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우리 안의 친일문화 14

[친일미술] 작가 소개에 친일 얘기는 왜 쏙 빼는 걸까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보지 않은 한국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1만 원짜리 지폐 속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정이 그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을지문덕, 태종 무열왕 영정도 운보의 손끝에서 나왔다. 김기창 화백은 대검을 끼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황군을 묘사한 '적진육박'이라는 그림으로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면서 특전을 누린 친일 미술가였다. '총후병사' 같은 그림은 황국신민의 영광을 식민지 국민들에게 고취시키는 그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는 3.1 문화상, 은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으며, 그림의 가격도 매우 비싸 보통 사람들은 구경조차 쉽게 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명성만큼이나 김기창 화백 전시가 자주 열린다. 전시 소개를 보면, 그의 친일..

[친일공연예술] 친일공연예술의 총화 '연극경연대회'

조선총독부는 공연예술이 민중에게 파급하는 선정성의 중요함을 간파하고 1940년에 이르러 공연예술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한다. 그러나 일부 연극인들은 일제의 통제에 발맞춰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 연극계에 있어 자발적이든, 강압이든 간에 가장 논란이 되는 사건은 단연 '연극경연대회'다. 1942년에 제1회 연극경연대회가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개최됐다. 그러나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매일신보사 등이 후원한 관제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 소속의 대표적인 5개 극단만 참가해 경연을 펼쳤다. 이때까지는 노골적인 친일 성향은 없었다. 이재명 명지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12월 18일 연극경연대회 심사결과 아랑과 고협이 단체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30일 거행된 시상식에는 ..

[친일공연예술] 근대연극사의 비극 이끈 유치진

유치진은 1974년 운명하기 전까지 연출, 평론을 비롯해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자 희곡 작가로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다. 3.1 운동을 주제로 한 이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을 주인공으로 한 같은 작품은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유치진의 삶과 문학을 평가할 때 피해 갈 수 없는 가장 큰 논란은 친일행적이다. 이재명 명지대학교 교수는 70~80년대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유치진의 '조국'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면서 그동안 선배 연구가들에 의해 한국 연극사가 얼마나 왜곡돼 왔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이냐 친일이 아니냐는 논쟁을 떠나 사실마저도 왜곡됐던 지난날 연극계의 현실을 질책하는 이야기다. "조국의 내용을 살..

[친일공연예술] <인터뷰> 이재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처음엔 대중과 만나기 위해 친일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작업에 참여한 이재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만나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연예술과 친일예술인의 내적논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이 교수는 '해방 전 공연희곡집 시리즈 10권'을 발표해 이제까지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근대연극사 논쟁에 일침을 가했다. '해방 전 공연희곡집 시리즈 10권'은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 근현대 연구 지원사업의 연구수탁과제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공연희곡 대본과 시나리오 대본을 발굴해 왜곡되고 뒤틀린 근대연극사를 바로 잡는 역할을 했으며, 이재명 교수의 뚝심과 학자적 열정을 증명하는 결과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자료의 양적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잊혔던 우리 연극사를 되찾는 ..

[친일미술] <인터넷도록> 친일 미술인과 작품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친일 미술인들의 작품을 엮어보았다. 이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최한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을 정리한 것이다. 일제는 '총후직역봉공'을 조선인들에게 강요했고,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 후원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찬미하고 헌신할 대규모의 이데올로기 조직 만들기에 나섰다. 그러나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동조를 얻기란 힘들 일. 이들은 조선인들의 전쟁참여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선전논리를 펴갔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문화예술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동원한 것이다. 조선 미술인들은 일제의 '신체제운동'에 협력하기 위해 '조선미술가협회'를 만들고, 1943년 '단광회'를 조직하여 조선징병제실시 기념화를 제작하는 등 일제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들의 ..

[친일미술] 김경승, 김인승 형제, 친일로 출세...해방이후 지도급 인사돼

(현재 인천 자유공원의 명칭을 만국평화공원으로 바꾸고 맥아더 동상을 옮기자는 여론이 들썩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예술은 황민화 정책, 경제수탈과 전시총동원체제를 위해 복무했다. 친일 미술인들도 이에 동참하여 붓과 망치를 들고 작품을 창조했다. 가장 뚜렷한 친일 예술로 지적됐던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분야에서도 그 족적은 여러 군데서 발견되고 있다. 조선 미술계에는 전통양식을 파괴하고 일본 화풍이 강요됐다. 미술이 일제의 식민지 선전교화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자연스럽게 후학들도 친일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더욱 심화됐다. 시국전람회와 종군 미술 양성을 통해 전시 파시즘을 육성했으며, 조선의 미술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근현대미술계의 선두주자로..

[친일미술] <인터뷰> 김민수 서울미대 교수 - 반민특위 처단이 사회 부조리의 서곡

서울미대 김민수 교수가 거쳐 온 험난한 여정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친일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여파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김 교수는 지난 199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서울미대 초장기 원로교수 장발, 노수현, 장우성을 친일미술가로 인용 언급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학장실에 불려 가 4시간 동안 이 부분을 '삭제하라'는 협박과 회유를 당했으며, 심지어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의 단초가 된 '연구실적심사보고서'도 또한 이 문제와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그는 1998년 8월 31일 서울대 교수 재임용심사에서 재임용 심사요건을 충족시키고도 탈락하고 말았다. "친일청산을 얘기하면 '지난 ..

