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전소정 미디어아티스트 - 겉모양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

이동권 2022. 9. 25. 21:49

전소정 작가


아찔하게 좁고 고요한 숲 속에서 한없이 두껍게 쌓인 고독의 정취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제멋대로 넘쳐나는 새소리에서부터 바위와 수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스스로 생성되고 소멸되면서 ‘숲’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하게만 보이는 곳에도 호들갑스러운 비명이나 헐떡거리는 숨소리는 언제나 터져 나오는 법이다.  파란 없이 지내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숲도 또한 뜨겁고 팽팽한 삶의 현장이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며 숲 속을 걸었다. 넓적한 나뭇잎 위에는 솜털 구름이 내려앉았고 그 밑에는 하얀 수증기와 검푸른 이끼들이 엉겨 붙었다. 거대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은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알 수 없는 그림자를 만들어냈는데, 마치 꿈이나 전설 속에 나오는 귀신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따뜻한 흙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숲을 거슬러 올라가자 폐허가 된 오두막이 나타났다. 주위에는 소나무 껍질의 씁쓸한 냄새와 레몬밤나무의 상큼한 향취가 가득했고, 향수를 뿌려놓지 않아도 저절로 뒤덮이고 뒤엉켜 코끝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로즈메리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한때는 이곳이 아담하고 정겨운 곳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마당 한 쪽에는 안개에 잠긴 수영장이 있었다. 연연히 뻗어있는 숲과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고적하고 수척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옆에는 실제 사람 크기의 여자 인형이 놓여 있었다. 인형의 눈에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공허와 피로에 젖은 한 사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척 외롭고 슬픈 얼굴이었다. 이 사내는 잡초가 우거진 길섶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작은 촛불로 암흑을 물리치며 자연을 찬미했겠지만 무섭고 엄한 조물주의 ‘벌 혹은 성욕’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듯싶었다.

갤러리 킹에서 전소정 작가를 만났다. 그의 작품은 소담스럽고 아기자기한 이곳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작업에서는 내러티브 없이 기억의 한 순간을 끄집어내 이미지로 형상화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스토리가 있는 작업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다.

“핀란드는 시각적으로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이었어요. 서울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곳에서 살다 그곳에 가니까 적응하기 힘들었죠. 정말 무료한 시간이었어요. 하루는 핀란드 친구의 소개로 무용수가 만든 숲을 방문했어요. 이제는 폐허가 됐지만 매우 이미지가 강렬한 곳이었죠. 곳곳에 여자 인형이 놓여 있었는데 그 인형을 보니까 그 무용수가 무척 외롭게 느껴졌어요.”

전 작가는 한국에 돌아와 핀란드 숲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하나 엮었다. 한국인 무용수도 섭외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상 속의 무용수를 재현했으며 작품 모두를 직접 손바느질했다.

외로움의 전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이상야릇한 숲을 보면서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의 숲에서 고독과 두려움을 읽었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거나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롯이 홀로 살아왔고, 성장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됐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기억해내지 못한 삶은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여유만만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온전하고 깊게 관계를 맺거나 나누지 못하면 외로워진다. 그의 작품은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들에게 깊고 넓은 사색의 길에 빠져들게 할 것이다.

전소정 작가는 무척 흥미롭다. 조각을 전공했지만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사진, 영상 등 작업에 도움이 된다면 겉모양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매체를 대담하게 적용한다. 이후에 그가 어떤 모습과 작품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