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윤수연 사진가 - 죽어도 끝나지 않는 전쟁 이야기 'Homecoming'

이동권 2022. 9. 25. 23:17

윤수연 사진가, 제7회 다음작가상 수상작가


윤수연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즐거웠다. 목젖이 울리면서 나오는 털털한 말씨에, 이따금 마침표를 생략하고 새로운 단어를 끄집어내는 버릇까지 모든 게 흥미롭고 유쾌했다. 그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꿋꿋한 도전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조적인 모순을 향해 던지는 대담한 싸움. 이런 것들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바로 윤수연 작가였다.

전쟁의 ‘속살’을 담아낸 ‘Homecoming’


전쟁은 살육에 찌든 자들의 목마름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심을 후대에게 물려준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영혼까지 부정하는 증오를 남긴다.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철부지에게 살인자의 굴레를 씌우고, 가녀린 처녀의 가슴에 야만자의 낙인을 찍어 다시 전쟁터로 내몬다. 죽어서도 악의를 떨쳐내지 못하며, 슬프디 슬픈 주검으로 굳어 땅에 묻힌다. 이 얼마나 참혹하고 미개한 역사인가.


전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제 아무리 강조하고 되풀이해도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래서인지 전쟁에서 살아남은 미군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젓는다. 혹독하고 차가운 진실 앞에 입을 닫고 아닌 척, 모르는 척 햄버거를 먹는다. 하지만 윤수연 작가는 이들의 그 지독한 아픔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의 참담함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는 또 그 답을 일상에서 찾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고해성사’는 삶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은 미국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의 가해자죠. 하지만 전쟁에서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고통을 받습니다. 전쟁이 가해자이고, 인간이 피해자인 셈이죠.”


그는 미국 42개 주를 횡단하면서 세계 2차 대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2백여 명에 이르는 참전용사와 그들의 가족 이야기를 연작 ‘Homecoming’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편견 때문에 작업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인내의 시간을 허락할 줄 아는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시아계 외국인 여자가 미국의 군인 사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매우 보수적인 데다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거든요. 예일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하니까 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어요. 차를 끌고 다니는 여자애가 있다고.”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눈물


참전용사들 사이에 조금씩 ‘윤수연’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메일이 왔어요. 텍사스주 ‘라리도’라는 곳이 있는데 멕시코와 경계지역이죠. 인구 80%가 멕시코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곳이에요. 거기에 사는 분이 와달라고 했어요. 2006년 11월, 이라크에서 로드밤(Road Bomb-거리에서 터진 폭탄)으로 죽은 아들 벨튼(Velten)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요.”


벨튼은 모범생이었다. 미식축구 장학생이었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빠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군사 훈련을 마치고 바로 이라크 전쟁에 투입됐다. 이후 그는 3일에 한 번씩 집으로 안부전화를 했다.


일요일이었다. 동료가 너무 아프다며 대신 근무를 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쉬고 싶었지만 아픈 동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날 그의 전화를 받은 엄마도 예감이 좋지 않아 말리고 싶었지만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전화가 왔다. 엄마는 전화를 받기도 전에 ‘아들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추측은 운명의 장난처럼 맞아 들었다.


“벨튼의 아빠는 인터뷰하는 동안 한마디도 안 했어요. 과묵하고 조용하신 분이었죠. 밸튼의 엄마는 아침마다 미친 여차처럼 울부짖어요. 그러면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죠. 그녀가 ‘당신은 내가 아침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고 말하니까 그는 ‘여보, 나는 달리기라도 해야 해요.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어요. 저는 그날 사진 1장을 찍고 나왔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눈물, 콧물을 닦은 화장지였죠. 제가 좀 냉혈한인데도 그 사진을 찍으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올해 4월 다시 찾아갔어요. 보여드리고 싶어서 무리하게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지요. 그 집에 3박 4일 동안 있으면서 아빠가 일하는 고등학교, 엄마가 일하는 보험회사에도 갔어요. 제가 묵은 방은 벨튼의 방이었는데, 거기에서도 한 컷 찍었고요.”