[친일미술] <인터뷰> 최열 미술평론가 - 출세지향 욕구가 만든 친일미술

최열 미술평론가는 근대미술사학회의 부회장이자 미술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와 '한국근대미술 비평사' 등의 저자이자 친일인물사전 편찬위원이다. 그는 '교사가 음란물을 배포했다'는 죄목으로 김인규 선생을 체포한 경찰에 날카로운 공개질의서를 보내 미술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날카로운 필체로 근대미술사의 정곡을 훑어오고 있는 최열 평론가를 만나 친일 미술인들의 내적논리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았다. "친일 미술인들 중에 지금까지 반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작가 구본웅이 해방 직후에 반성문을 쓰긴 했지만, 당시 공개적으로 쓴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된 것일 뿐, 진정한 반성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친일 행위에 대해 지적을 하고 청산을 해야..

[친일음악] 현제명의 민족개량운동 친일논리

홍난파가 해방 이전 국내 음악계의 대부였다면, 그의 뒤를 이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양악계의 거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현제명이다. 그는 국내의 유명 음악 단체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아왔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서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현제명은 역사적으로 가장 친일 행적이 뚜렷한 '친일 음악가'였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는 "현제명은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 총독부의 관제 친일단체에서 지도자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면서 그가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

[친일음악] 친일 음악의 대부, 울밑에선 봉선화 작곡한 난파 홍영후

공교롭게도 친일 음악인이라고 불리는 조선 음악인들은 한국 음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기 전 이들은 발전된 국내 음악계를 선도한 자랑스러운 선구자로 칭송됐으며, 일제강점기의 핍박을 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던 애국지사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은 현대 음악을 개척한 두 영웅 난파 홍영후(모리카와 준)와 현제명(쿠로야마 사이민)에게 친일 음악인이라고 선고했다. 이들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와 황도 선양의 기치 아래 황국화 사상보국운동에 동참하고 친일 논리를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부 음악인들은 "홍난파는 망국의 한을 부르짖는 심정에서 우리 민족의 처지를 봉선화로 비유한 우리나라 최초 예술가곡 '봉선화'를 애통한 가락으로 우..

[친일음악] <인터뷰>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반복적인 친일 행위는 강요 아니야

친일 음악인들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전시총동원 정책에 따라 굴종과 동조를 강요당한 것이지 '친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일제의 총검 앞에 '어쩔 수 없이' 친일 음악을 작곡, 지휘하게 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 음악인들의 친일행위는 반복적이고 구체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후 역사는 이들의 친일 행위에 대해 단지 '강요였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아니오'라는 답을 내놓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의 지적도 이와 같다. '식민지 시대'라는 특별한 환경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조선의 음악인들이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제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조선 음악인들은 공공연하게 일본 '천황'을 찬양하..

[친일문학] <인터뷰> 홍기돈 문학평론가 - 친일문인들의 논리적 정당성 해부

홍기돈 평론가를 만나 친일문인들이 내세웠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았다. 홍 평론가는 친일문학 연구의 차세대 주자 역할을 다부지게 해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친일 문학가들은 일제의 지배논리와 전쟁의 이론적 기반이 됐던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에 동조해 민중들에게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면서 대규모 징집과 징병, 종군위안부 등을 적극 선동한 것이다. 이들은 왜 식민지의 현실을 외면하고 친일 문학인으로 전향한 것일까.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전향한 문인들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선일체'에 동의했던 문학가들입니다.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입니다. 1938년 10월 중국 무한삼진..

[친일영화] <인터뷰> 강성률 영화평론가 - '조선영화령'에 자발적으로 동조했던 영화인

강성률 영화평론가를 만나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인들의 친일통제정책 옹호논리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았다. 강 평론가는 광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영화 부문을 맡았다. "일제는 조선 영화를 '강제'했지만, 당시 영화인들은 일제의 영화 통제 정책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영화 통제 정책인 '조선영화령' 시행에 따라 얻게 되는 이익을 뿌리칠 수 없었죠. 일제의 억압에 의해 협조한 면도 있지만, 눈앞의 이익 때문에 주판알을 튕긴 것입니다. 조선 영화인들은 배급사와 제작사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서 민족말살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영화사가 대기업화돼 생활의 안정을 찾고, 영화인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화려한 유혹에 눈이 멀고 말았죠..

[친일청산] <인터뷰>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 정신적 가치기준 바로 세우는 일제잔재청산

사소한 것에서 균형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프톨레미의 바위가 아스포델이라는 꽃이 닿자 몸을 떨면서 부서져버렸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투한 사소한 것들로 인해 정체성을 잃고 지배당할 수 있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리라. 일제 잔재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 문화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일제 잔재를 인식하고 청산하지 않으면 진정한 해방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을 만났을 때는 해방 60주년, 을사늑약 100주년, 강제병합 95주년이 되는 2005년이었다. 이후로도 민족문제연구소에 일이 있어 들를 때마다 가끔 뵌 듯하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민족의 근현대사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의미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