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도쿠야마 쇼초쿠 교토조형예술대학 이사장 - 평화와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예술가 꿈꿔라!

이동권 2022. 9. 25. 22:40

도쿠야마 쇼초쿠 교토조형예술대학(Kyoto University of Art and Design)이사장


도쿠야마 쇼초쿠 교토조형예술대학 이사장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행복이란 ‘희망’을 지닌 사람의 것이지 않은가.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열정과 풍미는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뜨겁고 굳건했다.

나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까다롭게 따지는 것을 매우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힘겨웠던 과거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행복의 꽃을 피워내는 마음가짐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에게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마음의 상처’로 머무를 수 있었던 과거사들을 자신의 철학과 신념으로 승화해 오늘날 평화와 사회변혁을 이끌어나가는 예술교육운동의 선구자로 우뚝 섰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하고 희망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쿠야마 쇼초쿠 교토조형예술대학 이사장을 만났다. 일본 예술교육 분야의 대가로 잘 알려진 그의 교육 철학을 통해 한국의 예술교육과 예술가들의 문제점들을 직시해봤다. 통역은 고바야시(임소원)씨가 맡았다.

도쿠야마 이사장은 1966년 여성 교육의 일익을 담당한 교토의 복장전문학교를 재건했고, 1977년 교토조형예술대학 및 1992년 도호쿠예술공과대학을 설립했으며, 1983년 교토문화일본어학교, 2001년 교토예술극장 ‘춘추좌(春秋座)’를 개관하는 등 일본의 예술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문예부흥을 이끌어가는 예술가를 배출하는 것이 예술대학의 역할이며, 예술가는 재물이나 명예보다는 평화와 사회변혁을 이끌어나가는 예술혼을 간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쿠야마 쇼초쿠 이사장은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리는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했으며, 귀는 어두워 보청기를 착용했다. 그에게 예술을 공부하고 싶은 한국의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예술대학은 미(美)에 대해 얘기하고,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만의 고유한 미적 관점으로 자신을 가꾸고,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려 하며, 타인의 ‘미’에 대해서도 폭넓게 이해하고 감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술대학은 항상 미를 염두에 두고, 미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자신과 타인의 미를 겨루는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말해두자면, ‘자신을 가꾼다’는 것은 단순히 옷이나 얼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아름다움은 결코 그러한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원래 가난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값비싼 미도 존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현이 불가능한 미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돈을 들이지 않은 미, 즉 가난한 미 또한 멋지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미는 학생에게만 허용된 하나의 특권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말해서 젊음의 미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완벽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인간의 미는 특별하게 미를 의식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자연스러운 행위를 통해서도 발현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연을 당하면 깊은 충격에 빠져 삶을 부정할 만큼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탄과 충격에 휩싸인 모습에도 심오한 인간의 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친의 죽음이나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는 고뇌의 한가운데서도 그 사람의 표현 속에는 멋진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기쁨이나 학문에의 정진, 친구와의 대화, 여흥의 한 순간에도 제각기 미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술가들은 이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묘사해 온 것이겠지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일상생활의 곳곳마다 미의 원형이 담겨 있으며, 미라는 것은 돈이 아닌 인간의 생활상에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기 바랍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학 본연의 목적인 ‘진리탐구’보다 ‘출세지상주의’가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다. 기성세대들의 삐뚤어진 교육관과 배금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늘날 대학교육의 현실을 어떻게 볼까?

"흔히 대학은 학문을 하는 장소로써 ‘진리 탐구’를 지향하는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런대로 타당한 생각인 것 같지만 지극히 고전적인 개념으로, 현재의 대학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대학의 현실은 과도한 입시 경쟁과 어리석은 취업전쟁의 중간지점으로, 수험 지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속물적인 해방감과 장래에 닥칠 사회진출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보내는 일종의 불안정한 시기, 혹은 현대 학벌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을 취득하는 제한된 기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 탐구를 표방했던 선배들이 어떻게 이 나라와 세계를 황폐화시켰는지, 또 전쟁을 일으켜 인류에게 상처를 입히고 공해를 양산했으며 얼마나 오욕에 찌든 생활을 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봐 왔습니다. 이에 불변의 대학 이념인 ‘진리 탐구’는 과연 무엇을 의미했었는지에 대한 깊은 반성과 더불어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진리 탐구의 사도인 학자 사회 전반에 대해서도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물론 우수하고 존경받는 학자도 많지만 자신의 생활과 체면 유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학자 또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 신념에 입각해서 사회적 모순이나 공공의 악에 대해 단호하게 소신을 밝히고 관철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학생은 젊은이다운 예리하고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부류의 선생들을 즉시 알아볼 것이고, 또 그들을 신뢰하지도 않고 배우려 들지도 않겠지요. 하지만 단지 취직을 위해서 졸업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학점만큼은 따려고 하겠지요. 선생님들 또한, 그러한 여러분들을 보면서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냉랭하고 단절된 관계가 있을 뿐이며 결국 대학생활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공허하고도 어설픈 지식만을 가득 채운 채 마무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를 짊어지게 됩니다. 젊은이는 앞 세대가 제시한 관념의 틀 안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대학은 다음 세대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활력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한국에는 대학이 정말 많다. 이제는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고 경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통폐합까지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우후죽순으로 대학의 수가 늘어난 것은 학교를 돈벌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지성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이 가져야 할 지향과 덕목은 무엇일까?

