리즈는 1959년 첫 발표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스테디 설러이자 어린이를 위한..

만 레이(Man Ray) -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그린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사진작가가 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다. 그 당시 경매가가 어마어마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만 레이의 작품 '르 비올롱 댕그르(Le Violon d' Ingres)'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2022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천240만달러(약 159억2천780만원)에 최종 낙찰됐다. '르 비올롱 댕그르'는 나체 여성의 사진 위에 바이올린 에프홀을 그려 넣고 다시 사진을 찍어 인화한 작품이다. 사진 속 여성은 만 레이의 애인이자 모델, 화가 등으로 활동했던 알리스프랭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을 오마주했다. 만 레이는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사진을 그린다는 개..

홍효 - 강렬한 꽃의 생명력으로 투영한 나

정형화된 스타일이 파괴된 이미지에서 까닭 모를 희열이 진득이 밀려온다.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가라앉지 않은 색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활짝 핀 꽃들이 전위적으로 어우러지며 찬란한 생의 의욕을 고취한다. 홍효 작가는 자유분방한 색채와 붓터치로 형상화한 꽃의 강렬한 생명력에 희망이나 행복 같은 감정들을 투영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지 않게 변형하고 휘갈기면서 강조한 이미지로 대상의 실제성을 더욱 부각한다. 인간의 희망이나 행복도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홍효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 감동은 배가 된다. 홍효 작가의 ‘문득’전은 4월 16일부터 28일까지 갤러리 더플럭스 더플로우에서 열린다. 전시장 전경 작품 사진

공성훈 - 인간사 통찰하는 풍경화

공성훈 작가는 자연과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풍경화로 그려내면서 인간사를 통찰했다. 인간사는 모두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일부분이고, 모두 인과 법칙에 따라 아랑곳없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공 작가는 전반기에 멀티슬라이드 프로젝션 설치 같은 실험적인 작업에 전념했다. 이후 1998년을 기점으로 회화 작업에 집중해 도시와 자연을 밀도 높은 풍경으로 담아냈다. 그는 2021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2018년 19회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다. 공성훈 작가의 ‘바다와 남자’전이 4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선광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의 고향인 인천이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공 작가의 작품은 그가 직접 현장에 보고 체험한 기록을 ..

류인 -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한 조각가

故 류인 조각가는 근현대 조각의 구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표현기법을 과감히 모색한 조각가다. 조각의 볼륨과 무게 그리고 재료적 물성을 이용해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했지만 과감한 인체 생략과 왜곡, 극적 강조 같은 형상성을 도입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류인 조각가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아버지 류경채와 희곡작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자의식과 흙에 대한 본능적 욕구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80년대 당시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한국 화단에 정밀하고 힘찬 인체 구상조각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구상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형상적 요소가 접목된 새로운 구상조각을 선보였고, 최초로 조각과 설치미술을 결합한..

의미작용 달리하는 병치의 미학, 황기훈 ‘마크 어브 플라워’ 전

황기훈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항상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 키득거렸던 적도 있었다. 황 작가의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그와 아는 사이여서 일게다. 얘기도 나누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으니 작품이 더 잘 보이고, 의미도 색다르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인다. 황 작가를 만나고 그의 작품을 봐오면서 작가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새삼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해 나가고,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콜렉터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건 대중과의 ‘교류’다. 대중과의 교류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만나 대화하는 일부터 하면 된다. 전시 기획자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언어화 과정보..

이동환 ‘고래 뱃속’전 - 인간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영육은 대부분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유의 시발점에는 근본이 있고, 그 결과의 산물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미(美)에 관해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영육은 조금 더 오묘하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 투영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조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부정해 버리거나 내적인 염원을 심화해 이데아의 세계까지 담아낸다. 이동환 작가가 형상화한 '고래 뱃속'도 예술가만의 남다른 사유에서 시작됐다. 족히 육칠십 년은 산다는 고래 사체가 발견됐다. 어린 개체로 추정되는 젊은 고래가 배에 가스가 가득 차 죽어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게 웬만큼 먹어도 가스가 차지 않는다. 사냥 자체가 어려워 배불리 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냥에 성공해도 죽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다.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해양생물학자..

