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김순임 설치미술가 - 예술로 승화한 깊이 있는 삶의 자세

이동권 2022. 9. 25. 21:25

김순임 작가


추억은 기억하면 할수록 훨씬 뚜렷한 상이 된다.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않아도 희미해지거나 빛을 잃지 않으며 시선이 멈추는 곳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온화한 사색의 장을 열어준다. 제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도 기억하거나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잊혀버리는 ‘망각’처럼 영영 가슴속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삶은 기억에 의해 깊이를 달리할 수 있고, 현실에 얽매이다 보면 ‘내’가 허공에 붕 뜨는 경우가 생긴다.

추억은 냉엄한 면도 있다. 비참하고 슬픈 일들은 억지로 내동댕이칠수록 더욱더 가슴에 깊이 각인되고 일상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끊임없는 문답을 만들어내고 마비돼 가는 영혼을 뜨겁게 밝힌다. 또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애당초 행복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일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들며, 내일을 여는 지평을 다지게 한다.

시간의 자취가 차곡차곡 내려앉은 김순임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과거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잠에 취한 숲속처럼 아득한 기운이 완연하다. 김순임 작가의 기억 속에 남겨진 편린들을 기록한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군상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유독 삶을 깊게 탐닉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 여로에 특별한 아픔이 있어서도 아니고,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설만큼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다. 이들은 작은 것이라도 섬세하게 관찰하고 느끼면서 타인의 경험과 즐거움, 슬픔의 근원을 자신의 삶으로 전이시킨다. 그녀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다. 어느 누구보다 삶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 보고 싶어 하며, 그것을 기억해내고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요. 그 만남 중에서 제 마음속에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죠. 이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기록했어요.”

그녀의 작품은 회상 속에서 유추된다. 예를 들면 작품 ‘안분선’은 할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사진 속의 할머니를 형상화했다. 작품 ‘김희찬’은 백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배우고 느꼈던 기억들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녀의 작품은 매우 세밀하고 찬찬하다. 바위 밑으로 흐르는 물이 안개를 일으키며 증발해버리는 것처럼 예민하고, 수목 사이로 흘러가는 물이 길을 막고 있는 눈 속에 스며들면서 살얼음으로 변하는 것처럼 신비롭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 느낌은 더욱 실감 난다. 허연 솜과 실, 천 등이 뒤엉켜 만들어낸 작품은 차마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만큼 위엄이 넘치고 진중하다.

김순임 작가의 작품은 모두 ‘한땀수’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손바느질로 작품을 만든다. 한 작품을 만들기까지 많은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는 “결코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작업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이유다. 그녀는 작품 ‘the genius boy’를 가리키며 말한다. “‘공기’라는 존재처럼 우리가 누리고 있지만 생각하고, 기억하고, 아끼지 않으면 모두 사라져 버릴 거예요.”