"1977년 1월이니까 교토조형예술대학이 설립된 지 30년이 지났고, 이제 다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시점에 와있습니다. 학원 창립의 이상은 ‘교토 문예부흥’운동으로 결실을 맺었고, 드디어 ‘일본의 예술입국’을 전망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본 대학 설립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세계의 냉전 구조가 종식됐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여전히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 많은 지역에서 민족과 종교 분쟁이 격화일로에 있으며,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는 전쟁과 살육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른 빈곤 문제와 급속히 악화된 환경파괴는 인류의 생존마저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1977년에 40억 명에 달한 세계 인구는 65억 명을 초과하면서 불과 30년 사이에 25억 명 이상의 증가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구의 자원 소비량에서는 14억 인구의 중국이 미국을 웃돌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에 이어 2030년 세계 최대의 인구수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인도와 여타 개발도상국이 미국 정도의 생활수준이 되었을 때 지구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지구가 부양 가능한 인구는 현재 여러 나라의 생활수준을 기준으로 약 90억 명에서 100억 명으로 추산되는데 지금 같은 인구 증가의 폭발로 미루어보면 지구의 허용량을 넘어설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때에 과연 인류는 예지를 모아 환경 파괴를 막고 빈곤을 퇴치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자원을 고갈시키고 전쟁과 살육을 반복하면서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될까요? 저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운동을 예술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교토조형예술대학은 ‘전쟁과 평화’, ‘전쟁과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의 주장을 펼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술을 배우는 젊은이들에게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심어줄 수 있을까’, ‘상상력을 동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다수의 행복을 위한 일에 예술의 힘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자세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창조력을 어떻게 하면 몸에 익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어떠한 방법으로 예술가의 혼을 간직한 젊은이들을 세상에 배출시킬 것인가’ 고민하면서요. 문예부흥이란 문예부흥을 이끌어 나갈 인재 육성 그 자체이며, 이러한 교육이야말로 바로 저의 주요한 교육철학이자 본 대학의 가장 중요한 사명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대학은 이러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인류가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는 열쇠가 인간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있다는 사실을 사회를 향해 힘차게 외쳐야 합니다. 대학생이 사회에서 활동할 영역을 확보했을 때, 비로소 대학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토조형예술대학은 전력을 다해 학생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젊은 ‘창조력’이 사회 변혁에 일조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술의 입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 갈 것인가’, ‘이 세계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이러한 이상과 철학을 배우고 후세에 전하는 것이 교육의 근본입니다. 이상이 없는 대학은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철학 없는 예술운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정신을 ‘평화를 추구하는 예술운동’에 두고 있다. 대학 순위나 취업률에 목매고 있는 한국의 대학과는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한반도에서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분출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북한은 핵실험을 실시해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핵보유국입니다. 게다가 인류의 머리 위에 핵폭탄을 투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지금도 만 개에 달하는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9개국이 모두 약 3만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를 30회 이상 파괴할 수 있는 양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지금 또 이란에 자극받은 아랍 국가들이 연합해 핵 확대 경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러한 시점에서 강대국들은 핵 확산 근절의 선두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평화를 가로막고 지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남북 베트남, 동서 독일이 통일을 이뤘지만 한반도에서는 지금도 민족과 국토의 분단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전토가 초토화된 치열한 전쟁을 경험했고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민족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고 민족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한국 국민과 우리는 서로 어떻게 협력해야 할까요. 한반도의 대립과 긴장이 풀려 한민족의 분단과 슬픈 아픔의 역사에 종지부가 찍혀야만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향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일본,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 및 현대 예술문화의 연구, 예술문화의 교류사 연구, 교원과 학생 간의 실질적인 학술교류를 통해 인류 위기 시대에 ‘동아시아 평화문제’ 혹은 ‘예술과 문화를 통한 민족연대 문제’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우선 도호쿠예술공과대학, 한국의 홍익대학교가 공동으로 ‘동아시아 예술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활동을 연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같은 한국의 유력 대학들과는 물론이고 중국의 대학들과도 함께 할 생각입니다."

한국의 예술교육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예술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국비, 자비 유학생의 대부분이 미국식 세계관이 형성된 교육환경에서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사회를 재생산한다. 미국식 사고를 따르는 영국, 일본 유학생까지 합치면 한국 유학생의 90% 이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볼까?

"새로운 세계 문명의 중심은 미국이나 구라파가 아니라 동양의 사상에 의거한 문명이 될 것입니다. 미국이 현대문명의 중심이라는 판단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는 동양사상과 예지를 기조로 한 철학만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문명이 패배하게 된다는 점을 젊은이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양사상은 농경 문명의 사상입니다. 자연 안에서, 땅을 일구고 생명을 키워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 서구의 사상은 ‘사냥’입니다. 근본적으로 매우 다릅니다. 미국식 세계관에서 벗어나 동양의 정신을 세우는 일에 젊은이들이 노력해주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중국이 패권주의로 가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한국의 예술은 학연, 지연에 얽매여 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면 예술가로 인정받기 힘든 실정이다. 요즘에는 예술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다. 힘든 예술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그의 견해는 어떠할까?