미술가들이 만든 '장난감이랑 놀자'전 - 떠올리게 하는 장난감

장난감을 떠올리면 제자리에 서서 왈왈 짖는 강아지나 자동차로 변신하는 로봇, 요란한 소리를 내는 플라스틱 실로폰이나 고무줄로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게 생각난다. 모두 공장에서 생산한 장난감이다. 블록, 소꿉놀이 같은 놀이용품도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장난감이었다. 갤러리담에서 본 장난감은 달랐다. 손에 쥐고 놀기보다 보고 즐기며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른들의 장난감이었다. 도자기처럼 깨질 위험도 있고, 괴기스러운 캐릭터도 있고, 벽에 거는 액자 형식도 있어서 아이들 앞에 놓으면 울어버릴지 모른다. 담갤러리 윈도에는 이수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도자기로 만든 중세 시대 검투사 인형이다. 이 인형들은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투사와 해골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황기훈 작가는 여러 가지..

이동환 '칼로 새긴 장준하'전 - 목판화의 힘 느끼게 하는 흑백의 강렬함

사자의 무덤을 찾고, 역사와 마주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나 애도의 의미보다는 반성적 자기 성찰을 위한 행위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고, 내면적 자각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동환 화가가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134장의 판화로 새긴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쁜 현실에 쫓기면서도 3년 동안 장 선생의 삶에 집중했던 동기는 숨김없는 고백과 반성의 시간을 통해 생활의 중심을 잡고, 나아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데 작은 밀알이라도 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미술관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게 아카데미적이거나 요란스럽게 포장된 전시는 부담스러웠다. 누구를 위한 전시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받았다. 이동화 화가의 목판화전은 달랐..

한성필 '지극의 상속'전 - 시간 층위서 발견한 인류 책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거대한 빙하는 수정처럼 희고 푸른 빛을 발산하고, 하얀 설산은 신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영험한 자태로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신묘불측이다.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처럼 청월한 빛깔에 눈부터 휘둥그레진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흙마저도 지극에서는 예사롭지 않고, 하얀 얼음 위의 연못은 말 그대로 보석처럼 빛난다.하지만 이곳에도 어김없이 인간은 침범했다. 흉물스럽게 녹슨 배와 탄광,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수용소, 선혈이 낭자했던 전쟁의 흔적들이 대자연에 매몰된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담하게 지어진 가옥과 도로, 자동차는 대자연 앞에선 미물이다. 남극과 북극은 현대인에게 오지로 읽힌다. 영겁의 세월에 걸쳐 생성된 거대한 빙하와 극한의 추위, 희귀 동물의 서식지 정도로만 우리에게 ..

이도연 '머무르다'전 - 자연의 현현이 부른 환희와 감동

투명하고 엷은 산풍(山風)이 숲과 들을 스치며 소리를 낸다. 풀과 나무들이 푸른 수면처럼 드넓게 공기와 부딪치며 쏴르르르 몸을 떤다. 그 소리에 탐욕과 욕망의 불꽃은 잦아들고, 순백의 자아와 마주 선다. 지상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 아름다운 정령과의 조우의 시간을 마련한다. 반복되지 않는 패턴이 펼쳐진다.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묘사에 감탄이 쏟아진다. 하얀 토끼털과 같이 부드럽게, 초록 비단처럼 '자크르'하게 눈앞에서 흔들거린다. 사실 그대로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심상을 반영해 화면을 채우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이 모두 그렇다. 진심을 보지 못하면 인간관계도 어긋나듯이 그림도 겉모양만 보면 그림을 제대로 좋아하기 힘들다. 이도연 작가의 작업은 한마디로 공양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붓을 들지..

매기 테일러(Maggie taylor) - 현실 뛰어 넘는 초현실 세계

사람보다 30배나 커 보이는 물고기. 벌거벗은 남자가 그 물고기 등에 올라가 그물을 던진다. 울창한 숲 이층집 창문에는 거인 팔뚝이 나와 있고, 굴뚝으로는 도마뱀이 올라간다. 모자에는 갖가지 동물과 사람, 사물이 뒤엉켜 있다.수련이 둥둥 뜬 연못에는 얼룩말이 묘한 표정으로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흡입한다. 상상에서나 가능한 이미지다. 초현실주의 예술은 이성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현실을 배제하기 때문에 사실보다는 추상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예술은 대부분 극히 사실적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사물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지만 이를 찢어내고, 조합하고, 이어 붙여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작해 낸다. 예를 들면 우산을 들고 하늘을 나는 사람, 바닷..