윤수연 작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으면서 프로젝트와 관련된 얘기를 여러 가지 들려주었다. 모두 가슴에 와닿고 동감할만한 이야기였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순박하고 정의로운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줄기차게 매달리고 있는 ‘인류애’의 뿌리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양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의 기록들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상을 경고하는 엄혹한 ‘묵시록’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미군의 상징, 월터 리드 육군병원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한 간호사병이 윤수연 작가의 촬영을 1주일 남겨놓고 자살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얻은 쇼크로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굉음을 내며 터지는 폭탄에 팔다리가 잘리고 가슴 가득 총알을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목격하고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동료들에게 성폭행까지 당했다. 전쟁이 낳은 비천한 심성이 그를 성 노리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이라크에 있을 수 없었다. 총칼로 이성을 거꾸러뜨리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전쟁터에서, 그는 간호사병으로서 생명에 대한 연모를 품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요양하면서 언론과 만났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전쟁의 비정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불명예제대’를 당했다. 미군의 위상과 정신을 무너뜨렸다는 ‘괘씸죄’였다. 이로써 그는 국가로부터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잃었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끔찍한 것을 많이 봤어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죠. 일반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할 거예요.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월터 리드 육군병원은 미군의 심장이다. 하지만 이 병원에는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 자살하는 미군들이 많다. 심지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하는 이도 있다.


미군은 전쟁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나라밖 전쟁에 개입하면서 현지 주민들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정의로운 전사’가 아닌 것이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인들 스스로 ‘설득력 없는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은 전선(front line)이 따로 없어 마을에서, 도로에서, 사막에서 시시때때로 폭탄이 터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이 ‘부비트랩’이 되기도 했다. 이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매일 끊이지 않고 이들의 숨통을 조여왔다. 아울러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잡아들이고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어머니가 있고 누이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적’은 이미 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고국에 돌아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뿐이다. 설사 돌아간다 해도 정신적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다. 살인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받고, 영웅으로 불린다 해도 사람을 죽였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이 이들을 ‘자살’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미 펜타곤(국방부)은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의 모든 취재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사진 촬영은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윤수연 작가가 예일대 이름으로 공문을 보내고 협조 요청을 해도 번번이 돌아오는 메시지는 ‘불가’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병원으로 출퇴근했다.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났다. 주말에는 근무자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몇 컷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이었지만 미군으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있었어요. 영주권자였는데 시민권을 준다는 말을 듣고 통역사, 특수기술자로 이라크에 갔죠. 키가 2m나 됐어요. 하지만 정신세계는 15세 소년처럼 순수했죠. 그는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상사들한테 무시당하고 동료들한테 구타를 당했어요. 그런 게 쌓여 심각한 정신장애가 됐죠. 그의 병실에 들어갔어요. 벽에 아랍어로 쓰여 있는 종이 2장이 붙어 있었지요. 하나는 글귀가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종이였고, 다른 하나는 기도 스케줄이었죠. 근데 그 종이를 대일밴드로 붙여 놓았더라고요. 매우 강한 이미지였어요. 이거구나 했죠. 사진을 찍을 수밖에요.”

한국을 대표하는 ‘다음’ 작가 윤수연


윤수연 작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악바리처럼 사진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던 그는 문학이나 그림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에 ‘사진’이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유학을 떠났다. 그는 6년 동안 사진을 공부하면서 매그넘 작가 ‘질 프레스’ 스튜디오에서 적은 봉급을 받으며 보조자로 일했다.


그는 전쟁과 연관된 ‘사람’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고 있다. 올해 8월부터는 2백만여 명에 이르는 중동의 이라크 난민 이야기를 ‘Pledgeless Homecoming’라는 제목으로 담아낼 예정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이미 사전조사와 답사를 마친 상태다.


“요르단 암만에서 이라크 난민들과 함께 있을 거예요. 이후에 시리아와 주변국을 돌다 캐나다나 미국으로 건너간 난민의 이야기로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작업 기간은 2년이고요.”


윤수연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베이스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예일대에서 사진 전공자에 수여하는 두 개의 상을 독식했다. 이 일로 그는 학교에서 ‘작은 대형 청소기’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박건희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제7회 ‘다음작가상’을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이제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의 성장을 토대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대륙과 바다를 잇는 거대한 과제를 완수하는 일에 모든 정열을 쏟아야 할 때가 왔다.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고 힘들어도 한국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결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


“다음작가상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상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건이 맞아 신청했거든요. 포트폴리오를 우편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시간이 촉박했어요. 그래서 급하게 공항에 나가 한국으로 가는 학생에게 부탁을 했어요. 이름은 ‘김준우’예요,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Homecoming’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던 작업이에요. 작업하는 동안 ‘엔드류 코리아’라는 선박업체에서 제작지원을 해줬고, ‘퍼즐모터스’에서는 촬영을 협조해줬어요. 정말 고맙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