"예술을 돈벌이 수단이나 자기 출세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본래 예술의 모습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이익이나 출세를 배제하는 것에 예술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술은 돈이나 출세가 아니라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인류를 구제하는 힘은 예술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술하는 마음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신념으로 끝까지 실행해 나갈 것입니다. 예술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점은 중국이 심각합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조금 나은 편이죠. 일본의 예술가나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예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예술가들은 양심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양심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예술입니다. 돈이 없어서 예술 활동에 지장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은 돈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을 갖고 예술을 해야 합니다."

도쿠야마 쇼초쿠 이사장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혼란기’에 청춘을 보냈다. 이 시절 역사적 상처들이 그의 ‘미래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전쟁과 살육의 시대를 직접 겪으면서 어떤 미래를 꿈꾸었을까?


"어떤 전쟁이든 인류의 불행이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한숨) 그 당시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 몰랐습니다.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근데 마음속에서는 일본이 이대로 이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국주의가 더욱더 심해질 것이고, 그런 국체(國體)로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왜 전쟁에 졌는지 나름대로 납득이 갔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니는 절대적인 반전주의자였습니다. 일본 천황 중심의 체제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그런 말씀을 듣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100% 다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또 패전 후 좌익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 시절부터 그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을 평화운동에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일본 내 군수품 수송반대 운동을 벌여 투옥됐다. 그 당시 그의 정신적인 지향과 바람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일화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었는데, 반기를 드신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비참한 결과로 끝났는데, 또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니까 오직 막고 싶었을 뿐입니다. 더 깊은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나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잘 몰라서 망설여집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조금 설명을 하자면 자라면서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하면 안 되는 대우를 했던 것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것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있고,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가해자의 의식이 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고, 약자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저에게 일러주시곤 했습니다. 정의감이 강한 분이셨죠. 제가 한국전쟁에 반대했던 가장 깊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반전운동과 달랐죠. 뼛속 깊이 파고들어 있는 가해자 의식이 컸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의 베이스가 됐고요.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동권 기자를 보니까 호감이 가서 여기까지 얘기하게 됐습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의 얼굴을 봤었기 때문에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 골격이나 눈빛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죠."

한국전쟁 당시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더 청했다. 


"교토 근처에 화약고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출발해 후쿠오카까지 수송되는 군수물자를 막으려고 기차를 세우다 잡혀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니까 열두세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저에게 새로 왔으니까 인사(신고식)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누구한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다다미를 겹으로 깔아 조금 높게 해 놓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전과 8범이었죠. 제가 다시 왜 인사를 해야 하느냐고 거부하니까, 건방지다고 폭행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과 8범이 저한테 젊지만 용기가 있다며 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왜 들어왔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한국전쟁을 반대하려고 열차를 세우다 잡혀왔지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자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거꾸로 자기 자리를 내줬습니다. 이후 그는 저에게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는 20일 정도 있다가 먼저 나왔는데 그 사람은 3년 정도 있으면서 가끔 엽서를 보내왔습니다. 출감한 뒤에는 저의 영향으로 일본공산당에 입당도 하고, 아주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도쿠야마 이사장은 별다른 말씀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이후 일본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고난에 부딪친 것으로 짐작된다.)"

도쿠야마 쇼초쿠 이사장은 윤동주 시인의 자취방이 있었던 교토조형예술대학 캠퍼스 내에 시비를 건립했다. 외국 문학가의 시비를 대학 캠퍼스에서 세우는 일이 정서상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은 설립할 때 저의 사상이나 인생관을 다 담아서 만들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학교에 모여 있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일본에는 대단한 사상가나 유명한 위인도 많지만 조선인 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는 일, 그리고 학교 예산을 거기에 쓰는 일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고, 도호쿠 예술공과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장실에 가면 윤동주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에게 했던 과오를 사죄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교토조형예술대학, 도호쿠예술공과대학 학생들을 포함해 모든 교직원들이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을 공부하고 싶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덕담을 좀 부탁했다.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조선 민족에 대한 가해자라는 부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단 희망사항은 있습니다. 마음껏 즐기고, 당당하게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기에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다양한 사상을 경험하면서 보냈으면 합니다. 친구 사귀기, 이성 간의 교제, 성인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걸음, 여행, 음악, 문학, 스포츠 등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창조적인 시도,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창조 과정, 훌륭한 예술가들과의 만남, 노동이나 생활체험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스스로를 부단히 주시하고 독려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체험과 관찰, 자기 성찰과 반성을 거듭할 때 여러분을 신뢰하는 친구들이나 존경하는 교수들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또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끝까지 추구해 주십시오."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은 ‘남북통일’을 얘기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면서 "통일이 되면 한국의 예술은 대단한 발전을 이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