유중희 '욕망의 순환'전 - 소유 그 치명적인 욕망

충돌하고 부딪친다. 상처 투성이다. 잔상이 오랫동안 아물지 않고 화끈거릴 것 같다. 사실적이고 다채로운 그림이 줄 수 없는 감상, 모노톤 이미지가 뿜어내는 건조하고 황량한 느낌 때문이다. 유중희 작가의 작품은 충동을 부추기고, 자극에 좌우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닮았다. 삶에 대한 열렬한 열정과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저항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욕망의 일상,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하면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고개를 떨구지만 그것마저도 쉽게 방기해 버리도록 만드는 자기애다. 유 작가의 작품은 마음을 반성하고 살핀다. 성기고 거친 이미지들이 억세게 되살아나 찬찬하고 야무지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길 권한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도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그것이 '오직' 당연한 ..

송미라 '멈춰 선 풍경들'전 - 노상 달라지는 공간의 찰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형태, 모호한 채도, 개체들의 유기적인 구성이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이보다 한층 더 호기심을 일게 만든 건 송미라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다. 길쭉하고, 뾰족하고, 네모반듯하고, 울퉁불퉁한 도형 등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변이였다. 모양과 성질이 다른 개체가 내부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는 모습. 송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혹은 비틀어서 우리 사회를 은유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순간,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시간의 조각을 붙였다. 공기와 습기부터 개체와 개체가 부딪치면서 생성되는 갖가지 감정과 영향까지, 매일 다른 것들로 빈 공간은 채워진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정한 공간에 존재한다. 이 공간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

김길후 '최후의 수장고 프로젝트'전 - 구도의 붓질

검다. 어둡고 짙다. 암울한 기운이 뻗쳤다. 불분명한 정체가 두꺼운 두려움을 끼얹어 놓았다. 시커멓게 말라붙고, 얼룩진 얼굴. 그 얼굴과 마주하자 자꾸 마음이 움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밝은 색채가 덩이덩이 드러나 검은 얼굴에 광채가 돌았다. 완전한 혼돈이었다. 희미하게 뜨거나 감긴 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눈빛은 전시장 밖으로 여기저기 튀어 맺히며 그을음을 앉게 했다. 갑자기 두 눈에서 불이 번뜩번뜩 켜졌다. 원효가 마신 해골바가지의 물이 떠올랐다.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지는 법이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파계했다. 민중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승복을 벗었다. 어둠을 보지 말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다시 주위를 눈여겨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검지..

노사나 상묵 '천년의 소리, 목어'전 - 목어 울리는 산사

따닥따닥. 절도 있는 두들김소리가 사찰에 퍼진다. 소리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아프게 들린다. 왜일까. 사찰에 가면 유난히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이 많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의미다. 목어 소리는 다독다독 가슴을 치는 훈계다. 때마침 경내 연못에서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은빛 비늘을 번뜩이는 잉어가 머리를 내밀고, 시원한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대다 사라진다. 산사의 고요를 깨뜨린 주범은 목어(木魚)다. 목어는 잘 마른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낸 뒤 안료로 색을 입히면 완성된다. 목어는 사찰에서 얘기하는 사물(四物) 중 하나다. 사물은 범종, 금고, 은판, 목어를 말하며, 종각이나 누각에 걸어 놓고 예불할 때 사용된다. 목어의 종류는 두 가지..

쿠사마 야요이 - 강박과 환영의 소산물

구조적인 모순을 깨뜨린다. 뜨겁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조롱하고, 강렬하고 위트 있는 소재로 인간사(事)를 비튼다. 반대로 강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 황홀경을 조장하고, 초점을 맞춘 렌즈의 강한 집광처럼 뇌리를 자극한다. 이토록 선명하게 시선을 끌고, 돌올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있을지 의문이다.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방울무늬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공황장애로 강박과 환영의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러한 정신의 고통을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실험과 파격으로 풀어내면서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작품은 선명한 채색과 수많은 물방울무늬 때문에 눈을 어질어질하게 하고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오래 보고 있으면 자신의 ..

한효석 '공중부양돼지'전 - 욕망하는 인간의 참혹한 실체

전위적이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시종일관 침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전시장을 질식시킨다. 약간의 쇼크가 가슴을 뒤흔든다. 껍질을 벗겨내고 잘라낸 고기 부위는 다름 아닌 인간의 얼굴. 한효석 작가도 그림을 그리면서 무척 피로하고 고달팠을 것 같다. 보는 것만으로 힘든 그림이다. 해부학 도감에서 보는 사실적인 그림 정도로 치부할 작품이 아니다. 우리도 알고 보면 피와 살과 근육으로 구성된 동물일 뿐. 겉으로만 보면 매일 식탁에 오르는 소, 돼지, 닭고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영혼 혹은 지성, 로고스가 있다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욕망에 사로 잡혀 짧은 삶을 동물처럼 보낸다. 전시장에 걸린 커다란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삶이다. 한 작가의 작품에는 얼굴 피부를 다 벗..

쇼나 조각 - 무료하고 평범한 삶에서 발견한 극적인 감동

이완된다. 정이 넘친다. 기쁨은 뭉클하고, 슬픔은 휘몰아친다. 희열은 살아 숨 쉰다. 저절로 몸이 반응한다. 쇼나 조각은 그야말로 삶 그대로 반영하는 예술이다. 인간이 보이고, 삶이 그려지고, 자연이 어우러진다. 미술은 관람객들에게 충격이나 긴장, 극도의 아름다움을 통해 감정을 뒤흔드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쇼나 조각’이 주는 감동은 전혀 다르다. 오로지 인간의 삶과 팽팽하게 얽혀있다. 인간의 애환과 환희 같은 것이 한데 뒤섞여 훈훈하게 녹아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분간할 수 없는 파장이 마음속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삶은 지독하게 무료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극적이고 감격적인 정서가 꿈틀거리는 ‘역설’이지 않은가. 쇼나 조각은 스케치나 밑그림 없이 정과 망치 같은 전통적인 ..

아오노 후미아키 '환생, 쓰나미의 기억'전 - 예술의 치유

충격이었다. 평범하게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오노 후미아키 작가는 폐허의 현장에서 발견한 흔적들을 복원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흡사 의식과 같은 미술행위였다. 폐허가 된 사물은 새로운 사물과 만나 파괴되기 전의 의미로 되살아나고, 예술 작품으로도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아오노 후미아키 작가는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소에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 복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Tsunami)의 피해가 가장 컸던 센다이에서 수집해 제작한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휩쓸고 간 고통의 흔적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형태의 복원뿐 아니라 의미의 복원을 추구한다. 전시 제목 ‘환생’은 살(flesh)이나 고기(meat)..

송동(宋冬) 'Doomsday Vault project'전 - 최후의 심판일 저장소

Doomsday. ‘최후의 심판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운명의 날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에서 신은 그날이 되면 모든 인간을 심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 최후의 심판의 의미는 좀 다르다. 마치 단두대의 시퍼런 날에 목을 내밀고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커다란 날벼락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의 초상이다. 지금도 징후는 보인다. 기아와 전쟁, 각종 이상기후가 세계를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송동은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류의 저장소를 만들었다. 여러 개의 나무 침대가 빌딩처럼 쌓여 있다. 노아의 방주를 떠오르게 만드는 층층의 대피소. 이곳은 비장미가 흘렀다. 겉으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격렬하게 ..

박정희 - 삶을 가르치는 수채화

소박하고 청초한 빛의 인물 수채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넘치지 않는 정물의 색상, 세월의 깊이를 담아낸 채도, 구상에 함몰되지 않는 명도. 박정희 화가의 그림은 순백의 이미지를 넘어선 ‘그윽한 아름다움’에 따습다. 박 화가의 그림은 미묘하게 마음을 매료시킨다. 고상한 기교나 고결한 감성이 아니라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는 서정이 ‘감정선’에서 일렁인다. 누군가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마음 따뜻한 할머니 화가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그림은 머릿속에 곧장 각인됐고, 가슴에 들어앉았다. 왜일까? 화려하게 꾸미거나 눈부시게 과장하지 않은 그림, 일상의 정경을 그대로 형상화한 이야기, 감정을 함부로 표현해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

박노해 '다른 길'전 - 아시아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씨앗

여느 사진전과 다르게 텍스트가 많았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줄 알기 때문이겠다. 사진 설명은 모두 시처럼 읽혔다. 이 준 공명이었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단호한 문구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장은 끝났다, 석유는 끝났다, 미국은 끝났다.’ 이 문구는 그다음이 무엇이건 간에, 박 시인의 사상적 뿌리를 총괄해 보여줬다. 느닷없이 감동이 밀려왔다. 어떻게 보면 글이나 사진은 넓은 의미에서 창작자의 자화상이다. 이곳에서 읽고 보는 것은 모두 박 시인의 흔적이자 발자취라 할 수 있다. 시와 사진을 창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시인으로, 사진가로 사는 일은 더욱 어렵다.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을 일상으로 치환하내지 못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답다? 그가 아시아를 ..

이동연 '미인도'전, 메울 수 없는 결핍의 구멍을 인정하자

우아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바깥 세계와 소통한다. 이 욕구의 뿌리에는 ‘인간다움’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에 대한 근원적 고독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사회로 치환해보면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치유하면서 사는 것. 그 테두리의 넓이에 따라 인간다움은 깊어지고, 그 테두리 안에서 인간은 동질감을 느끼고 유연해진다. 이동연 작가의 작품은 선이 힘차고 양감이 풍부하다.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워 기품이 넘친다. 그 기품을 더욱 살려주는 건 관람객과 주고받는 방식의 가벼움이다. ‘소통’이라는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인간의 욕구를 경쾌하게 풀어낸다. 그의 작품은 색채도 유려하다.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음영, 옷의 겹침과 피부..

차기율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전 - 각자 짊어진 순환의 몫

바람이 분다.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긴다. 홀로 맞이하는 낯선 공간에서의 사유. ‘나와 너, 인간’이라는 껍질을 놓아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니 바람이 느껴지고, 숫제 마음이 편안해진다. 처음에는 사방에 둘러싸인 돌과 나무에 짓눌렸다. 새의 몸통을 뚫고 나온 나무줄기들은 흉측했고, 화석화된 생명의 잔재들은 지독한 사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모두 그것들을 ‘나’와 분리시켜 벌어진 일. ‘나’를 자연의 일부로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어딘가에 있었을 돌과 나무들이 전시장에 있었다. 작가의 발품과 시선이 머문 오브제(자연물)들이다. 이 오브제들을 보면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얼마나 하찮은지 느끼게 된다. 인..

이상선 '추상적인 인상'전 - 비구상을 구상하다

툭툭 가슴에 걸린다. 앙상한 나무와 거친 돌멩이, 눈 덮인 대지와 길게 늘어진 전선, 그리고 배경 위를 날아다니는 새하얀 꽃잎. 여름 내내 가득했던 따사로운 햇빛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제는 모두 그리움과 고뇌로 번진 과거의 이야기일 뿐.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나선 한 인간의 고행이 느껴진다. 반면 채도 높은 색면은 강렬하게 부딪친다. 풍성한 생명의 율동처럼 오롯이 홀로 빛을 발산한다. 하지만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면 파라솔 같기도 하고, 도시의 단면 같기도 하다. 그림자는 모두 감추고 오직 색과 단순한 면으로 만개한 이미지들. 거기에서도 고행의 숨결은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상선 작가의 작품은 감동적이다. 처연하고 쓸쓸했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발화된 선경, 아름다..

사윤택 '순간, 틈에 대한 언술-메멘토 모멘트'전 - 순간 탐닉

회화나 사진 예술은 정지된 한 순간을 표현한다. 그중에는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도 있지만 깜빡하고 지나가면 보지 못하는 찰나의 장면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회화, 후자의 경우는 사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사윤택 작가는 찰나의 장면을 회화로 그렸다. 그는 코트를 벗어나 튕겨 나가는 테니스공, 이 테니스공을 놓쳐 헛손질하고 마는 선수를 포착했고, 바닥에 떨어지는 공을 받아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비치발리볼 선수를 잡아냈다. 한밤중 책상에 앉아 뭔가에 몰두하다 문득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공원의 사람들, 술에 취해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는 자동차도 그 순간을 붙잡았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슬로 모션 같은 이미지도 형상화했다. 한 몸에 달려 있는 여러 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